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구멍'에 관한 시모음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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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에 관한 시모음 2

휘수 Hwisu 2006. 9. 7. 00:17

구멍에 들다 / 길상호

 

아직 몇 개의 나이테밖에 두르지 못한 소나무가 죽었다
허공 기워 가던 바늘잎 겨우 가지 끝에 매단 채 손을 꺾었다
솔방울 몇 개가 눈물처럼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나무가 죽자 껍질은 육체를 떠난 허물이 되어 떨어지고
허연 속살을 살펴보니 벌레들이 파 놓은 구멍이 나무의
심장까지 닿아 있었다 벌레는 저 미로와 같은 길을 내며
결국 우화(羽化)에 이르는 지도를 얻었으리라 그러는 동안
소나무는 구멍 속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 헤매고 있었겠지
나무가 뒤척일 때마다 신음(呻吟)이 바람을 타고 떠돌아
이웃 나무의 귀에 닿았겠지만 누구도 파멸의 열기 때문에
소나무에게 뿌리를 뻗어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벌레가 날개를 달고 구멍을 빠져나가면서
나무는 모든 삶의 통로를 혼자 막아야 했으리라
고목들이 스스로 준비한 몸 속 허공에 자신을 묻듯
어린 소나무는 벌레의 구멍에 자신을 구겨 넣고 있었다
어쩌면 날개를 달고 나방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벌레도 알았으리라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죄과(罪過)는
어떤 불로도 태워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평생을 빌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죽은 소나무 앞에서
나는 한 마리 작은 솔잎혹파리가 되어 울고 있었다

 

죽뻘 / 최승호

 

1

 

죽뻘에서 죽는다는 것은
배설물처럼 죽뻘에 반죽이 되는 것이다
죽뻘에는 무덤이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무덤들은 죽뻘에서 뭉개져 죽뻘이 되었을 것이다

죽뻘에서 죽는다는 것은
썰물과 밀물, 그 반복되는 바다의 애무 밑에서
침대 없이 잠자는 것이다
죽뻘에는 비석이 없다 그러나 나는 게를 위해 묘비명을 쓴다;
- 한 평생 옆으로 걸었노라!

구멍에서 나왔다가 구멍으로 들어가는
얇은 흔적들은 뭉개지고 지워진다
죽뻘에서 죽는다는 것은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혼돈의 반죽 같은 상태로
바다의 부드러운 애무를 받는 것이다 베개도 없이

 

2

 

젖무덤들의 만다라처럼
끈적끈적한 죽뻘에서
배를 밀며 기어다니고 꿈틀거리는 것들,
어디가 입구멍이고 어디가 똥구멍인지
그 구멍이 그 구멍 같을 때
앞장서는 구멍에 끌려가는 구멍이 항문 아닐까

광활한 갯지린내 속의 갯가재, 아무르불가사리,
가시닻해삼, 큰구슬우렁이, 서해비단고둥,
만약 뻘이 만물의 어머니라면
우리는 족보 어지러운 뻘家의 자식들인가?

 

    블랙홀 / 박남희

 

        나는 어린 시절
        목수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목공 일을 도와드렸다
        그 때 아버지는 넓적한 송판을 대패로 밀어
        문짝이나 마루를 만들고 집을 만들었다
        그 때 송판은 솔향기 짙게 풍기며
        간혹 가다 여기 저기
        알 수 없는 구멍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나는 내 유년을 데리고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가
        세상 밖 풍경을 구경시키다가 흘끗
        마당 앞 세발자전거나 냉이꽃 옆에 세워두곤 하였다
        나는 그 때 그 구멍이 단지
        다람쥐 구멍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 그 구멍은 차츰 내 안으로 들어와
        블랙홀이 되었다
        나는 그 때 너무 단단한 것은 저렇게
        구멍을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어디론가 빠져나간 옹이는
        내 생애가 수 없이 만들어 놓곤 했던
        고집같이 단단한 것들이라는 것도 알았다
        내 안의 블랙홀은 때때로
        제 멋대로 어둠을 잡아당겨 여기저기
        수많은 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그 때마다 나는 허기져서
        빈 웅덩이를 채우러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별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 늦게
        지쳐 돌아와 잠자리에 누우면
        내 안의 블랙홀이 욱신욱신 쑤셔왔다
        그 안에 갇혀있던 내 젊은 별이 아팠다
 
          현대시 (2005년 4월호)

 

파란 대문 / 신지혜

 

그때, 철판같이 견고한 어둠 한 장이 내렸다
엄마가 내게 나직이 말했다 얘야
누구든지 자기 안에 파란 대문이 있단다 네 안을 들여다보렴.
나는 내 안에 얼굴을 파묻고 날 들여다본다
가만히 바라보니, 파란 대문 하나가 떡 버티고 있었다
흔들어보아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 문이 잠겨있어요 열쇠가 없어요
걱정말아라 네 마음을 그 열쇠구멍에 꽂고 힘껏 비틀어보렴.

그러나 나는 너무 녹슬었어요 엄마, 온통 붉은 꽃 투성인걸요
아니란다 이 세상에 꽃을 피우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는 거란다
보거라 저 공중에 네 숨결마저도 아름다운 무늬꽃을 피우고 있지
과연 바라보니, 내 숨결의 물빛 붓꽃이 투명한 공기알을 잔잔히 흔들고 있었다

나는 굳게 닫힌 파란 대문의 열쇠구멍에 나의
마음을 꽂고는 힘껏 비틀었다 그러자 저편
시간의 태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내 마음의
경계선이 모두 지워져버렸고 내 생각의 안팎이 무너져버렸다
촘촘한 두려움의 경계가 훨훨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파란 대문은 내 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낭비 / 조말선

 

쟈스민이 향기를 낭비하고 있었다
구멍은 낭비벽이 심했다
쟈스민은 나날이 새 구멍이 생겼다
쟈스민은 나날이 향기를 낭비하고 있었다
<쟈스민>에서 향기가 피어올랐다
향기가 나를 친친 감아 올랐다
구멍의 낭비벽은 너무 먹어치운다거나
너무 뱉어낸다는 것이다
모종컵이 낭비하는 모종들
음부들이 낭비하는 통정
구멍을 막으면 낭비벽이 사라진다!
지갑을 닫는 데는 딱 일초가 걸리고
음부를 닫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
<쟈스민>이 계속 향기를 낭비하고 있었다

 

 현대시학 [2003년 6월호]

 

어처구니 빠진/ 김원자

 

허물어진 집터에
버려진 맷돌 한 짝
어처구니* 빠진 구멍에
철없이 꽂혀 있는 노란 민들레

수쇠 위의 암쇠
중심에 중쇠을 박아
그 생을 돌리는 어처구니
욕망의 덩어리를 갈면서
순리의 시간을 돌리면서
한 상에서 콩국수 말아먹던
살아 있는 자들
다 데불고 어디로 갔나

어처구니 없는 세상에서
지은 죄 하도 많아
어처구니 빠진 구멍에
고해성사를 한다.

 

* 어처구니 - 맷돌을 돌리는 손잡이

 

팔월 연못에서 / 주용일

 

시절 만난 연꽃 피었다
그 연꽃 아름답다 하지 마라
더러움 딛지 않고 피는 꽃 어디 있으랴
오욕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삶 어디 있으랴
생각해 보면 우리도 음부에서 피어난 꽃송이다

애초 생명의 자리는
늪이거나 뻘이거나 자궁이거나
얼마큼 질척이고 얼마쯤 더럽고
얼마쯤 냄새나고 얼마쯤 성스러운 곳이다

진흙 속의 연꽃 성스럽다 하지 마라
진흙 구멍에 처박히지 않고
진흙 구멍에 뿌리박지 않은 생 어디 있으랴

 

시집 - 문자들의 다비식은 따듯하다 (2003년 문학과 경계사)

 

얼음 호수 /  손세실리아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도 없다 요지부동이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
중간중간 위태롭기도 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封해 본 적 있던가
한 사나흘 죽어본 적 있던가
없다,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

 

현대시학 2005년 6월호 신작소시집

 

오늘 밤에는 진통제가 필요하다 / 주경림

 

차도를 넓힌다고 전봇대를 뽑는다
먼저 변압기 달린 가지를 쳤다
전깃줄도 다 거두었다
몸통만 남은 전봇대를 지게차에 묶고
엔진의 힘으로 땅 속에서 뽑아올렸다
우지끈, 사랑니 뽑던 아픔이
입 안 가득 핏물로 고였다
잇몸에 마취 주사를 놓을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쑤욱 뽑아냈다
흙 속에 담겨있던 밑둥이 젖어있다
그 구멍에 미처 햇살 한 가닥 꽂히기도 전에
콘크리트 반죽이 쏟아 부어졌다
구멍은 꼭꼭 다져지고 판판해졌다
들쑤셔 놓았다가 감쪽같이 메꾸어놓은
그 자리가 오늘 밤 편히 잠들 수 있을는지
달빛에 타이레놀 두 알을 묻어주었다

 

시집 - 눈잣나무(문학아카데미)

 

정로환 / 윤성학

 

가실 때, 정로환 한 병을 가방에 넣어드렸다


멀리서 손주딸 살림을 들여다보러 온 처할머니가
선 채로 똥을 지렸다
다리를 타고 내린 덩어리 하나가
바닥에 멈추어섰다
아내는 얼른 달려가 휴지로 그걸 훔쳐내었다
바지를 벗기고 노구를 씻겼다
딸아야,
아래를 잘 조이고 살아야 여자다
고개 돌려 모른 척하던 손주사위가
고개를 끄덕인다
끄덕인다
구멍이 헐거워
밑살이 아물지 않아
내 속이 늘 가지런하지 못했다
때론 분노를 때론 눈물을
몸에서 놓치곤 했다
늙는다는 건
구멍이 느슨해진다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더 늙어야
나의 구멍들을 다스릴 수 있을 건가

 

가실 때,
정로환 다섯 알을 내가 먼저 꺼내 먹고
가방에 넣어드렸다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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