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안성호 시모음 본문
가스통이 사는 동네
빈집의 풍경을 텔레비전이 우주로 송출한다. 텔레비전 위로 유리컵이 있고
그 속에서 감자가 싹이 나고 잎이 나서 나무가 되었다. 유리컵 속에서 감자
는 죽고 감자만한 유리컵이 나무에 열렸다. 그 유리컵마다 바다가 출렁인다.
푸른 바다를 가르며 달력 속으로 노란 수상스키 한 대가 사라진다. 손을 흔
들어대는 벌거벗은 남녀의 벗어 놓은 옷이 달력 곁, 행거에 걸려 있다. 여자
의 빨간 치마를 남자의 양복 上衣가 껴안고 있다. 벗어 놓은 양말이 화장실
로 걸어가고 화장실에 놓인 세탁기에선 양복 下衣가 길거리에서 묻혀온 노
래를 쿨렁거린다 똑똑, 세일즈맨이 빈집에 노크를 하고 돌아선다. 똑똑, 물
탱크에 물소리가 들린다. 수압은 낮고 지붕은 점점 무거워진다.
노란 물탱크와 가스통이
퇴락한 집 모퉁이를 돌아오는 빛을 베고 지붕에 누워 하늘을 본다.
오백 마리의 양
구백 마리의 흰 오리가
줄을 지어
하늘을 걸어간다
200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별
가로등 밑,
옷걸이에 걸린 노란 우의처럼 고개 숙인 그녀
벤치를 지나는 누군가
그녀의 뒷덜미를 낚아채서
몸에 딱 맞게 단추를 채우고 가버렸다
흩어지는 발자국마다
이내 비가 몰려든다
하굣길 여중생들이 주전부리하듯 빗물이 길 위로 몰려다니고
고인 빗물 속에 가로등 불빛은
파문을 일으키며 구겨졌다
펴졌다
나는 오랫동안
먹다 남은 두부처럼 천천히 상해 갔다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그 사이로 구불구불 비가 흘렀다
옥상이 궁금하다
옥상으로 가는 문은 잠겨 있다
엘리베이터도 옥상까지는 가지 못한다
옥상으로 향한 계단에는
의자만 내놓았다
내 머리에도 건물의 옥상만한 옥상이 하나 있다
새들이 길 위로 날고
낙엽을 내려놓고 길을 떠나는 나무
나무들의 장례행렬은 끝이 있고
전설에 나오는 코끼리의 무덤처럼
나무의 무덤이 길끝 어딘가에 활활 불타면서
날아온 거뭇거뭇한 불티들이
내 머리를 무겁게 한다
옥상에 거주하는 바람과 옥상만한 하늘과
옥상만한 무게에 실려 떨어지는 물은 알 것이다
수천 개의 배관과 전선들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와 산다는 것을
감자 / 안성호
텔레비젼 위에 놓인
컵 속에 감자가 죽었다
컵 속으로
부단히
컵만한 삶을 가꾸던 감자가
컵만한 죽음을 하얀 뿌리로 감싼 채
쪼그라든 것이다
언젠가 컵 밖으로 분수처럼 하얀 맨발로 걸어나와
방을 서성거릴 것만 같았던,
내 발을 걸어 쓰러뜨릴지도 모를 감자였다
방구석에 집을 짓던
거미의 생계(生界)를 훔쳐본 감자가
죽음을 먹고 죽어 가는 방법을 택했는지도
방 한 귀통이 거미줄 위로
둥둥 떠다니던 검은 내 얼굴을 보고
컵만한 저항을 더는 접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이 방에 하얀 촉수를 내려
내 항문에 뿌리를 집어넣어 온전한 감자의 생계(生界)를
나에게 부탁한지도 모를 감자가
지금 컵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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