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송재학 시모음 2 본문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얼음시집'(문학과지성사, 1988)
'살레시오네 집'(세계사, 1992)
'푸른빛과 싸우다'(문학과지성사, 1994)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민음사, 1997)
'기억들'(세계사, 2001)
'진흙 얼굴'(렌덤하우스중앙, 2005)
제5회 김달진문학상(1994)
'오늘의 시' 동인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水路를 따라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주네
결코 눈뜨지 마라
지금 한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떼 가득 찬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눈뜨면 여느 나비와 다름없이
그는 소리 내지 않고도 운다네
그가 내 얼굴을 만질 때
나는 새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안 보이는 사랑
강물이 하구에서 잠시 머물듯
어떤 눈물은 내 그리움에 얹히는데
너의 눈물을 어디서 찾을까
정향나무와 이마 맞대면
너 웃는 데까지 피돌기가 뛸까
앞이 안 보이는 청맹과니처럼
너의 길은 내가 다시 걸어야 할 길
내 눈동자에 벌써 정향나무 잎이 돋았네
감을 수 없는 눈을 가진 잎새들이
못박이듯 움직이지 않는 나를 점자처럼 만지고
또다른 잎새들 깨우면서 자꾸만 뒤척인다네
나도 너에게 매달린 잎새였는데
나뭇잎만큼 많은 너는
나뭇잎의 不滅을 약속했었지
너가 오는 걸 안 보이는 사랑이 먼저 알고
점점 물소리 높아지네
고요가 바꾼 것
대비사 대웅전 돌 계단 앞에 남풍이 머물면
고요는 돌 계단을 상승이 아니라 하강으로 바꾼다
고요가 붙잡는 정지의 힘!
맞배 지붕의 대웅전이 옥빛 손뼉을 치면서
계단 너머는 팽팽해져 알 수 없는 깊이까지
나는 빛의 속도로 다녀온다
돌 난간에 향기처럼 새겨진 안동초는
꽃피우는 순간의 정지에서 벋어 나왔다
그때 물 소리는 폭우에서 뿜어져 나왔고
물봉선은 모든 씨앗을 바람의 난간에 맡긴다
그때 저녁의 저수지에서 찰랑거리는
종소리는
느림에서 정지 사이의 돋을새김
눈의 무게
느티나무 가지에 앉은 눈의 무게는 나무가 가진 갓맑음이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느티나무가 입은 저 흰 옷이야말로 나무의 영혼이다
밤새 느티나무에 앉은 눈은 저음부를 담당한 악기이다 그때 잠깐 햇빛이 따뜻하다면 도레미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도 보일 게다
풍금
풍금 소리가 유리창을 깬다
그 뜰은 개망초로 덮였다
약한 내 뼈는 굽었고
나는 그늘만 골라 다닌다
슬픔조차 없는 집에 풍금이 울린다
깊은 잠을 기웃거리는 明暗의 건반을 거슬러 가면
아직 어린 내가 있다
거미는 누추한 머리 속과 무덤을 집으로 만든다
빈 방의 영혼마저 불태우는 날들이 지나가고
희게 부서지는 저 햇빛 사이 먼지들이 나의 밥이던 때!
쓸쓸함을 거쳐야만 닿을 수 있는
그 집까지의 발자국 소리를 위해 어둠은 있다
몇 십 년이 지나도 검고 흰 건반은
푸르고 맑은 물소리를 찾아낸다
그 집의 방들은 늘 비어서 나를 기다린다
출처, 간이역에이는시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