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교묘한 따르릉 / 최금진 본문
1970년 충북 제천 출생
1994년 춘천교육대학교 졸업
199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8년 제4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상
2001년 <창작과비평> 신인상
2007년 시집 <새들의 역사> 창비
교묘한 따르릉 / 최금진
점점 힘이 세어지는 전화에게 낮잠까지 내어준다
외출을 안 해도 전화줄이 척척 몸에 감긴다
시커멓게 파마 머리를 한 여자들이
119 구급대원처럼
카드빚에서 날 구원해 줄 것마냥 출동해선
따르릉,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묻는다
소득이 얼마냐, 전세냐 월세냐,
하늘을 가르며 검은 전화선들이 떼로 몰려다니고
그 줄을 따라 여자들이 낙하산처럼 뿌려진다
내 주민번호, 내 연체날짜, 내 지로번호와 엉킨다
시커멓게 음모가 덥수룩하게 자라난 여자들이
수화기를 헤집고 기어나와
나에게 열심히 설교하고, 마음껏 친절한 척하다가
싹둑, 나를 자르고 다시 빈 방에 앉혀놓는다
필요할 때마다 나를 꺼내려고 어딘가에 밀봉한다
다음에 또 전화할게요, 내 귀를 꺼놓으려 해도
아침이면 새로운 전화가 다녀가고
어떻게 알아냈는지 가족사까지 들먹이며 실컷 따르릉거리고
정체도 모르는 따르릉을
내 시계에 심어놓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게 하고
무성하게 가지를 뻗어
내 귀를 덮고, 나를 꼬시고, 생계를 걱정하고, 타협하고
검은 음모를 너풀거리며
따르릉이 수시로 나를 건너다닌다
안녕하세요, 건강하세요, 좋은 말을 먼저 선점한
예쁘고 사나운 여자들, 전신주마다 넝쿨을 뻗어간다
우리 동네 모든 전화기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사방에서 따르릉거린다
그렇다, 나는 백수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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