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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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세계의문학 제1회 신인상 / 김지녀

휘수 Hwisu 2008. 1. 23. 01:14

1978년 경기도 양평 출생
성신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현재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7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2007 세계의문학 제1회 신인상 / 김지녀
 
큰파란바람의 저녁

 
바람은 쉽게 땅에 발을 내려놓지 못하고 달아난다
강을 지나 일년 내내 눈 쌓인 계곡을 지나
그러나 간단하게 뭉쳐지는 구름들 사이로
무섭게 직진하고 있는 태양의 기둥을 지나
벽을 뚫고
천 년 전에 만났다 헤어진 사람의 눈동자를 핥으며
지구를 만 년쯤 돌고 있는 바람이 이마에 와 닿을 때
국경을 넘어온 얼굴처럼 얼어 있는 저녁을 바라볼 때
나는 기둥, 이라는 제목의 나무
활엽에서 침엽으로 옮아가는 숲의 그늘
절벽 위에 서 있으면 어느 고원을 떠돌다 사라진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맴돈다
입술 튼 바람은 서로를 끌어당기며 전진하거나 융기하는
대륙의 저 끝에서 잠시 날개를 접고
녹아내리는 얼음을 밟으며 며칠 밤낮을 걸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함께 울었을 것이다
몇 달이 지나도 눈이나 비가 오는 숲에서
알을 품은 적 있는 둥지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나무 잎사귀가 다 떨어진 저녁
바닥에 누워 영원히 눈 감는 자의 호흡은
처음 비행에 나서는 새의 눈빛처럼 새까만 것이어서
수없이 흔들리며 가라앉아 간다
입 벌린 채 마른 강을 건너가듯이
나는 갈증을 느끼며 파랗게 변해가는 피부 속에
활공하는 바람의 말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 바람이 데리고 온 먼 곳의 먼지들은 낮게 휘돌다 단단해진다

 

밤과 나의 리토르넬로

 
   어젯밤은 8월이었어요 날마다 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 사람들의

등 뒤로 여름이 가고 있지만 가을은 오고 있지만
  나는 아직 한 장의 얼굴을 갖지 못한 흉상
  여름과 가을 사이에 놓인 의자랍니다

 

  나는 체스의 규칙을 모르지만
  우리를 움직이는
  밤과 낮의 형식을 좋아해요

 

  눈을 감았다 뜨면
  감쪽같이 비가 오거나 목소리가 변하거나
  나무들이 푸르러졌어요

 

  누군가 피를 토하면서도 다리를 꼬고 있다면
  그건 죽음에 대한 예의일 것이고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면
  그건 나에 대한 의심일 테지만
  나는 너무 조금 밖에 죽지 못했다*고 말할 거예요

 

  사소한 바람에도 땅을 움켜잡는 나무가  
  의자에 붉은 잎사귀 몇, 뱉어놓는 밤에

 

  나의 입안에선 썩은 모과향이 꽃처럼 확, 피었다 지고 있어요


  * 바예호의 시에서
              

칙칙과 폭폭 그리고 망상

 
  나를 위해 노래해줘 뱃속에서 잠자는 망상을 깨워줘 기차는 또 달리지 같은 레일 위에서 칙칙, 사람들은 시끄럽게 떠들고 있지 칸과 칸 사이를 폭폭 질주하지 몽유병을 앓는 것처럼 

 

  달려야해 용기가 필요해 칙칙한 노래는 듣기 싫어 나를 폭폭, 갉아먹는 망상은 희망이야 터널을 뚫는 힘이야 역마다 잘 가꿔진 꽃나무가 꽃을 버리기 위해 흔들려

 

  한 병의 소주와 갈기갈기 찢어진 오징어 다리 사이에서, 내 이름은 너무 고유해서 고유할 뿐 그렇지만 칙칙,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네 내 노래는 오래 전부터 무감각해 여긴 어디야? 이곳은. 폭폭,

 

  누구나 가슴속에 새장은 있다네 밤마다 새장을 칙칙, 쪼아대는 새를 키우고 있다네 등에는 화살에 찔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지 살짝만 건드려도 비명이 폭폭, 나올지 모르지

 

  아까부터 머리가 아파 나를 위해 노래해줘 흘러 다니는 의자를 위해 소주를 따라줘 난 오징어의 눈을 찾을게 사람들의 수다를 치료해줘 그리고 달려줘,

 

쓰다듬는 손

 
  그의 손은 검은 강을 지나 푸른 나뭇가지를 지나 내 얼굴을 지나 잔디를 쓸어본다, 보이지 않는 손에 묻은 얼굴이 푸른 나뭇가지를 지나 검은 강으로 그를 따라 간다 나를 보며 웃는

 

  거대한 먹구름, 나의 비명이 오래될수록 울음이 작아질수록 먹구름은 커진다 모든 것은 흡수된다 소용돌이치는 얼굴, 그의 등에 업힌 나는 울고 있다

 

  몇 개의 이력이 검은 강을 건넜다 잔디 위에 남은 자리는 이미 식어 있다 그곳에 앉아 나는 잔디를 쓸어본다, 손에 묻어나는 이력들 뭉그러지는 검은 잉크 자국들

 

  먹구름은 모양을 바꾸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나의 손을 잡고 있다 조여지는 내 손목이 잘려나가기를 그의 손에서 푸른 가지가 돋아나기를 나의 비명이 먹구름을 통과해주기를

 

  그는 등 뒤에서 언제나 나를 훔쳐본다 어디선가 먹구름을 이끌고 잔디를 쓸어가며 보이지 않는 손이 나의 얼굴을 지나가고 있다

                        

A 그리고, a

 
에이, 라는 점에서 그들은 동일하다
낮에도 밤 같은 방에서
작은 여자 A는
밥 먹고 잠잔다 그리고 가끔, 웃는다   
아직 오지 않은 애인을 위해
문을 걸어 잠그고
요리를 한다 매일
작은 여자 A와 무관하게
큰 여자 a는 계란을 삶는다
아직 떠나지 않은 애인을 위해
고개를 숙이고
흰자에서 노른자를 골라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러나 웃는다 가끔,
초인종이 울리기도 한다
작은 여자 A와 큰 여자 a는
말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문을 열거나 열지 않는다
그들은 에이, 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작은 여자 A와 큰 여자 a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덜컹거린다
서로를 알아채지 못한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