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그 집 / 박경리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현대문학 2008년 4월호

      

박경리(朴景利, 1927-2008.5) 소설가

1926년=10월 28일 경남 통영시 명정리서 박수영(朴壽永)씨의 장녀로 출생. 본명 박금이(朴今伊).
1945년=진주고등여학교 졸업.
1946년=1월 30일 김행도씨와 결혼. 딸 김영주씨 출생.
1955년='현대문학'에 김동리에 의해 단편 '계산' 추천.
1957년=단편 '불신시대'로 제3회 '현대문학' 신인문학상 수상.
1958년=첫 장편 '연가'를 '민주신보'에 연재, 단편 '벽지', '암흑시대' 등 발표.
1959년=장편 '표류도'로 제3회 내성문학상 수상.
1962년=전작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 발표.
1963년=장편 '파시' 연재.
1965년=장편 '시장과 전장'으로 제2회 한국여류문학상 수상, 장편 '녹지대' 연재.
1969년='토지' 1부 '현대문학'에 연재.
1972년='토지' 1부로 제7회 월탄문학상 수상. '토지' 2부 '문학사상'에 연재.
1977년='토지' 3부 '독서생활', '한국문학'에 연재. 수필집 '호수', '거리의 악사'(민음사) 간행.
1979년=박경리 문학전집 전 16권(지식산업사) 간행.
1980년=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742번지, 지금의 토지문학공원에 정착.
1983년='토지' 4부 '정경문화'에 연재.
1985년=수필집 '원주통신'(지식산업사) 간행.
1987년='토지' 4부 '월간 경향'에 연재.
1988년=시집 '못 떠나는 배'(지식산업사) 간행.
1990년=제4회 인촌상 수상 중국기행문 '만리장성의 나라', 시집 '도시의 고양이들'(동광출판사) 간행.
1992년='토지' 5부 '문화일보'에 연재 시작.
1994년='박경리의 원주통신-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문학선 '환상의 시기', '가을에 온 여인'(나남출판) 간행. 8월 15일 집필 26년 만에 '토지' 탈고. 유네스코 서울위원회 '올해의 인물' 선정.
1996년=제6회 '호암상 예술상' 수상. 칠레 정부로부터 '가브리엘라미스트랄 문학기념 메달' 받음.
1998년=토지문화관 착공, 1999년 6월 9일 개관.
1999년=장편 '표류도'(나남출판) 간행.
2000년=시집 '우리들의 시간'(나남출판) 간행.
2002년='토지' 재발간(전 21권·나남출판).
2003년=9년 만의 신작소설 '나비야 청산가자' 현대문학 4월호에 연재 시작. 문화와 환경전문 계간지 '숨소리' 창간. 청소년용 '토지' 12권 완간(이룸). 첫 장편동화 '은하수' 출간(이룸).
2007년=13년 만의 신작 산문·소설집 '가설을 위한 망상' 출간.
2008년='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설' 등 신작시 3편 발표. 5월 5일 타계.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