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우물'에 관한 시모음 본문
오래 된 우물 / 안도현
뒤안에 우물이 딸린 빈집을 하나 얻었다
아, 하고 소리치면
아, 하고 소리를 받아 주는
우물 바닥까지 언젠가 한 번은 내려가 보리라고
혼자서 상상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물의 깊이를 알 수 없었기에 나는 행복하였다
빈집을 수리하는데
어린것들이 빗방울처럼 통통거리며 뛰어다닌다
우물의 깊이를 알고 있기에
나는 슬그머니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오래 된 우물은
땅 속의 쓸모 없는 허공인 것
나는 그 입구를 아예 막아 버리기로 작정하였다
우물을 막고 나서는
나, 방안에서 안심하고 시를 읽으리라
인부를 불러 메우지 않을 바에야 미룰 것도 없었다
눈꺼풀을 쓸어 내리듯 함석으로 덮고
쓰다 만 베니어 합판을 덧씌우고
그 위에다 끙끙대며 돌덩이를 몇 개 얹어 눌렀다
그리하여
우물은 죽었다
우물이 죽었다고 생각하자
나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때 찰박찰박 두레박이 내려올 때마다
넘치도록 젖을 짜 주던 저 우물은
이 집의 어머니,
별똥별이 지는 밤하늘을 밤새도록 올려다보다가
더러는 눈물 글썽이기도 하였을
저 우물은
이 집의 눈동자였는지 모른다
나는 우물의 눈알을 파먹은 몹쓸 인간이 되어
소리친다
아, 하고 소리쳐도
아, 하고 소리를 받아 주지 않는
우물에다 대고
간통사건과 우물 / 서정주
간통사건이 질마재 마을에 생기는 일은 물론
꿈에 떡 얻어먹기같이 드물었지만
이것이 어쩌다가 주마염 터지듯이 터지는 날은
먼저 하늘은 아파야만 하였습니다
한정없는 땡삐 떼에 쏘이는 것처럼 하늘은
웨-하니 쏘여 몸서리가 나야만 했던 건 사실입니다
"누구네 마누라하고 누구네 남정네 하고 붙었다네"
소문만 나는 날은 맨 먼저 동네 나팔이란 나팔은 있는 대로 나와서
'뚜왈랄랄, 뚜왈랄랄' 막 불어자치고, 꽹가리도, 징도, 小鼓도, 북도,
모조리 그대로 가만있진 못하고 퉁기쳐 나와 법썩을 떨고,
남녀노소, 심지어는 강아지 닭들까지 풍겨져 나와
외치고 달리고, 하늘도 아플 밖에는 별 수가 없었습 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픈 하늘을 데불고 가축 오양간으로 가서
가축용의 여물을 날라 마을의 우물들에 모조리 뿌려 메꾸었습니다
그러고는 이 한 해 동안 우물물을 어느 것도 길어 마시지 못하고,
산골에 들판에 따로따로 생수 구멍을 찾아서 갈증을 달래어
마실물을 대어갔습니다.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 길상호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으면
낮 동안 바람에 흔들리던 오동나무
잎들이 하나씩 지붕 덮는 소리,
그 소리의 파장에 밀려
나는 서서히 오동나무 안으로 들어선다
평생 깊은 우물을 끌어다
제 속에 허공을 넓히던 나무
스스로 우물이 되어버린 나무,
이 늦은 가을 새벽에 나는
그 젖은 꿈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때부터 잎들은 제 속으로 지며
물결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너도 이제 허공을 준비해야지
굳어 버린 네 마음의 심장부
파낼 수 있을 만큼 나이테를 그려 봐
삶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질 때
잔잔한 파장으로 살아나는 우물,
너를 살게 하는 우물을 파는 거야
꿈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면
몇 개의 잎을 발자국으로 남기고
오동나무 저기 멀리 서 있는 것이다
두레박 / 윤강로
어릴 적 서울 통의동에 있는
우물은 깊고
어둠이 가득 고여 있었다
두레박을 던지면
젖은 밧줄은 긴장한
어둠의 무게로 팽팽했다
길어 올린 두레박엔
하늘이 철철 넘쳐서 맑게 부서졌다
두레박에 입을 대고 마시면
시장끼에
말랐던 뱃속에서
하늘이 출렁거렸다
세월 지나 기억의 우물에
두레박을 던진다
두레박이 까마득히 떨어지고
끊어진 밧줄 끝에서
허전한 손아귀가
목마르다
두레박은 이제 올라오지 않는다
허리를 구부리고
사막의 냄새가 캄캄한
우물 속을 헤매듯이 내려다본다
바닥에
물고기 형상의 뼈가 누워있다
시집 <비어 있음의 풍경>에서
전화 / 전순영
시계 바늘이 V자를 긋고 있었다
마른 잎 부서지는 거리에서 나는
동전으로 두레박질을 하고 있다
이 길고 질긴 끈을 우물 속으로 천천히 풀어 넣으면
동전은 그냥 우루루 뛰어나오고 나오고, 다시 넣으면
빨갛게 불이 달아
터널 속에서
어디가 출구인지 의자인지 알 수 없는
안개 자욱한 강이 흐르고
물감처럼 뿌리고 가버린 날들의 이야기가
타인의 주머니 속 지폐인양 더욱 허기져 갔다
창밖에는 땅거미 내리고
늑골 사이엔 노란 등이 가물거리고
흙도 나무도 어둠속에 묻혀버린 지금
빈집 쓸고가는 바람 소리
깨져버린 시간 부스러기 틈새로 여직 걸려있는
마른 두레박
시계바늘이 V자를 긋고 있었다
그 안마 방 / 정병근
지하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둠이 깊은 우물처럼 출렁이고 거기 한 늙은 여자가 앉아 있습니다 그녀는 잽싸게 빨래 집게로 커튼의 멱살을 잡아맵니다 무거운 옷을 벗고 전화기와 지갑과 열쇠꾸러미를 꺼내 머리맡에 두고 누우면 그녀의 일이 시작됩니다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발부터 씻기지요 조물락대는 손길이 그지없이 기분 좋아 일찌감치 잠이옵니다 다리와 팔과 등으로 옮겨 다니며 구김살을 좍좍 펴주는 그 손아귀의 힘은 얼마나 나른하고 아린 슬픔 같은 것인지요 웬 낯선 몸 하나가 내 몸을 주무릅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다가 이 깊은 우물 속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오늘의 만남이 마치 전생의 약속만 같아 자꾸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쳐다봅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이 세상에 살아 죄 많은 한 몸을 주무릅니다 오랜 세월 기다렸던 한 몸이 한 몸을 만난 거지요 어쩌면 나는 오래 전에 그녀를 떠났고 숱한 세월을 돌아 이제야 돌아온 것입니다 때늦은 약속을 지키러 말입니다 천년만의 해후! 아, 이런 걸 사랑이라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녀가 영비천 하나를 따서 쓱 내밉니다 천연두 앓은 곰보처럼 얼굴을 숙입니다 나도 그녀의 얼굴을 외면합니다 종소리 나는 문을 열고 우물 속을 나옵니다 다시 환한 세상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계단 처마 밑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쌩쌩 달리는 차들의 물살 속으로 재빠르게 들어갑니다
<시작> 2003년 여름호
봄날, 火葬을 하다 / 서동인
보신탕 집에서 얻어 온 똥개 뒷다리를
가스렌지에 올려 두고 깜빡 잠이 들었다
어린 날 폐가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검둥이의 비명 소리에 눈을 뜨자
세상에, 방 안 가득 살점 타는 냄새라니,
검게 그을린 냄비 속의 잿더미를 보면서
까맣게 타들어 가는 내 살갗을 꼬집어보았다
장송곡을 빠르게 연주하듯 환풍기를 돌려도
살점 타는 냄새 진동하는 내 방이
화장터라니,
어디서 고기 타는 냄새가 난다고
개가죽 같은 옷을 걸친 다음날 출근길
지하철 승객들이 코를 씰룩거리는
개
같은 내 인생이라니,
저수지에 빠진 후배를 火葬한 그 해 봄날도
내 몸에선 살점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늙은 여자 /
최정례
한때 아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늙었다
한때 종달새였고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가 빠졌다
한때 연애를 하고
배꽃처럼
웃었기 때문에
더듬거리는
늙은 여자가 되었다
무너지는 지팡이가 되어
손을 덜덜 떨기 때문에
그녀는 한때
소녀였다
채송화처럼 종달새처럼
속삭였었다
쭈그렁 바가지
몇가닥 남은 허연 머리카락은
그래서 잊지 못한다
거기 놓였던 빨강 모자를
늑대를
뱃속에 쑤셔 넣은 돌멩이들을
그녀는 지독하게 목이 마르다
우물 바닥에 한없이 가라앉는다
일어설 수가 없다
한때 배꽃이었고 종달새였다가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제 늙은 여자다
징그러운
추악하기에 아름다운
늙은 주머니다
시집 - 붉은 밭 (창작과비평사)
우물 / 마경덕
눈물이 다만, 슬프다는 이유만으로 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마른 몸에서 물이 솟는 건 내 몸 어딘가에 우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 깊은 곳에 영혼이 물처럼 고여 있는 것이다. 흐르는 눈물은 내 영혼의 하얀 이마이거나 지친 발가락이거나 슬픔에 퉁퉁 불은 손가락이다. 영혼은 고드름이나 동굴의 석순처럼 거꾸로 자란다. 이것들은 모두 하향성이다. 근원을 향해 생각이 기울어 있다. 내가 나에게 찔리는 것, 슬픔이 파문처럼 번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석순처럼 자란 영혼을 손수건으로 받으면 발간 핏물이 든다. 나는 피 젖은 손수건 석 장을 가지고 있다. 그 오래된 손수건을 차곡차곡 접어 냉동실에 두었다. 꽁꽁 얼어붙은 냉동고의 영혼들은 더 많은 우물을 만들고 영혼을 생산한다. 고드름처럼 자라 맹물처럼 날아가 버린, 그것들은 대개 일회용이다. 나는 쉰밥처럼 변해버린 가벼운 영혼에 대해 속눈썹이 떨리도록 생각해본 적은 없다.
찌르고 들쑤시고 사막처럼 메마르게 할지라도, 젖은 영혼을 사랑한다. 상처 많은 이 우물에서 詩를 꺼내고 밥을 꺼낸다. 두레박이 첨벙 떨어지는, 서늘히 두렵고 캄캄한 우물. 내 머리칼이 쉬이 자라는 것도 질척한 슬픔에 뿌리가 닿아있기 때문이다. 눈물이 다만 슬픔만으로 오지 않는 걸 이제는 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 권혁웅
그해 여름 정말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멱을 따기 위해 우리에서 끌어낸 중돈이었다 어설프게 쳐낸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돼지는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자진하는 슬픔을 아는 돼지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칼을 든 채 달려들었으나 꼬리가 몸을 들어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일렁이는 물살을 위로하고 돼지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을이 되어도 우물 속에는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그리고 돼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는 슬픈 얼굴로 혀를 찼다 틀렸어. 저 퉁퉁 불은 얼굴 좀 봐 겨울이 가기 전에 사람들은 결국 입구를 돌과 흙으로 덮었다 삼겹살처럼 눈이 내리고 쌓이고 다시 내리면서 우물 있던 자리는 창백한 낯빛을 띠어갔다
칼들은 녹이 슬었고 식욕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디에 우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작고 노란 꽃들이 꿀꿀거리며 지천으로 피어났다 초록의 상(床)위에서, 지전을 먹은 듯 꽃들이 웃었다 숨어있던 우물이 선지 같은 냇물을 흘려보내는, 정말 봄이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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