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구멍'에 관한 시모음 1 본문
구멍 / 최서림
나는 원래 구멍 안에서 만들어졌다
껌껌하고 긴 구멍 안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불씨를 이어 받았다
聖火 봉송하는 릴레이 선수처럼,
아늑하게 조여주는 긴 터널을 뚫고 나와 드디어
거친 빛의 세계로 나왔다. 태초의 명령을 따라
빛을 받아먹고 내 안의 불씨는
바람 센 땅의 삼나무 모냥 자라 올랐다. 이글이글.
언젠가 나는 또 하나의 구멍으로 돌아가리라
나의 불은 그 안에서 소멸되리라. 충직하게
신화와 소문의 산실. 그 비밀스런 구멍은
내 몸이 드나드는 집이고
불이 제 길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나는 구멍으로 너를 사랑해 왔다. 정직하게
사랑은 불이다. 참말로
나의 불은 눈구멍, 귓구멍, 콧구멍, 입 구멍, 땀구멍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빚어진 구멍을 통해
내 안의 핵발전소로 흘러들어간다. 법칙보다 더 고집스럽게
불과 불이 얽혀서 핵처럼 터지는 사랑
구멍안에서 탄생하는 불씨 알
또 하나의 눈물 방울
시집 <구멍> 2006년 세계사
바늘구멍 속의 폭풍 / 김기택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그의 육체는 낡고 닳아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과 폐에서 가르랑가르랑 소리가 난다. 찰진 분비물과 오물이 통로를 막아 바늘구멍처럼 좁아진 숨구멍으로 그는 결사적으로 숨을 쉰다. 너무 열심히 숨을 쉬느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숨이 차면 자주 입이 벌어진다. 벌어진 입으로 침이 질질 흘러 나오지만 너무 심각하게 숨을 쉬느라 그것을 닦을 겨를이 없다.
밤이 되면 숨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낮은 소리는 때로 갑자기 강해져서 거목을 뽑고 지붕을 날려버릴 것처럼 용틀임을 한다. 휘몰아치는 바람의 힘에 흔들려 그의 몸이 세차게 흔들리다가 이윽고 가래와 침을 뚫고 기침이 뿜어져 나온다. 기침이 나올 때마다 그는 목을 붙잡고 컹컹 짖으며 방바닥에서 뒹군다. 몸 속에서 한바탕 기운을 쓴 바람은 차츰 조용해져서 다시 허파에 얌전히 들어앉아 가르릉거린다.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술해진, 바람을 더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 속에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사하게 통과하게 하느라 그는 아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과 뜨겁고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 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다. 고요한 마음, 꿈 없고 생각 없는 잠이 되려고 그는 더 웅크린다
시집 <바늘구멍 속의 폭풍>
구멍 1 / 유용주
얼마나 많은
손들이 들락거렸던가
(결국 늙은 염쟁이까지 끌어 들이는 군)
생선 썪는 냄새도 피고름도
말라버린 정액도
그 언덕에선 이제 고즈넉하고
억새인가
갈대겠지
대여섯 올 성긴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적막만이
폐허가 그 주인인
어머니,
제가 정말 그 구멍에서 나오긴 나왔나요
구멍에 관하여 / 이진영
세상의 모든 구멍은
어둠을 먹고 산다
낡고 오래된 구멍일수록
더 짙은 어둠을 먹고 산다
폐광이 그렇고
폐우물이 그렇고
폐움막이 그렇고
폐가가 그렇고
어머니들의 모든
폐경의 구멍이 그렇다
한때는 가장 큰 희망과 산란과
잉태와
모든 생명의 상징이었을 구멍,
그 구멍들
그 구멍의 따스함을 받아먹고 자란
우리 아버지들의 흰 입김과 오랜
발자국은 다 어디로 가고
폐경과 폐광의 구멍엔 이젠
어둠만 꽉 들어앉아 있는가
시집 [퍽 환한 하늘]중에서
둥글고 환한 구멍 / 이향지
달빛이 부서진다
달빛이 부서진다
삼복 날 부채 같이 훌렁거리는 개꼬리에 감겨
섣달 보름 둥근 달빛이 부서져
내린다
물 묻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니 얼음이 쩍쩍 붙는 밤
子正에 개밥 주러 나온 게으른 여자가
냄비바닥에 들러붙은 젖은 밥알을 긁을 때
스테인레스 숟가락 등에 부딪쳐 부서져 내린다
숟가락 목으로 탁탁 쳐서 끈끈한 밥알을 떨굴 때
숟가락 자루 쥔 손등에 걸려 부서져 내린다
일어서서 실눈을 뜨고 달을 쳐다본다
영하 58℃의 寒風에, 달은
멀고 아득한 하늘 속까지 떠밀려 갔다
달이 빠져나간 구멍은 둥글고 긴 홈통 속이다
홈통
끝은 낮인가, 홈통 저쪽만 텅 비어 환하다
잘 얼린 얼음같이 푸르스름하고 판판하고
환한 구멍, 저 둥근 구멍 밖에 달이 있는가
홈통 밖은 부서진 달빛만 자자하다
다복솔이 어깨와 머리에 앉은 눈가루를 터는 밤
한 번 더 실눈을 뜨고 홈통 속 들여다본다
달은 없다, 구멍뿐이다
주먹을 이어 붙여 주먹 망원경을 만들어 본다
조리개를 좁히고 망원경으로 당겨볼수록 달은 더 없다
섣달 보름 둥근 달이 雪寒風에 떠밀려 먼 우주로
빠져나간 구멍뿐이다,
둥글고 환한 구멍 바닥에
낯익은 나무 그림자 하나 흐리게 누워 있다
그래도 달은 둥글고 환한 구멍 하나는 남기고 간다
<문학사상> 2000년 6월호
담에 뚫린 구멍을 보면 / 정현종
담에 뚫린 구멍을 보면 內心
여간 신나는 게 아니다
다람쥐나 대개 아이들 짓인
그리로 나는 아주 에로틱한
눈길을 보내며 혼자
웃는다 득의양양
담이나 철책 같은 데 뚫린
구멍은 참 別味가 아닐 수 없다
다람쥐가 뚫은
구멍이든
아이들이 뚫은 구멍이든
그 구멍으로는 참으로 구원과도 같은
法悅이 드나들고 神法조차도 도무지
마땅찮은
공기가 드나든다!
오호라
나는 모든 담에 구멍을 뚫으리라
다람쥐와 더불어
아이들과 더불어
자벌레구멍 / 위선환
쳐다보니
떡갈나무 잎사귀에
자벌레가 붙어 있습니다
그저 그러는구나 했다가 한참 뒤에 다시 보니
자벌레는 없고
가늘게, 길다랗게, 그리고 파랗게,
딱 자벌레만한 구멍이
떡갈나무 잎사귀에 뚫려 있습니다
자벌레가 하늘 되는 방법이
그랬습니다
이번에는
내 차례라면서
자벌레가 뚫어놓은 구멍을
찬찬히 봐두라고,
비좁지만 이미 자벌레가
그랬듯이
조심해서 몸을 끼워 넣고는 재빠르게
뒤로 빠져 나가버리라고, 그것이
방법이라고
시집 <눈 덮인 하늘에서 넘어지다>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구멍 / 최영애
입속의 별 하나 빠졌다
아이의 몸에 구멍이 파였다
네 몸엔 별의 뿌리가 있어
그 자리는 곧 메워질 거야
몇 번의 구멍이 생긴 뒤에
비로소 어른이 되는거야
어머니는 명주실로 흔들리는 이를 뽑아
지붕 저쪽으로 던지셨다
'까치야 까치야 헌 집 줄께 새 집 다오'
새로운 별이 구멍에 박힐 거라고
우는 나를 달래셨다
입 속에 생긴 허공으로 하늘이 아득했다
아이 이 하나 손에 쥐고 아파트 꼭대기를 쳐다본다
하늘이 정수리에 닿을 듯 가깝다
어머니, 지우신다 / 이경림
휑한 방에 누워 자꾸 지우신다 장롱만한
지우개로 삯뜨개질의 날들을 지우신다
지워도 자꾸 풀려나오는 실꾸리, 실같이 가는
기억의 구멍이 점점 커진다 실꾸리가
구멍 저편으로 떨어진다,
그 속에 팔을 넣고 휘젓는 어머니, 한 실마리가
잡. 혔. 다. 친친 감긴 한시절이 끌려나온다
치마꼬리에 매달린 죽은 아들, 찐 고구마,
없는 치료비......, 욕설의 날들이,
찬 고구마가 담긴 소쿠리 위로
오색 날개의 퉁퉁한 치욕들이 윙윙 난다
저리 가!
쫓아도 자꾸 붙는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