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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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림 (李嘉林) 시모음

휘수 Hwisu 2008. 1. 24. 13:40

1943년 만주 출생 정읍에서 성장

성균관대 불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프랑스 루앙대학 불문학 박사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후광문학상 수상

시집 『빙하기』,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순간의 거울』, 『내 마음의 협궤열차』

에세이집 『사랑, 삶의 다른 이름』, 역서 『촛불의 미학』, 『물과 꿈』『꿈꿀 권리』

현재 인하대 불문과 교수

 

 

 내 마음의 협궤열차 1

 

   측백나무 울타리가 있는 정거장에서

   내 철없는 협궤열차는 떠난다

   너의 간이역이

   끊어진 철교 그 너머 아스라한 은하수 기슭에 있다 할지라도

   바람 속에 말달리는 마음 어쩌지 못해

   열띤 기적을 울리고 또 울린다

   바다가 노을을 삼키고

   노을이 바다를 삼킨

   세계의 끝

   그 영원 속으로  마구 내달린다

  

   츨발하자마자 돌이킬 수 없는 뻘에

   처박히고 마는 내 철없는 협궤열차

  

   오늘도 측백나무 울타리가 있는  정거장에서

   한 량 가득 그리움 싣고 떠난다

 

석류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

 

 바지락 줍는 사람들

 

바르비종 마을의 만종 같은
저녁 종소리가
천도복숭아 빛깔로 포구를 물들일 때
하루치의 이삭을 주신
모르는 분을 위해
무릎 꿇어 개펄에 입 맞추는
간절함이여

 

거룩하여라
호미 든 아낙네들의 옆모습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 번도 더 입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不在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빙하기

  ― 쟝 바띠스트 클라망스에게

 

그 헐벗은 비행장 옆
낡은 에레미야 병원 가까이
스물 아홉 살의 강한 그대가 죽어 있었지.
쟝 바띠스트 클라망스
스토브조차 꺼진 다락방 안 추운 빙벽氷壁 밑에서
검은 목탄으로 뎃상한 그대 어둔 얼굴을 보고 있으면
킬리만자로의 눈 속에 묻혀 있는 표범 이마,
빛나는 대리석 토르소의 흰 손이 떠오르지.
지금 낡은 에레미야 병원 가까이의 지붕에도
눈은 내리고
겨울이 빈 나무 허리를 쓸며 있는 때,
캄캄한 안개 속
침몰하여 가는 내 선박은
이제 고달픈 닻을 내리어 정박하고서
축축히 꿈의 이슬에 잠자는 영원인 것을,
짙은 밤 부둣가 한 모퉁이로
내 아무렇게나 혼자서 떠나보네.
갈색 머리 흑인 여자의 서러운 이빨같이


서걱이는 먼 겨울 밤 바다 살갗은
유리의 달에 부딪쳐 바스러지고
죽음보다 고적한 외투 속의
내 사랑은
두 주일이나 그냥 있는 젖빛 엽서
나목裸木 끝에 마지막 한 장 가랑잎새로 지는 것을
쓸쓸히 웃으며 있네.
지난 생 마르뗑의 여름 밤 주막에서
빨갛게 등불을 켜 달고
여린 별빛들이 우리 잔등에 떨어져 와 닿는,
들끓는 소주를 독하게 마시며 울었지.
쟝 바띠스트 클라망스
그대 건강한 의사가 되겠다고 여름내
엄청난 야망은 살아
자기 안의 한 무더기 폭약에 방화도 했지만
참혹하게 파손되어 간 내실內室이었음을,
어느 저녁 식탁에선가, 눈물 글썽이게 하는
그대 슬픈 소식을 건네 들었지.
지금은
옷고름처럼 나부끼는 달빛에 젖어
마른 갯벌 바닥으로 배회하다
무릎까지 빠지는 맨발의, 괴로운 밤 게(蟹)가 되어서 돌아오는
조금씩 미쳐가며 나는 무서운 취안醉眼인 채
황폐한 자갈밭을 건너
흐린 가스등 그늘이 우울한 시장거리에서
눈은 내리고
하얀 수의囚衣 입은 천사처럼 잠시 죽어 봤으면 생각하다가,
아아 자꾸만 목이 메이고 싶어지는
내 목관木管의 노래는 떨려
오뇌의 회오리바람에 은빛 음계들이 머리칼마다
흩날리며 있네.
그 드뷔시 찻집 유리 속의 금발이 출렁이는 인형은
젖은 눈에 성에 낀 창 밖을 보고
수런대는 목소리들 잔盞 둘레로 넘쳐나
비듬처럼 쌓여 가는데
잊히인 의자 아래 이랑져 오는 음악의 꽃빛 눈부시는
바람결 소리여,
이 침전하는 장송葬送의 파도 가에 앉아서 단 한번
고운 색깔이 아롱진 어안魚眼의 나는
뜨거운 두 손으로 피곤한 이마를 묻어 보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