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이덕규 시모음 본문
1961년 경기 화성 출생.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산맥' 동인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천사의 가슴
곱사등이 한 여자가
세찬 눈보라를 봉긋한 등으로 밀며
뒷걸음질로 걸어간다
마치, 아이를 잃어
퉁퉁 불은 젖으로 칼바람에게
베어물리듯이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육체의 유일한 聖地,
인간의 등이
다름 아닌 천사의 가슴이었다고
따뜻한 젖이 돈다고
길을 잃은
차디찬 조막손이 눈송이들이
그녀의 솟은 등섶을 파고든다
막차
이쯤에서 남은 것이 없으면
반쯤은 성공한 거다,
밤을 새워 어둠 속을 달려온 열차가
막다른 벼랑 끝에 내몰린 짐승처럼
길게 한 번 울부짖고
더운 숨을 몰아쉬는 종착역
긴 나무의자에 몸을 깊숙이 구겨넣고
시린 가슴팍에
잔숨결이나 불어넣고 있는
한 사내의
나머지 실패한 쪽으로 등 돌려 누운 선잠 속에서
꼬깃꼬깃 접은 지폐 한 장이
툭 떨어지고,
그 위로
오늘 날짜 별 내용 없는 조간신문이
조용히 덮이는
다음 역을 묻지 않는
여기서는 그걸 첫차라 부른다
사소한 균열의 끝
얼음이 녹기 시작한
저수지 위를 걷는다 쩌렁 ㅡ 쩡
금이 간다, 이건
늘 있는 사소한 균열이다
초경량급
슬픔조차 견디지 못한
실금 몇 가닥이
네 가슴
한복판에 먼저 가 닿는다
그 긴 울음소리 끝난
네 마음 가장 깊은 근처까지
나도 따라 걸어들어간다
그리고 거기 아주 큰 슬픔의
경계가 녹고 있는
갈수록 넓어지는
너의 싯푸른 중심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문득, 내가 딛고선
발 밑이 맑고 투명해진다
여기쯤이다 .....꺼져라, 슬픔!
청정해역
여자하고 남자하고
바닷가에 나란히 앉아 있다네
하루 종일 아무 짓도 안 하고
물미역 같은
서로의 마음 안쪽을
하염없이 쓰다듬고 있다네
너무 맑아서
바닷속 깊이를 모르는
이곳 연인들은 저렇게
가까이 있는 손을 잡는 데만
평생이 걸린다네
아니네, 함께 앉아
저렇게 수평선만 바라보아도
그 먼 바다에서는
멸치떼 같은 아이들이 태어나
떼지어 떼지어 몰려다닌다네
밥그릇 경전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생각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 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그 경전
꼼곰히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 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오래된 열쇠
어딘가에 달콤한 그 무엇을
깊숙히 숨겨놓은 채
잠궈버리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자,
일벌 한 마리가 분주히
이꽃 저꽃, 봉오리 속을 들락거린다
그러나, 꽃은 단 한 번도
마음의 곳간
활짝 열어주지 않고
너무 쉽게 녹슬어 떨어진다
다시는 잊지 않으리,
온몸에 붉은 쇳가루를 뒤집어쓴 그가
날아왔던 허공길을
다시 훤하게 읽으며 돌아간다
아무것도 잠그지 않은 채
잠겨 있는, 처마 끝에 매달린
저 수많은 벌집 구멍들, 활짝 피었다
객지밥
빈 그릇에 소복이 고봉으로 담아놓으니
꼭 무슨 등불 같네
한밤을 건너기 위해
혼자서 그 흰 별무리들을
어두운 몸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넣는 밤,
누가 또 엎어버렸나
흰 쌀밥의 그늘에 가려 무엇 하나 밝혀내지 못한
억울한 시간의 밥상 같은
창밖, 저 깜깜하게 흉년든 하늘
개다리소반 위에
듬성듬성 흩어져 반짝이는 밥풀들을
허기진 눈빛으로 정신없이 주워 먹다
목 메이는 어둠 속
덩그러니, 불 꺼진 밥그릇 하나
어처구니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밭에 덮어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보고는
갑자기 손끝이 후끈거려서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혀 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또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자결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뒷산을 오르다가
밤새 가만히 서 있었을
가시나무 가시에
이슬 한 방울이
맺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밤새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쿨쿨 잤을,
아직도 잠이 덜 깬
그 가시나무 가시에
맑고 투명한
이슬 한 방울이 매달린 채
바르르 떨고 있었습니다
출처, 야후블로그,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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