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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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손진은 시인

휘수 Hwisu 2007. 10. 5. 11:31

        손진은 시인


1959년 경북 안강 출생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5년 매일신문 시평론에 당선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저서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현대시의 미적 인식과 형상화 방식 연구> <한국 현대시의 정신과 무늬>

경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

 

 

 

*돌


 
노당리 뒷산
홍수 넘쳐 물살 거친 계곡 밑으로
쪼그만 돌들
물길에 휩쓸려 떠내려 간다
노당리의 산과 들
지난 수십년의 계절과 햇빛 바람 다져넣고도
동으로 혹은 허으로 머릴 누이고
낯익은 백양나무 강아지풀 개구리 울음 뒤로 한 채
이 마을 사람들 대처로 대러로 나가듯
물살의 힘 어쩌지 못하고 떠내려 간다.
떠내려 가서
형산강 하구나 안강쪽 너른 벌판
낯선 땅에서 발붙이며
지푸라기 다른 돌들과 섞여 부대끼거나
길이 막히면
구비진 어느 구석 외진 도랑에서 비를 긋거나
구름자락 끌어 덮으며 길들여지다가
비가 오면 또 더밀려 갈 것이다.
만났다가 헤어지고
그냥 안주하기도 하는 돌들의 행려(行旅)여.
몇몇 친숙한 식구가 떠난 뒷산 계곡의 남은 돌들
더 깊은 시름에 잠기고
세찬 여름비의 며칠이 지나고 햇빛 쨍쨍한 날
가슴에 이끼날개 달고
밤 속으로 은빛공간 열며
별이 되는 꿈은 꾸는
조약돌 몇이 얼핏 보인다.


 
 


 *중년

 

열쇠를 돌리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문득 등을 끄지 않은 채 차에서 내린 간밤의 기억이
몰려온다 낭패, 눈꺼풀도 내리지 않고
정신없이 꿈속을 헤매는 사이 핏기를 잃어버린 내 눈알
어떤 것에 뒤집혀 긴 밤 긴 생을
후들거리는 다리와 텅 비어가는 머리도 모른 채
내 헤드라이트는 발광했을 것이다
무언가에 홀려 뚫어지게 바라보는 동안
계절은 가고 주름살은 깊어졌고 흰 머리는
늘어났다 어디로 가는가 철철 넘치던 팔뚝의 푸른 힘줄은
전류처럼 터져 나오던 생기, 머릿속을 흐르던 생각은
어느 허공으로 날아가버리고
까칠하고 초췌해진 몸뚱이로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는가
어저께까지도 명품이라고 믿었는데
눈 한번 들었다 내려놓는 사이
어떤 것에 취해 이렇게 떠밀려온
두드려도 가없는 무슨 소리만 내보내고 있는

 

중년을 일으키려 저기, 정비기사가 달려온다

또 하나의 몸이 부끄러운 듯 마중하러 간다


 

*숲

-序詩

 

부챗살모양 잎을 늘어뜨린 채
큰 나무가 그늘 드리울 때
작고 앙증한 줄기 끝에 여린 잎들이며 꽃을 매단
어린것들 날아오르려 퍼득거린다
솟아오르고 누르려는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이 두근거리는 몸짓들 사이로 스며들어
그 속에서 자라는 죽음이며 상처까지를 어루만지는 햇살
전율하는 숲이 반쯤은 솟아오르고
반쯤은 스스로를 억누를 때
열려진 사물들 속에서
잎파랑처럼 알 수 없는 느낌으로 떠는 모든 육체들
그 힘으로 구름은 하늘에 천천히 흐르고
그 힘으로 가볍게 떠 있는 공중의 새들


 

*길

 

한겨울 어린 보리는
자신의 몸 누르는 추위 견디느라
나사처럼 천천히 잎을 돌려 내민다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이며 서릿발같은 것들
힘겹게 들어올리느라 머리와 몸 비틀며 키를 늘인다고 한다
그 때문에 들뜬 그의 발 한번 눌러주는 게 보리밟기다
그러다 좀 더 자란 보리는,
살얼음 칼날 추위와 눈을
살살 어르면서 그들이 내려온 길까지를 잎사귀에 꼭꼭 채울 줄도
우산 만들어 빗방울 튕길 줄도 안다
사람들 다 잠든 밤에도 통통 몸을 흔들어
생각을 키우는 보릴 보아라
보리밭이 푸르게 일렁이는 것은
하늘의 것들 다스리는 넉넉한 심성
그의 잎사귀마다 돋은 기억
바늘같은 까스러기를 다는 것도 마침내 순해진 그들과의
까슬까슬한 추억들 때문이다
잎사귀 제법 누렇게 된
보리밭의 가슴속에서 노고지리가 솟구치는 것도
눈과 얼음, 달과 비바람의 행로를 하늘 속으로 풀어놓기 위함이다
그리곤 가는 허리 황홀하게 흔들며
자신의 길을 간다
몸속은 비운 채로, 머리에는 흰 구름도 몇 걸치고


 

 

*스스로 열리기

 

불어오는 바람에 이파리가 흔들릴 때

우리는 나무가 웃는다고 말한다

가령 비 뿌리기 전 재빠른 나뭇잎의 흔들림은

불안해 하는 나무의 표정이다

그 순수한 기쁨에게로 혹은 상처에게로 열려 있는 나무들

 

어깨만 갖다 대어도 재빨리 알아차리고

온몸 자체가 기쁨으로 설레이는

내릴까 라는 음성이 그의 귓바퀴를 흐르기 무섭게

찌뿌리는 어린것들 육체 언어

 

종이새처럼 풀풀 날아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 말고

햇빛에 혹은 비에로 섞여 나란히 떠돌기도 하다가

때가 되면 하나씩 뿌릴 내려

풀이 되고 나무가 되는 언어

그리하여

사물들이 내게 손짓할 때

내 마음의 은사시나무

잎파랑 흔들어 대는 설레임

 

 


*편지 시간

 

 

뚫고 올라왔다 사람들 소음과
올라오는 김들 틈에서
"어머 편지 올 시간이야, 집에 가봐야겠네" 어쩌고 하는 소

면발 건지던 내 수저가 허공에서 일순 멈출 때
사십이 넘었을 법한 쉐터 차림의 여자가
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움은 새끼를 친다
문득 툭하고 우체함에 봉투 떨어지는 소리 귀에 걸렸다
뽀작뽀작 타들어오던 오토바이 소리의 몇 분이 지나고
누가 볼까 둘러보며 우체함에 손 넣을 때
물컹했던 그 감촉의 시간
그 여자 이름도 얼굴도 나는 모른다
다만 햇살 거느리고 가는 그녀
알 수 없는 박자에 실린 걸음의 질량
실루엣처럼 보았을 뿐이다
하품하던 하오의 시간이
그녀 발끝에서
두근거리며 만져졌다 쿵쿵 시간이 펌프질을 해댔다
산격시장 그 만두집
그 여자 나간 틈 비집고 들어온 햇살
탁자 위를 재재거릴 때
날아오르는 자잘한 먼지들이 다 환했다


 

*만두


- 시를 위하여

 

나는 속이 어른어른 비치는 만두를 좋아한다
모양을 빚기도 전에 굳어버린 반죽,
그렇다고 너무 많은 재료를 쑤셔넣어
속살이 터진 피도 좋아하지 않는다
햇볕에도 그늘에도 쉬 드러나지 않는 것
아른아른한 피를 한 입 베어물면
속이 살짝 열리고
으깨진 재료들이
차려놓은 오늘의 식탁이 보인다
자기 살이 닳아버린 줄도 모르고
해와 달, 다른 데서 온 낯선 것들이
서로를 붙들고 둥글게 부풀어 숨죽이고 있는
그 고통과 셀렘이 살짝 익은 것이
만두에는 들어 있어야 한다
한 입에 쏙 들어가는 것이지만
너무 아까워 단숨에 먹지 못하는 것이거나
먹고 난 뒤에도 입속에 가슴 속에
열두 광주리의 풀무로 부풀어오르는 것
때로 잘 빚어진 것 같지만
알고보면 다른 이들이 배달해주는 쓰레기 단무지를 잔뜩 넣은 얼굴
숨도 죽지 않고 살아 자신을 드러내는 재료들
만두는 그런 것이 아니지
해와 달 그림자와 이슬,
천천히 그들이 키운 것들의 상처와 고통, 한숨도
아른아른 비치는 마음의 형상이
둥글게 부풀어오른 것이 만두의 완성이다

 

 


*풋봄

 


여린 추위가 남아 있는 캠퍼스
솔숲 옆 아스팔트 길에 들어서다, 어머 저것 좀 봐
생머리를 늘어뜨린 여학생 둘이
이제 갓 눈을 뜬 듯한, 추워서 붉은 목도리를 목에 두른
아기뱀
그 어린 강물 줄기 받으려
새로움을 잃어버린 헐거운 사십대의 사내도 거들어
백지며 책받침을 갖다대는 풍경이라니!
구불텅거리는 그 물은 그걸 타고 흘러내릴 뿐
허릴 붙잡아 보려 해도
혀의 불에 델까 움찔거리는,
오 사랑스럽고 미끄러운 울렁거림이여
결국 손아귀를 빠져나와
저녁 연기처럼 태연히 숲으로 스며드는
그 물줄기 따라가며
어머, 어쿠 어쿠! 정적을 찢으며 뿌려대는
잘 익은 소리들이 대기에다 구멍을 내는지
어떨결에 곁의 벚이며 진달래 같은 것들
몸을 막 열어놓고 꽃들을 터뜨리는 봄날 아침
봄은 그 어린 것을 앞세워서 왔던 것이다
필시 겁과 당황에 잔뜩 움츠렸을 법한 풋봄도
울창한 황홀의 가슴 풀무를 일으킬 줄 알고 있었다


 

출처 : e 시인회의
글쓴이 : 미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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