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손순미 시모음 1 본문
1964년 경남 고성 출생
동서대 사회교육원 문학아카데미 수료
199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7년 <현대시학> 으로 등단
먼 집
문 밖엔 늦은 저녁이 서 있다 폐타이어가 엮어진 지붕 위 설익은 꿈이 자주 바람에 들춰져도 마음들은 꼭꼭 여미고 산다 가파른 골목을 밀고 온 지친 눈들 불빛을 당기고 부엌으로 들어간 식욕은 세간을 달그락거린다 시렁 위엔 칸칸이 달빛이 포개져 있고 간고등어 한 마리 온 식구들을 구워낸다 오순도순 둘러앉은 눈빛들 한 그릇씩 비워내는 얘기에 아랫목 온기가 올라온다 식구들 한 이불의 별빛을 덮고 자면 어둠이 풀풀 새어나오는 집집이 몇 채의 꿈을 꾼다
신발들 저희끼리 내일을 쓰윽 신어본다
199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피아노가 있는 방
그 방은 열리지 않는 방, 피아노 소리가 문 밖을 지키고 있었다 `연습 중 접근금지’라 써 놓은 문장은 속절없었다 나는 늦은 오후가 지나가는 것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곡명을 알 수 없는 피아노 소리는 지리멸렬하게 이어졌다
아름다운 날들이라 말할 수 없었다 어디론가 날아가는 새떼들은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내 몸에서 단속적으로 추억이 흘러나왔지만 나는 그 추억의 구멍을 닫아 버렸다 나뭇가지 속에 봉인되어 있는 꽃들이 속성으로 피어나기를 희망할 뿐이었다 나는 나무들의 관절을 꾹꾹 건드려주었다
방문은 들썩이고 있다 그 방은 열릴까, 여자는 허공에 앉아 있다 피아노 소리는 허공의 악보를 밟고 올라간다, 허공을 밟고 내려간다
시와사상 2000년 봄호
三伏
폭포처럼 쏟아지는 햇볕 속으로 꽃상여 들어간다 저승으로 가는 마무리 치장은 화려한 종이꽃이다 살아 있는 자들은 온 몸의 구멍을 통해 슬픔을 내보낸다 죽은 이의 생애 만큼 더위는 숨이 막히고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곡소리는 벌겋게 익었다 죽은 이의 잠은 고요하고 상여꾼들 불길보다 더한 더위에 제기랄, 진저리 친다 산 자의 고통에 죽음이 질질 끌려간다
이런, 여비가 없어 망자가 저승 문을 건너지 못하겠구먼! 시퍼런 만원권 지폐가 상여를 떠메고 간다
부산일보 주말의 詩 2002년 8월24일자
자판기
저 화냥기
누구에게나
기꺼이
몸을 내주는
단돈 200원에 저리 뜨거워지네
눈물로 우려낸
거리의 여자
깔보면 안된다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이란
타당성이 있는 것
나를 잠깐 동안만 즐기는 당신
사랑했다는 말은 쓰레기통에 버려지네
일회용은 배반을 유행시키고
버려진 사랑은 비닐에 싸여 수거돼 가고,
재활용은 자존심이 상한다
불을 켜 다오
거리에 급하게 배달된 어둠을 달래야 한다
나에게는 아직도 사랑이 남아있다
그 집에 내리는 비 2
이웃들의 수다는 끊겨 있고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빈방과 거실 버려진 모든 것들이 버려짐으로 살아 있다 그들은 모든 슬픔을 무책임하게 장악하고 있다 사방으로 매달린 녹슨 창문은 그 슬픔이 빠져나갈 틈이 없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썩은 반찬 냄새가 아우성치고 있다 푸른 냄새의 공화국이 생겼구나 그 곳엔 또 다른 生이 은밀한 번식을 하고 있다 액자 속의 가족들은 단장된 거실을 배경으로 웃고 있다 웃음은 버려져도 웃고 있다 꿈은 서둘러 그 배경을 빠져나가고 집은 침묵을 장기 수혈 받고 있다 이 집의 힘은 저 버려진 웃음 속에 있을까
전기가 끊긴 집에 어둠이 들어온다 흐트러진 집안의 집기와 모든 슬픔들이 그 어둠에 안긴다 근처 아파트 불빛이 밤새도록 집의 내력을 밝혀 내고 있다
늙은 상인
그 사각의 구멍에 잠깐 햇살이 스친다 그는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어둡고 늙어빠진 그 구멍은 형광등을 켜자 투명한 구멍이 되었다 형광등은 구멍 곳곳에다 제 몸을 채워 넣는다
어둠의 주름이 펴지면서 조악한 물건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구멍 속의 공기를 빼내기 위해 창문을 열어 놓는다 그 창문으로 구멍은 자신을 완전히 비워낸다
그는 늘 그 자리에 놓여 있는 물건들의 먼지를 형식적으로 털어낸다 팔리지 않는 물건들은 그를 빤히 쳐다본다 그는 그의 삶 만큼이나 까마득한 신문을 읽어내려간다
서로가 서로의 삶을 바꿔 읽어내려 가는 동안 형광등은 구멍 속을 따뜻하게 데운다 그는 형광등이 풀어내는 빛을 햇살이라 믿는다
오늘 그의 구멍 속에는 몇 명의 손님이 드나들었으나 물건은 팔리지 않았다 다들 물건이 너무 낡았다고 하였다 그는 그의 삶이 고스란히 보관 중인 구멍의 셔터를 내린다
셔터는 그의 늙은 잔등처럼 덜덜거린다
시와사상 2000 봄호
정물
해변 횟집은 저녁 해에 잠겨 출렁거린다 수족관 등 푸른 고기들 텅텅 빈둥거리며 한시절을 산다 그 횟집을 배경으로 웅크리고 있는 풍경은 묘사된다
거리는 어둠이 철벅이는데 손님이 없는 가게는 유곽처럼 붉은 등이 내걸린다 깊고 적막한 구멍이 되어 있는 가게를 달빛이 들여다본다
어디서 갈매기울음 들려오는지 귀를 세운 수족관엔 파도 한 자락 새 나오지 않고, 물고기들 추억의 비린내를 풍기며 지루하고 깊은 밤을 느릿느릿 헤엄친다
누군가 수족관 속으로 들어온다 세상이라는 무거운 신발을 질질끌며,
시와사상 2000년 봄호
구두장이
햇볕은 구두를 신고 있었네
그늘은 그 앞을 빠르게 지나갔네
구석진 자리 단 한 개의 화분은
유일한 서정이었네
그는 햇볕으로 구두를 닦는 사람
사람들은 그를 구두장이라 불렀네
한 평 남짓 그의 가게는
날마다 구두가 넘쳐났네
햇볕을 듬뿍 바른 구두들은
투명하게 반짝였네
사람들은 구두를 신고
구두는 다시 사람들을 신고
서로가 서로를 신는
구두는 그의 삶도 온전히 신고 있네
그의 불편한 다리를
단 한 칸의 방을
단 한 사람의 아내를
시와사상 2000년 봄호
붉은 찻집
사방으로 커다란 창문이 있는 그 곳은
�은 해가 꽉 들어차 있다
해의 차일 속에 들어앉은 사람들은
비둘기처럼 구구거린다
아무도 생각나지 않는 진저리나는 겨울이었지만
나는 또 많은 사람들 틈에 아무렇게나 포함되어 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많은 말들,
가벼워진 말들은 허공 속에 피어 올라
동그랗게 알을 낳았다
사람들은 그 알 속에서 새의 부화를 기다린다
한켠에선 깊고 어두운 겨울을 피아노치는
여자의 눈이 젖는다
의자는 조금씩 밑으로 가라앉는다
아무도 내 의자의 침식을 눈치채지 못한다
허공에서 부화된 하얀 말들이 창을 통해 날아간다
햇볕은 찻집을 더욱 진공시킨다
어떤 식목
사각의 棺 하나를 땅에 심었네 슬픔은 모르는 척 한줌의 흙으로 던져졌네 사람들은 몸 속에서 투명한 울음을 꺼내 골고루 뿌려주었네 그의 생은 흠뻑 젖었네
한 장의 햇살이 달려왔네 그의 생애를 따뜻하게 덮어주었네 그는 작은 씨앗 하나로 돌아갔네 그 씨앗 속에 혼돈과 좌절과 영광으로 우거진 거대한 숲이 밀봉되어 있네
소가죽 구두
늙은 소의 발을 굽는다
늙은 아버지의 발을 굽는다
토막난 아버지의 발을 잡고
아버지의 삶을 다듬기 시작한다
검은 육질에서 기름이 돌기 시작한다
탕약처럼 검고 어두운 터널을 걸어온
아버지 평생의 켤레,
아버지 고통의 부위가 누릿하게 익어간다
나는 아버지의 삶에 지나친 광택을 낸다
아버지 평생의 車, 아버지 구두가
모처럼 호사를 한다
반짝! 아버지의 영광은 짧았다
사람의 발을 한 짐승이, 짐승의 발을 한 사람이
아버지를 짓밟았다
그렇게, 칠십 평생 찍어온 아버지의 낙관(落款)은 불발이었다
윤을 낸 구두를 선반 위에 올려둔다
평생 바닥이었던 아버지가
높은 곳에 올라가 계신다
한밤중
구두의 울음이 구성지게 들린다
아버지가 구두를 타러 오신 것일까
현대시학 (2005년 11월호)
시인시각 창간호 재수록
칸나
찬물에 밥을 말아먹었다 더운 바람이 불어오고 마당에 칸나가 피었다 소스라치게 피었다 체한 것이 아닐까 아닐까 했을 때 붉은 꽃의 성대에서 칸나가 피었다 터져 나오는 자궁의 홍등紅燈을 어쩌지 못한 나는 주근깨가 많은 소녀였다 달은 아예 뜨지도 않은 밤에 수돗가에서 몰래 팬티를 빨았다 공포와 수치심이 온몸에 스멀거리는 꽃의 향기는 어두웠다 야광의 안구를 갈아 낀 고양이가 뒤꼍으로 돌아나가고 나는 자궁이 쏘아대는 꽃폭탄에 배를 싸쥐고 누웠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식구들은 밥을 먹고 있었다
칸나가 피었다 배가 아프다 칸나만 보아도 배가 아프다 뜨거운 태양의 여름이 칸나를 지진다 칸나의 음순이 붉어졌다 십만 볼트의 전류가 내 자궁을 지지는 고통을 지나 나는 새끼를 낳은 어미가 되었다 칸나가 어둡다 새끼를 낳은 공포의 추억이 몰려온다
2006년 <시인세계 >겨울호
가정
비츨비츨 여름비를 받아적는 그 집, 지짐이 굽는 소리 비츨비츨, 온 식구들 파전처럼 둘러앉아 서로의 가장자리를 떼어먹는다 아버지 한 입 어머니 한 입 모내기가 끝난 아버지의 들판을 아랫목에 깔아놓고 비츨비츨, 배부르게 배부르게 식구들 파처럼 나란히 누워 비의 젓가락 장단 아아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담장의 능소화 못 견디겠는 망울 터지고 햇볕이 그 집을 노릇노릇 익힐 때 집의 뚜껑을 열고 마침내 화려한 휴가 마친 아버지 아랫목에 깔아놓은 들판을 메고 나간다 해마다 여름비를 받아적는 아버지의 딸 비츨비츨, 액자 속에 눅눅하게 보관된 아버지를 닦는다
저녁
고양이 울음이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울음소리는 저녁보다 어두웠다 신발을 신은 울음은 모퉁이까지 걸어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골목은 먹물처럼 고요했다 어둠을 보관한 집들은 집의 입술인 창문을 열지 않았다 집의 근심은 하수구로 흘러나왔다 수챗물이 눈물처럼 조금 반짝였다 나뭇가지에 검은 색종이처럼 접혀있던 새들의 깃털 터는 소리 낮게 들려왔다 밥물 잣는 소리 같았다 다시 길을 당겼다 담장의 자귀나무 연분홍 서로 몸을 부딪고 깊은 저녁을 껴안고 갔다 가로등이 흰 새알을 까는 동안 손수레를 끄는 노인이 남아 있는 골목을 다 끌고 갔다 사라진 저녁의 끝에서 서둘러 발견한 나의 집 배꼽에 지그시 벨을 눌렀다
계간 <신생>
적사과
남자는 빨갛게 구워진 사과를 팔고 있었다 사과는 남자의 직영농장에서 알맞게 구워 온다고 하였다
남자의 농장은 거대한 아궁이 인 셈이다 그 아궁이 속에는 늘 다량의 햇빛과 투명한 공기가 불탄다고 하였다
나는 사과 한 상자를 주문했다 남자는 사과 맛이 한 마디로 뜨겁다며 태양같이 웃었다 배달된 사과를 보고 아이들은 불덩이 같다고 하였다
나는 사과껍질을 조심스럽게 깎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은 사과 속에 들어앉아 있다 나도 사과 속으로 들어갔다 덜커덩 사과의 문이 닫히고 아무도 없었다
사과향은 오래도록 이글거렸다 사과의 문이 열리고 아이들은 남자와 농장과 햇볕과 공기를 자꾸 분석하였다
민들레
노란 머리핀을 꽂은 소녀가
히힛 히힛. 웃는다
곧,
만천하에
애비 없는 자식들이 생산될 것이다
계간 <시와사상> 2006년 봄호
겨울 잠행
새소리 하나 보이지 않는 산길을 걷는다 세상의 고요가 여기에 다 모였을까 정적으로
꽉 찬 숲, 잡목들의 숨소리마저 새어나온다 길은 산꼭대기까지 걸려 있고 어린 나무들
은 누군가 풀어놓은 햇살을 덮고 쿨쿨 늦잠을 자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이불은
저 햇살이다
산의 가슴팍에 열매처럼 매달려 사람들은 말이 없다 추위에 옷섶을 여미다가 담배를
꺼낸다 입산금지라는 붉은 팻말이 섬뜩하다 이미 모든 것을 금지 당한, 산도 사람을 원
하지 않을 때가 있다 지금은 희망도 휴식이 필요한 때
먼저 걸어간 나무들이 만세를 부른다 곳곳에 잠복해 있던 산의 소리가 한꺼번에 올라
온다 환한 소리의 천지 이런 거대한 소리의 숲을 본 적이 없다 그 소리 능선을 타고 달
린다 내 몸으로 다시 도져오는 삶의 핏줄
고등어 파는 사내
저, 소금을 칠까요? 내가 지그시 눈을 감아주자 남자의 눈이 고등어
눈처럼 우울하게 빛났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남자의 손등을 물결
쳐 나갔다.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끔직한 추억이, 집 나간 아내를
향해 고등어 푸른 목을 향해 칼을 내리친다. 어디, 얼마나 잘 사나 두
고…… 남자는 노련한 검객이다. 순간, 고등어 영혼이 바다로 건너가
는 소리를 빗소리가 삼켰을 것이다.
사내는 익숙한 솜씨로 철철, 눈부신 소금을 뿌렸다. 잠깐 동안 메밀
꽃이 피는가 했다. 검은 봉지를 받아들자 사내의 생애가 훅, 풍겨 나
왔다. 바다는 하늘에 떠 있고 빗물은 소금처럼 짜다. 사내와 비 사이
에 서있는 어둠이 무겁다. 우우 어둠의 무게가 버거워 비는 다시 한
번 난전 바닥을 치기 시작한다. 비의 파편을 피해 처마 밑에 어둠처럼
깃든 사람들. 그때, 무기력한 눈을 미안하게 켜는 알전구가 어둠을 지
워가는 시각.
담벼락 속에 집이 있다
그 집은 담벼락 속에 들어가 있다 햇볕이 아무렇게나 흘러 다니는, 담쟁이덩굴이 꽃처럼 피어있는 담벼락을 열어보면 허물어진 집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담벼락 속으로 집이 도망치던 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집의 내력은 보이지 않고 집이 서 있던 자리, 시퍼런 잡초와 썩어 나동그라진 기둥들 서로의 뼈를 만지며 세월을 굴린다
추억은 남아있을까 항아리를 들여다보면 구름이 누렇게 익어가고 세상은 집이 삭아가는 것을 방관한다
벽 속의 집은 봉긋하게 솟아난다 마당을 건너가는 풍금소리 몸을 찢어 잎을 내보내는 나무들 투명하게 널려 있는 빨래들 우물 속으로 곤두박질친 두레박이 집 한 채를 다 씻어내는,
집은 벽 속의 곳간에서 제 나이를 꺼내 먹으며 늙어간다 집은 저 벽을 부수고 나와야한다
페인트공
그의 거주지는 늘 허공이었다 그는 종일 허공의 벽을 타고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허공에서만 전시되었다 지상의 사람들은 그 허공을 정원이라 여기며 그
에게 팽팽한 밧줄을 던졌다 그의 정원은 위작이거나 모작이었다 그의 부리가 닿
을 때마다 꽃들은 있는 힘을 다해 붉어졌다 정원은 완전한 봄이 되었다 지상의
사람들이 완성된 정원을 보고 박수를 쳤다 허공에 태어난 정원은 잎이 지지 않
고 꽃이 시들지 않는 지루한 기쁨으로 가득 찼다 무거운 날개를 열고 그가 잠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이팝나무
땅 구덩이 속에 가마솥 걸어놓고 밥을 짓고 있는 중 이에요
고정관념이 늘 문제였지요
햇살을 끌어들였어요 어디 햇살 뿐 이겠어요
뜨거워진 관절들이 고통의 입김을 토해내더군요
솥뚜껑을 열었지요
모락모락 설익은 밥 냄새를 풍기며 어린잎들이 속속 피어나데요
하늘 아래 놓인 눈부신 한 그릇의 슬픔에 경배했어요
떠도는 새들이여
그리고 불쌍한 삶이여
이리 와서 내가 지은
이 기가 막힌 밥 한 그릇 드시오
현대시학 (2002년 7월호)
밤의 푸른 냉장고
한밤에 얼음사내 웅웅, 흐느낀다. 최대한의 추위가 보관된 저, 얼음몸을 하고서 웅웅, 덩치가 아까운 울음이, 덩치가 아까운 슬픔이, 식구들이 잠든 틈 몰래 흐느낀다. 줄곧 새나오는 울음을 애써 집어넣으려 하지만 서랍 칸칸 저장되어 있던 울음은 본격적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김치 냄새, 고등어 냄새, 가족의 냄새가 뒤섞인 무거운 울음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답답해서 어쩔 줄 모르겠는 병신, 반푼이 같은 울음이 온 집안을 돌아다닌다. 무능한 울음은 심야 TV도 보고 라디오도 듣는다. 어쩔 수 없었어. 최선을 다 했어. 지치고 주름진 울음이 웅웅, 잠을 쏟아낸다. 밤은 가야 할 길처럼 아득히 멀고 깊다. 푸른 밤의 품에 안겨 얼음사내, 모처럼 응석 한번 부려 본다.
여보, 나 사실 그 동안……
<시로 여는 세상> 2005년 가을호
청춘 여관
열 일곱의 머릿결 같은
비의 떨림을 들으며
나는 旅館여관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집에 누웠다
어두운 편지 한 통을 던져두고 내가 도망쳐온
세상에서 가장 먼 집은 여관이었다
어머니를 뒤지고 아버지를 뒤지고 아무리 뒤져도 집은 빈털터리
비는 박음질하듯 신작로를 뛰어가고 있었다
기차와 비둘기와 그림자와 알 수 없는 중얼거림 속에
나는 아무 곳에나 운반되어졌다
내가 제대로 도착할 곳이 없었다
위험한 평화는 계속되었다
세상 바깥을 걷는 듯
독한 방황을 가방 메고
내가 도착한 한 사나흘 여관의 시절
나를 말없이 꼬옥 덮어주던 여관이라는 따뜻한 이불
내 청춘의 바슐라르가 은신하고 있는,
시멘트 바닥을 가슴 치는 비의 현絃이 골목을 돌아나가고
연보라 등꽃의 여관이 비에 젖는다
저 여관이 외로울 때는 누가 안아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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