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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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문화적 기억

휘수 Hwisu 2006. 7. 6. 00:23

1. 박달나무와 명태 창란젓

1998년 처음으로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던 때 이야기이다. 모든 방송사들이 관광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내보내고 있었는데 많은 감동적인 장면들이 있었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금강산 계곡을 따라 올라가던 한 노인이 길가에서 마른 잎이 매달린 나무 가지 하나를 받쳐들고 북받쳐 오르는 서러움을 이기지 못해 끝내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었다. 사연을 묻는 기자에게 노인은

"이게 박달나무 가진데요....이걸 보니까 옛날에 어릴 때 아버지가 나를 이곳에 데려왔던 생각이 나요.....아이구, 아버지......흑흑......" 하며 말끝을 잇지 못하는 것이었다. 한 노인으로 하여금 갑자기 통곡하게 만든 박달나무가지의 사연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도토리 잔 만한 소주 한잔이 유학생들로부터 눈물을 빼앗아내고 어릴 때 먹었던 음식에 목이 메어 울음을 터뜨렸던 이야기들을 주위에서 수없이 듣는다. 1930년대 백석이라는 시인은 음식물을 소재로 한 많은 시를 남겼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음식물의 수는 100개에서 이백개 정도로 추산된다. 백석이 그렇게 많은 음식물을 시의 소재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백석이 여행을 많이 했기 때문에? 여행하다 보면 허기를 느끼는 때가 많아서? 또는 미식가라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석에게 음식물은 그냥 허기를 때우는 먹는 것 이상이었다.

그것은 가슴을 뜨끈하게 하기도 하고 울컥 하고 속에서 치밀어 오르게 하는 무엇이었다. "북관"이라는 시에서 백석은 "명태 창란젓에 고추 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비벼 익힌 것을/이 투박한 북관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고 하고 있다.

음식물을 차마 목에서 삼키지 못하고 무릎이 절로 꿇어지는 것은 백석이 그것을 통해 신라백성의 향수를 느끼고 여진의 살내음새를 맡기 때문이었다. 백석이 살던 시대는 유랑의 시대였고 민족성 위기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제 고장을 떠나 떠도는 떠돌이 유랑민들에게 어릴 적 먹던 음식물은 그것과 관련된 모든 기억들을 환기시키고 자신들이 떠돌아야 하는 이유와 핏줄을 생각하게 해주는 매개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석이 그토록 음식물에 집착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박달나무 가지도 마찬가지다. 박달나무를 보는 순간 할아버지에게 그것은 나무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연상시켜주는 하나의 매개물이었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박달나무 가지를 매개로 오랜 시간적 간격을 뚫고 현재의 시점으로 솟아 나와 분단 현실을 환기시키고 할아버지로 하여금 팔순의 나이를 잊고 아버지를 부르짖게 만든 것이다.

2. 존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


빙산을 처음 보았던 사람들은 물위에 떠다니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 뒤 그들은 물 위에 떠있는 부분이 빙산의 전부가 아니라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번 놀랐다고 한다. 빙산은 물 위에 드러나 있는 부분이 전부가 아니라 물 속에 잠겨 있는 더 큰 부분까지 포함하는 개념인 것이다.

우리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불교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색이란 형체가 있는 것을, 공이란 형체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인간은 대체로 두가지에 집착함으로써 사물과 세계를 전체적으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 불교적 입장인데 그 하나는 물질에 집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정신)에 집착하는 것이다.

색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공은 없는 것으로 간주되며 공에 집착하는 사람에게 색은 변화유전하기 때문에 허망하고 의미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것은 색이나 공 어느 하나에 집착하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 색과 공은 같다는 것이다. 즉 색이나 공은 그 자체로는 자성이 없으며 인연에 따라 생기(生起)할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입장을 기호학 언저리에서 무수하게 발견한다. 소쉬르는 기호체계에 대한 전체적인 인식을 위해 계열축과 결합축의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를 때 계열축은 부재하는 것과의 관계를 결합축은 존재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기호의 의미는 존재하는 것 뿐 아니라 부재하는 것과의 관계까지 고려함으로써 전체적인 이해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로트만은 분자 물리학의 홀이라는 개념을 기호학에 적용하고 있다. 분자물리학에서 홀은 그것이 존재해야 할 물질적 위치에서의 물질적 부재 현상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말이다.

물질적 존재에 집착할 때 홀은 부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질량을 달아보면 그것은 질량의 계산이 가능하도록 반응을 나타낸다(마이너스 질량). 따라서 분자구조에서 홀은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구성요소로 생각되어야 하며 전체로서의 분자구조는 존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 사이의 관계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홀이라는 개념을 문학 텍스트의 연구에 적용할 때 물질적으로 활자화된 텍스트는 예술적 분석 대상으로서 자족적 의미를 상실한다. 텍스트는 그것 없이는 예술 작품이 존재할 수 없지만 예술 작품 자체는 아니며 그것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전체로서의 예술적 효과는 텍스트와 일련의 복잡한 존재론적, 이데올로기적, 미적 관념들과의 비교에서 야기된다.

텍스트를 언어적 표현에 도달한 구조적 관계들의 총화로 생각할 때 우리는 텍스트 내적 구조 뿐 아니라 텍스트 외적인 것 역시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물질적으로 실현된 텍스트가 그런 것처럼 실현되지 않은 체계외적인 부분 역시 예술작품의 진정한 구성요소인 것이다. 로트만은 텍스트의 구성요소 중 물질적으로 실현되지 않은 부분을 마이너스 장치라고 말한다.

최근의 <마음의 우주>에서 로트만은 마이너스장치를 넘어 세미오스피어라는 개념에 도달한다. 세미오스피어란 생물권이나 대기권처럼 모든 기호학적 체계들을 작동할 수 있게 해주는 기호학적 공간으로 정의된다. 세미오스피어는 그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결정하며 그것을 벗어나서는 어떤 언어도,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세미오스피어에 잠겨 있으며 그것은 우리를 결정하고 또한 그것은 우리에 의해 변경된다.

예술 텍스트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기호학적 공간과 항상 대화적 관계에 있다. 예술 텍스트는 그 기호학적 공간과의 관계를 통해 의미하며 그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예술 텍스트를 발생시키는 발생인이면서 또한 그것에 의해 변경된다.

우리 문학 연구에서 그 동안 텍스트의 내재적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텍스트 자체에 대한 지나친 강조 때문에 텍스트외적인 체계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과거의 통시적 연구가 공시적 구조를 무시함으로써 가져온 오류 못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기호학적 연구는 텍스트의 공시적 구조 뿐 아니라 통시적 구조 역시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 글은 예술 작품을 텍스트 내적인 체계와 외적인 것의 대화관계로 보고 시와 문화적 기억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려는 의도에서 씌어진다.

3. 시와 문화적 기억


시가 문화적 기억을 환기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는 다른 텍스트들을 현재의 텍스트로 끌어들임으로써 가능하다. 시 텍스트는 그 자체로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외의 무수한 다른 텍스트들과 관계를 통해의미한다.

시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화 공간으로부터의 텍스트들의 침입에 무한히 열려 있는 텍스트이다. 시 텍스트의 이러한 성질은 일반 자연언어로 된 텍스트에 비해 시 텍스트를 정보량이 큰 텍스트로 만들어 준다.

시는 과거 문화로부터 침입하는 무수한 다른 텍스트의 파편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그 파편들이 속했던 시대의 문화적 기억을 간직한 채 현재의 공간 속으로 들어온다. 그것들이 시 텍스트에 포함되는 순간 그것들은 죽은 기억이기를 그치고 그것이 속했던 시대의 문화적 기억과 삶의 모습을 분출시키면서 텍스트와 대화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이 대화관계에 의해 텍스트의 의미는 변형되고 재구조화를 겪게 된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는 무영탑 조영과 관련된 이야기를 텍스트 속으로 끌어들여 신라시대의 현실과 분단현실을 비유적으로 결합시킨 예이다.

신동엽은 이 시에서 민족,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외세를 껍데기로, 순수한 민족적인 삶과 가치를 알맹이로 형상화시켜 민족, 민중 주체의 새로운 역사의 도래를 염원하고 있다. 껍데기-알맹이의 대립은 다시 쇠붙이와 흙가슴이라는 대등한 대립체계를 통해 형상화되는데, 껍데기-쇠붙이는 넓게는 차수성적인 문명세계의 모든 질곡을, 좁게는 이 땅을 침략하고 이질화시키는 외세와 지배 권력을 상징하며 알맹이, 흙가슴은 지배와 착취가 없는 대지적인 원수성적 삶과 민족의 씨앗인 민중, 그리고 그 생명성을 나타낸다.

4.19와 동학혁명은 차수성적인 세계의 모순을 극복하고 원수성적인 대지적 삶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귀수성적 운동으로 파악된다. 그것은 4.19와 동학혁명이 외세및 그와 결탁된 권력층의 지배와 질곡의 껍데기를 물리치고 인간다운 삶을 회복키 위한 운동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계속해서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고 있는데, 이는 껍데기를 물리치는 것이 인간적인 자유와 평등을 회복하는 일인 동시에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모순 중의 하나인 남북분단을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는 민족의 씨앗으로서 원수성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신동엽이 아사달과 아사녀를 이 시에 등장시킨 이유는 아사달과 아사녀가 지배층의 이익을 위해 헤어져 비극적인 종말을 맞은 무영탑과 관련된 설화가 분단구조 하에서 남북으로 나뉘어 아무리 만나고자 해도 만날 수 없는 현실과 간텍스트적 관계를 갖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현진건의 소설 "무영탑"과 신동엽의 오페레타 "석가탑"에서 아사달과 아사녀는 지배층의 억압과 방해로 헤어져 만나지 못하고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된다. 분단구조 하에서 아사달과 아사녀는 남과 북으로 갈려 외세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질화되고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고 있다.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는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질화되고 있는 아사달과 아사녀가 외세의 껍질을 벗고 순수한 알몸으로 만날 때, 즉 대지적인 세계로 돌아가 민족 정체성을 되찾을 때 분단의 극복도 가능하다는 민주, 민족, 민중 주체의 통일관을 보여준다.

문학 텍스트가 지시하는 다른 텍스트가 반드시 문학 텍스트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관용어나 심지어 비속어에서 나올 수도 있다. 다음 시는 그러한 것을 보여준다.

단비 한번 왔는갑다 활딱 벗고 뛰쳐나온 저년들 봐, 저년들 봐. 민가에 살림 차린 개나리 왕벗꽃은 사람 닮아 왁자한데,

노루귀 섬노루귀 어미 곁에 새끼노루귀, 얼레지 흰얼레지 깽깽이풀에 복수초, 할미꽃 노랑할미꽃 가는귀 먹은 가는잎할미꽃, 우리 그이는 솔붓꽃 내 각시는 각시붓꽃, 물렀거라 왜미나리 아재비 살짝 들린 처녀치마, 하늘에도 땅채송화 구수하니 각시둥글레, 생쥐 잡아 괭이눈, 도망쳐라 털괭이눈, 싫어도 동의나물 낯두꺼운 윤판나물, 허허실실 미치광이 달큰해도 좀씀바귀, 모두 모아 모데미풀 한계령에 한계령풀, 기운내게 물솜방망이 삼태기에 삼지구엽초, 바람둥이 변산바람꽃 은밀하니 조개나물, 봉긋한 들꽃 산꽃 두 팔 가린 저 젖망울.

간지러, 봄바람 간지러 홀아비꽃대 남실댄다.
              ―홍성란,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봄이오면 산에 들에"는 민요 나무노래를 패로디한 시조이다. 중장 부분이 나무노래와 흡사하기는 하지만 나무노래가 나무 이름을 외우기 쉽게 만든 교육적인 목적을 가졌다면 이 시조는 봄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들뜨는 자연의 원시적 생명력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점이 차이가 있다. 이음보 빠른 박자로 점층적으로 되풀이되는 풀이름들의 나열은 불쑥불쑥 봄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알몸을 드러내는 대자연의 생명력을 생생하게 담아내 주고 있다.

이러한 민요와의 간텍스트적 관계 외에 이 시조의 초장 부분의 "단비 한번 왔는갑다 활딱 벗고 뛰쳐나온 저년들 봐, 저년들 봐"라는 구절 역시 다른 텍스트를 지시하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겨울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겨울옷 벗어던지고 짧은 옷 입고 밖에 나온 처녀들을 쳐다보는 시골 할머니들의 경이, 선망, 질시, 그리고 애정 등이 함께 얽힌 질박한 언어를 텍스트 속으로 끌어들여 봄의 불쑥 불쑥 솟아오르는 생명력과 비유적으로 결합시키도록 만들어주고 있다.

죽음을 바라보는 노인들에게 겨울옷 벗어 던지고 나오는 처녀애들은 부럽기도 하고 젊음에 대한 질투를 불러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저년들 봐 저년들 봐"하는 시골 할머니들의 어투는 제도적인 언어가 가질 수 없는 촌로들의 원색적인 욕망을 드러내준다. 중장 끝 부분의 "은밀하니 조개나물, 봉긋한 들꽃 산꽃 두 팔 가린 저 젖망울"의 봉긋한, 젖망울 등의 관형어도 물이 올라 눈망울이 부풀어오르는 식물들을 봄기운에 본능적으로 마음이 달뜨고 가슴까지 봉긋하게 부풀어오르는 것 같은 처녀들과 비유적으로 결합시키도록하는 것도 시골 할머니들의 독백과 갖는 간텍스트적 효과이다.

두 번째로 시텍스트는 비유나 상징등의 기법을 통해 문화적 기억을 매개한다. 언어는 그 자체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시는 문자 그대로의 축어적 의미로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들이 가진 과거의 기억 중 하나, 즉 다른 텍스트에서 사용되었던 의미들을 끌어들여 간접적 의미로 의미한다. 즉 시는 단어들이 가진 기억을 환기시킴으로써 의미한다. 단어들의 기억은 또한 다른 텍스트나 문맥에서 이미 사용되었던 것으로 문화적 기억의 일부가 된다. 비유나 상징 등 문학적 장치들은 일상언어에서 결합할 수 없는 단어들을 강제로 결합시킴으로써 그 기억들을 불러들인다.

몇 년전에 방영된 텔레비전 광고 한편을 예로 들어 보자.

첫 번째 화면에서 광고는 바닷가 백사장에서 몸매를 과시하고 있는 푸른 색 비키니 차림의 여인을, 다음 장면에서 광고는 푸른 바다 가운데서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물 속으로 돌아가는 생선을 보여준다. 세 번째 장면은 비키니 차림의 여자가 샤워를 하는 장면이다. 마지막 네 번째 장면에서 광고는 화비누라는 제품이름을 등장시킨다.

얼핏 보기에 비누와 비키니 차림의 여인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이 광고가 선정적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광고는 직선적인 의미화 과정을 밟지 않는다. 광고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화면 사이의 등가적 결합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비키니 차림의 여자와 생선, 그리고 물에 젖은 여인의 몸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기호표현물들이다.

그러나 이 기호표현들은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해 다른 문맥에서 지시적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비키니 차림의 여인은 우리에게 섹시하다, 늘씬하다, 시원하다, 싱싱하다, 아름답다는 등의 기호내용을 연상하게 한다. 또 생선은 생선회나 매운탕 등 먹는 것을 연상시키고 군침을 돌게 할 수도 있고 신선함이나 싱싱함 같은 기호내용을 연상시킬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물에 젖은 여인은 축축하다, 척척하다, 촉촉하다 등 감촉과 함께 싱싱함을 연상시킬 수 있다. 이런 단어들이 갖는 이런 기호 내용들은 단어들이 가진 문화적 기억 중의 일부이다. 시에서는 지시적 의미가 아닌 단어들의 기억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그것들을 인접해 있는 다른 단어들과 결합시켜 전체로서의 시의 의미를 완성시킨다.

앞서 세 가지 기호 표현들 사이의 공통점은 싱싱함일 것이다. 따라서 세 장면을 결합시키면 우리는 생선처럼 싱싱한 여인 내지는 여인의 피부라는 메시지를 얻게 되고 그것을 화비누와 직선적으로 결합시켜 "이 비누를 쓰면 생선처럼 싱싱한 피부로 가꾸어준다"는 광고 전체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시는 근본적으로 직접적인 전달이 아닌 간접적인 전달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단어들이 갖는 문화적 기억이다.

매운 계절의 채쭉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절정

이육사의 "절정"에서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은유가 나온다. 표면적으로 보면 겨울은 겨울이고 무지개는 무지개일 뿐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시에서 시인은 두 개의 이질적인 낱말을 결합시킴으로써 둘 사이의 문화적 기억의 유사성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두 단어들이 결합될 수 있는 것은 그 기억의 공통성 때문이다.

그 기억의 공유 부분 속에 일시성이라는 속성이 있다. 겨울은 죽음, 추위, 인내, 고통 등의 의미와 더불어 4계의 순환원리에 따라 순환되는 일시성을 기호내용으로 가지고 있다. 무지개는 꿈, 희망 등의 개념과 여름철 소나기 온 뒤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속성을 기호내용으로 한다. 이 기호내용들은 우리 문화권 내에서 두 단어들이 가진 역사이자 기억이다. 따라서 이 은유는 겨울이 무지개처럼 곧 사라질 것이라는 시인의 신념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무지개는 그냥 무지개가 아니다. 강철로 된 무지개이다. 강철로 된 무지개라면 그것은 쉽게 사라질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겨울이 상징하는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시에서 겨울은 화자로 하여금 북방으로 쫒겨나게 하고 하늘도 지쳐 끝난 것 같은 절망의 절정에 서게 만든 채쭉과 같은 매서운 무엇이다. 이육사를 알고 있는 독자들은 대체로 이 겨울이 가혹한 일제 식민지 정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마지막 겨울이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도 해결된다.

육사는 이 시를 통해 식민지 상황이 계절의 순환이나 무지개처럼 쉽게 사라질 것이라는 신념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가 마주하고 있는 가혹한 식민지 현실은 마치 강철로 된 무지개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절망적인 것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이 시는 짐작하게 해준다.

세 번째로 시 텍스트가 문화적 기억을 매개하는 형식은 시 텍스트와 관련된 텍스트 외적 현실과 상황, 그리고 개인적 정보 등이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연평 바다에 봄바람 분다
얼싸 좋네 얼싸 좋아
군밤이요 생율밤이로구나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연평바다에 돈바람 분다
얼싸 좋네 얼싸 좋아
군밤이요 에헤라 군밤이요

너는 처녀 나는 총각
처녀 총각이 어얼싸 좋네
얼싸 좋아 군밤이요
군밤이로구나

      ―군밤타령

경기도 민요 "군밤타령"이다. 민요라는 성격 때문에 내용을 생각하지 않고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일반적인 독자들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조금만 주의깊게 살펴보면 이 민요가 상당히 재미있는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민요를 시로 만들어주는 것은 특별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이 민요에 생략되어 있는 발화 상황과 관련된다.

우선 이 민요의 화자에 대한 정보부터 시작해 보자. 우리는 이 민요의 화자가 미혼의 총각이며 현재 군밤장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 민요가 경기 민요라는 것 때문에 지리적으로 이 군밤장수 총각이 장사를 하고 있는 곳이 연평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경기도 어디쯤이라는 것을 쉽게 끌어낼 수 있다. 나아가 독자들은 연평도가 바라다 보이는 곳 중에서 군밤장수를 할 만한 곳으로 제물포(현재 인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로 발화 상황을 토대로 민요의 내용에 접근하려고 할 때 독자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하나 나타난다. 그것은 이 민요의 화자가 군밤을 팔면서 "봄바람 분다"라고 노래하기 때문이다. 군밤은 겨울에 파는 것이지 봄에 파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화자가 "봄바람 분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독자들은 아마 겨울이 끝나고 봄이 가까운 시절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예민한 독자라면 민요의 군밤 장수가 봄을 몹시 기다리기 때문에 겨울의 찬 바람 속에서 남보다 먼저 봄기운을 알아채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군밤장수 총각은 왜 봄을 그토록 기다리는 것이고 겨울 바람 속에서 봄기운을 남 먼저 느끼고 신명나게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는 이 민요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걸림돌을 해결하는 문제와 결부된다. 독자들은 이 민요의 구문론적 사슬에서 노래가 1절과 2절로 지행되면서 봄바람에서 돈바람으로 바람의 성격에 변화가 일어나고 3연에서는 바람이 아닌 처녀 총각 이야기로 이야기가 바뀌어 나간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이런 모순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그것은 이 민요의 화자가 봄이 되면 돈을 벌 수 있고 또 돈을 벌면 장가도 갈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여기서 화자가 봄바람 분다고 한 이유도 해명이 되게 된다. 겨울철 군밤장수를 하면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는 군밤장수 총각에게 봄은 남보다 더 기다려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면 군밤장수 총각은 봄이 되면 무엇을 해서 돈을 벌겠다는 것인가.

봄이오면 군밤장수마저 걷어치워야 되는데 군밤을 팔아 돈을 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민요의 화자가 본래부터 군밤장수가 아니라 임시로 겨울을 나기 위해 군밤장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문을 가질 수 있고 그의 원래 직업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여기 제시된 바람이 부는 장소가 연평바다이기 때문에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독자들은 상식적으로 연평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독자들이 가진 연평도에 대한 정보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유익하게 쓰일 수 있다. 연평도 하면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조기이다.

연평도의 조기철은 음력 4월, 즉 봄이다. 봄이 되면 조기 떼가 몰려오고 조기를 잡아 돈을 벌고 장가를 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현재 군밤장수를 하면서 노래를 하고 있는 총각은 원래는 어부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독자들은 이 군밤장수는 제물포 출신이 아닌 타지인이라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조기 떼는 산란을 위해 남쪽에서 연평도까지 올라오고 음력 4월에 연평바다에서 가장 큰 어장이 형성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부들은 조기떼를 따라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올라왔다가 연평도에서 조기잡이가 끝나면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중에 고향으로 가지 않고 제물포에 남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현재 인천의 인구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 하는 것이 충남 해안지방이라는 것은 이것을 입증한다.

이 민요의 화자는 고향에 가지 않고 남은 어부라고 생각해도 무관하다. 조기를 판 돈으로 처음에는 풍성풍성 생활할 수 있었지만 이내 돈은 떨어지고 추운 겨울이 닥쳐 화자는 군밤장수로나마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돈없는 타지인 어부에게 봄이 몹시 기다려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간절한 기다림 때문에 군밤장수는 남보다 먼저 겨울의 찬 바람 속에서 봄기운을 느낄 수 있었고 또 그 바람 속에서 비릿하게 조기떼 몰려오는 냄새까지 맡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황지우의 출세작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화관에서는 애국가 연주와 대한 뉴스를 내보낸 뒤에 영화를 시작했다. 뉴스 매체가 적었던 시절, 대한 뉴스는 시민들에게 나름대로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단단히 해주었다.

애국가 연주도 마찬가지다. 일제 식민 통치와 동란을 체험한 국민들에게 애국가는 국가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단합된 힘으로 국가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다같이 노력해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주었다. 아직도 군청이나 관공서에서 행사를 할 때 애국가를 제창하고 국민서약을 한 다음 행사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면 극장에서 애국가를 경청하던 시절이 그리 먼 것만은 아님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일반적으로 애국가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힘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시에서 애국가는 청중들로 하여금 모두 기립하게 하고 또 앉게 만드는 구속력을 가진 보이지 않는 강제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시에서 애국가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자유를 구속하는 노래로 나타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텍스트 내적인 문맥과 더불어 텍스트를 둘러싸고 있는 텍스트외적인 정보들, 즉 시인이 유신체제에 항거하다가 구속된 일이 있었다는 정보와 이 시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70년대 사회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

1970년대는 박정희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마련하고 애국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독재정치를 펼치던 시기이다. 시인은 이 시기에 대학을 다니면서 유신체제에 항거하다가 구속된 전력을 가지고 있다. 이 시기에 정부는 앞서 이야기한 극장에서의 애국가 연주는 물론이고 새롭게 국기 하강식을 제도화하여 국기 하강식이 거행되는 시간에는 거리에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국기에 대하여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경청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애국가는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이용되었다.

시인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 애국가 화면에서 끼룩거리면서 날아가는 을숙도 철새들을 보면서 철새들처럼 지상적인 구속을 벗어나 한세상 떠메고 자유롭게 세상 밖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지상 세계를 떠나 자유로운 세계로 가고자 하는 욕망은 애국가의 마지막 구절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와 함께 좌절되고 시인은 제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텍스트 내적인 문맥만으로는 애국가가 왜 자유를 억압하는 힘으로 작용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텍스트와 텍스트외적인 문맥을 덧붙일 때 독자들은 이 시에서 애국가는 관중들을 일어서게 하고 자유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고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으라고 강요하는 정치 권력의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하여 국민들의 자유에 대한 욕구를 애국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억압하는 유신정권 시대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을 보여주고 있다.

4. 맺는 말


시는 텍스트 자체만으로 의미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에서 전체로서의 예술적 효과는 텍스트 내적인 체계와 텍스트 외적인 체계의 복수 대화에 의해 나타난다. 시는 텍스트 내로 텍스트 외적인 것을 끌어들임으로써 다른 텍스트에 비해 큰 정보량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런 시의 특징은 시의 독서에 있어서 시와 그것을 둘러싼 문화 사이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글은 시가 과거 문화적 기억을 끌어들여 예술적 전체를 형성하는 방법을 관용구나 인용 등을 통하여 두 텍스트 사이의 간텍스트적 관계를 맺는 경우, 그리고 비유나 상징 등 문학적 장치를 통하여 그 단어들이 가진 문화적 기억을 끌어들이는 경우, 그리고 역사나 시대적 상황, 시인 자신의 개인적 정보 등을 암시하거나 끌어들이는 경우 등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시는 압축과 생략을 특징으로 한다. 시의 언어의 압축도는 그것이 환기시킬 수 있는 문화적 기억과 비례한다. 문화적 기억을 많이 간직한 시일수록 정보량이 크고 독자들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하며 독서 과정에서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시이다.  

<유재천, 시와 문화, 배달말 25, 배달말학회, 1999. >

 

출처, 프리즘 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