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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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구 시모음

휘수 Hwisu 2010. 12. 17. 15:59

 

오늘은 달이 다 닳고

 

 

나무 그늘에도 뼈가 있다

그늘에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이 나있다 바람만 불어도

쉽게 벌어지는 구멍을 피해 앉아본다

수족이 시린 저 앞산 느티나무의 머리를 감기는 건 오랫동안 곤줄박이의 몫이었다

곤줄박이는 나무의 가는 모근을 모아서 집을 짓는다

눈이 선한 저 새들에게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연장이 있다 얼마 전 죽은 곤줄박이

떼 지어 모인 개미들이 그것을 수거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일과를 마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와서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

뿌리가 단단히 박혀서 번뇌만으로 달에 못 미치는 나무의 머리통을 곤줄박이가 대신,

벅벅 긁어주는지, 나무 아래 하얀 달 거품이 흥건하다

오늘은 달이 다 닳고 잡히는 족족 손에서 빠져나가 저만치 걸렸나

우물에 가서 밤새 몸을 불리는 달을 봐라

여간 해서 불어나지 않는 욕망의 칼,

부릅뜨고 나를 노린다

 

2009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동백

 

나는 항상 그를 본다 유년의 어느날

따귀 맞은 채 올려다본 교정 한가운데서

유유히 담을 넘던 사내의

멋진 신발을 기억한다

 

그는 내가 태어난 항구도시 벽면을

천문학적인 액수의 현상금이 적힌

수배전단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그는 소문대로 민첩했다

제보를 받고 달려가면

무지개 연막을 치고 자갈이 무성한 강을

단숨에 건너 산 너머로 달아났다

 

증거랍시고

수면에 번진 발자국을 떠내거나

기절한 물방개를 흔들어 깨울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번번이 그를 놓치는 대신

작은 여인의 손에 수갑을 채웠고

밤마다 송진이 흘러내리는

구릿비차 책상도 하나 가졌다

나는 서랍 속 수사일지에

그녀의 사진을 끼워둔다

 

그녀가 산중턱 어느 절간에서

발아래 펼쳐둔 장신구들을

하나하나 세던 사내와 잠시

놀아났다는 사실도 잊은 채

 

 

 

지붕 위에서

 

  모함을 받은 뱀은 거처로 돌아가서 혀를 깨물었다. 해전에서 패한

가오리와 악어는 후궁의 지갑과 가방으로 가공됐다 멀쩡한 이슬을 내

온 풍뎅이는 기름 발라 태양국으로 유배됐고 새로운 화포를 고안해내

지 못한 죄로 무당벌레는 여러 군데 낙인이 찍혔다 노역에 지친 달팽

이는 바위를 지고 이를 눈감아준 여치는 두 다리가 꺾이었다 주머니

고양이는 등에 업은 세자가 울어 정원의 개미를 핥았고 아미산 굴뚝

의 잡초를 베던 사마귀는 간통으로 몰려 백일을 굶긴 배우자와 함께

감금됐다 시를 쓰던 가재는 서가의 모든 종이를 불태우고 손이 찢긴

채 바위 아래 깔렸다 거미는 두려웠다 벌써 그에게 빌려온 책이 얼마

던가? 그는 죽은 왕에게 하사받은 명주로 책을 감아 문밖에 대기중인

잠자리에게 당부했다 그러나 왕은 예리했다 거미를 성 밖으로 추방

시켜 해와 놀아난 달의 가죽을 벗기도록 하고 줄에 매인 잠자리는 천

천히 식어갔다 나는 하루종일 불길이 치솟는 성을 바라보았다 새들은

떨어뜨린 문자를 줍느라 대숲을 샅샅이 뒤졌다

 

 

가을이라고 하자

 

 

그는 성벽을 뛰어넘어 공주의

복사꽃 치마를 벗긴 전공으로

계곡타임즈 1면에 대서특필됐다

도화국 왕은 그녀를 밖으로 내쫓고

문을 내걸었다 지나가던 삼신할미가

밭에 고추를 매달아놓으니

저 복숭아는 그럼 누구의 아이냐?

옥수수들이 수군대는 거였다

 

어제는 감나무 은행이 털렸다

목격자인 도랑의 증언에 의하면

어제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원래,

기억이라는 게 하루 사이에 흘러가기도 하는 거

아니냐며, 조사 나온 잠자리에게 도리어

씩씩대는 거였다

 

룸살롱의 장미가 봤다고 하고

꼿꼿하게 고개 든 벼를 노려봤다던,

대장간의 도끼가 당장 겨뤄보고 싶다는,

이 사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버스 오기 전에

 

몽타주를 그려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