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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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시모음 1

휘수 Hwisu 2007. 10. 8. 21:44

1974년 경남 거창

서남대학교 국문과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

현재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재학중

2004년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한다>  문학과지성사

2007년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창비

 

 햇살의 내장이 비치다 
 

 시위대 빠져나간 거리에 톡, 유인물 한 장 발에 차인다
  사방 꽉 찬 도시에
  저리 환한 여백이라니!
  
  그러나 저 여백은 무언가
  들었다 빈 터
  
  오래전, 내가 허문 집의 흔적이
  봄볕을 받고 있다
  
  눈부신 사각마다 기둥을 세워 일생을 살라라던 때가,
  키질하듯
  까만 활자를 허공에 털어낸다
  
  저 바닥을 파내보면, 언젠가
  마른 입에 물려주던 숟가락이, 마음보다 깊게 파던
  놋그릇이
  선지빛 녹을 달고 쏟아 질 것 같다
  두고 온 세간들이
 
  고스란히 소반에 차려져 오를 것만 같다
  
  저 여백 속으로 세상의 모든 집들을
  이사시키고 싶었던 시절,
  
  자주 앓아 환하던 몸이 꼬불꼬불한 마음의 내장을 비
  춰내던 것처럼, 사각으로 쏟아지는 봄은
  
  환하다 햇살의 내장이 다 비친다
 
 시집,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창작과비평, 2007)

 

말의 퇴적층
 

내가 뱉은 말이

바닥에 흥건했다 누구의 귓속으로도

빨려들지 못했다 무언가 지나가면

반죽처럼 갈려져 사방벽에 파문을 새겼다

누구도 내 말을 몸속에 담아가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문을 닫고 사라졌으며

아무도 다시 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빈 방에서 혼잣말을 시작했다

뱉은 말은 바닥에서부터 차올랐고

이내 키를 넘었다 그때부터

나는 걷기를 포기했다 길고 부드러운 혀로

말의 반ㅁ죽 속을 헤엄쳤다 와중에도

쉴새없이 말을 뱉었고 뱉을수록 한가득

된반죽처럼 뻑뻑해졌다

더러 문틈으로 바람이 불고 해가 비쳐

반죽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나는 점점

움직이기 힘들었고 마침내

꼼짝할 수 없었다 말들이 마저

다 마르자 나는

풍문같이 화석이 되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마지막 순간 그 우연한 자세가

영원한 나의 육체였다

몇만년 후 지질학자는

말의 퇴적층에서 혀의 종족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멸망한 시인을 증명할 것이다

 

시집,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창작과비평, 2007)

 

거미줄

 

 아무리 들여다봐도 저 지도를 읽을 수 없다

 

 세월은 잠들면 九天에 가 닿는다

 그 잠을 깨우러 가는 길은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더 많이 향하고
 길 너머를 아는 자 남아 지도를 만든다

 

끌린 듯 멈춰 설 때가 있다
 햇살 사방으로 번져 그 끝이 멀고, 걸음이 엉켜 뿌리가 마르듯 내 몸을 공중에 달아놓을 때
 바람이 그곳에서 통째로 쓰러져도 나는
 그 많은 길들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무지 저 지도를 읽을 수 없다
 작은 것들 날아와 길 잃고 퍼덕일 때, 발이 긴 짐승
 성큼 마지막 길을 가르쳐주는

 

 나는 너무 큰 짐승으로 태어났다

 

저녁에

 

 사선(斜線)으로 떨어지는 저녁, 옆구리에 볕의 장대를 걸치고
 새가 운다

 

 저녁 하늘은, 어둠을 가둔 볕의 철창

 

 저녁 새소리는,

 

 허공에 무수히 매달린 자물통을 따느라

 

 열쇠꾸러미 짤랑대는 소리

 

 저녁 감나무에, 장대높이로 넘어가는 달

 

 

신자들이 찾아가 영혼을 바치는 인도의 베나레스처럼, 그들은 참으로 먼 곳으로 날아가기 전에 이곳에 와서 그들의 뼈를 버리는 것이다......모든 일에는 과학적인 설명이 있기는 하겠지만 물론 우리는 詩 속에 마음을 묻고 태양과 친구가 되고 바다의 목소리를 듣고 자연의 신비를 믿을 수도 있다. 약간은 시인이 되고 약간은 꿈에 젖고......풍경이란 거의 배반하는 법이 없다. 약간은 시인이 되고 약간은 꿈에......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맹 가리 作) 중에서

 

새들의 페루


새의 둥지에는 지붕이 없다
죽지에 부리를 묻고
폭우를 받아내는 고독, 젖었다 마르는 깃털의 고요가 날개를 키웠으리라 그리고


순간은 운명을 업고 온다
도심 복판,
느닷없이 솟구쳐 오르는 검은 봉지들
꽉 물고 놓지 않는
바람의 위턱과 아래턱,
풍치의 자국으로 박힌


공중의 검은 과녁, 중심은 어디에나 열려 있다


둥지를 휘감아도는 회오리
고독이 뿔처럼 여물었으니
하늘을 향한 단 한 번의 일격을 노리는 것
새들이 급소를 찾아 빙빙 돈다


환한 공중의, 캄캄한 숨통을 보여다오! 바람의 어금니를 지나
그곳을 가격할 수 있다면


일생을 사지 잘린 뿔처럼
나아가는 데 바쳐도 좋아라,
그러니 죽음이여
운명을 방생하라


하늘에 등을 대고 잠드는 짐승, 고독은 하늘이 무덤이다, 느닷없는 검은 봉지가 공중에 묘혈을 파듯
그곳에 가기 위하여


새는 지붕을 이지 않는다


현대문학 11월

 

저녁에


斜線으로 떨어지는 저녁, 옆구리에 볕의 장대를 걸치고 새가 운다

저녁 하늘은, 어둠을 가둔 볕의 철창

저녁 새소리는,

허공에 무수히 매달린 자물통을 따느라

열쇠꾸러미 짤랑대는 소리

저녁 감나무에, 장대높이로 넘어가는 달

 

우물

 

학미산 다녀온 뒤 내려놓지 못한 가시 하나가 발목 부근에 우물을 팠다
찌르면 심장까지 닿을 것 같은

 

 사람에겐 어디를 찔러도 닿게 되는 아픔이 있다 사방 돋아난 가시는 그래서 언제나 중심을 향한다

 

 조금만 건드려도 환해지는 아픔이 물컹한 숨을 여기까지 끌고 왔던가 서둘러 혀를 데인 홍단풍처럼 또한 둘레는 꽃잎처럼 붉다

 

 헤집을 때마다 목구멍에 닿는 바닥
 눈 없는 마음이 헤어 못 날 깊이로 자진하는 밤은 문자보다 밝다 발목으로는 설 수 없는 길

 

 별은 아니나 별빛을 삼켰으므로 사람은 아니나 사랑을 가졌으므로
 갈피 없는 산책이 까만 바람에 찔려

 

 死火山  헛된 높이에서 방목되는 햇살 그 투명한 입술이 들이켜는 분화구의 깊이처럼
허술한 세월이 삿된 뼈를 씻는 우물

 

  온몸의 피가 회오리쳐 빨려드는 사방의 중심으로 잠결인 듯 파고드는 봄 얼마간
  내 아픔은 뜨겁던 것들의 목마름에 바쳐져 있다 

 

바람은 개를 기르지 않는다
 

  개 혓바닥이 맑게 닦은 개밥그릇에 햇살이  반짝 제 눈을 달아

놓는다 한 되들이 개밥그릇

 

  마당을 지나간 바람은 백만 되 다시 백만 되

 

  누가 바람의 등에 개 문신을 새겼을까- 너무 많은 눈빛을 어슬

렁거리느라 흘려보냈다

 

  개의 내장처럼 찌그러진 개밥그릇

 

  어제는 종일을 잠만잤고 오늘은 허공을 컹컹  짖는다 오랫동안

구름이 지나가는 바람의 내장처럼

 

  잠잘때마다 몸이 주리고 짖을 때마다 허공이 환하다

 

  누가 바람의 목에 개목걸이를  채웠을까-너무 많은 걸음을 땅

을 파느라심어버렸다

  몸 한쪽을 울 끝에 묶어놓고

 

  햇살을 잘게 빻는 빈 마당으로 서서 사립으로 열린 내장의 처

음과 끝을 바라본다 컹컹

 

  개밥그릇에 반짝이는 허기는 다시 백만 되

 

  개는 바람에 짖지 않지만 바람은 개를 먹이지 않는다 개의 내

장에는 바람 문신


계간 시작 2007년 봄호

 

수렵도

  

 참치횟집 주방장은 왕관보다 높은 모자를 썼다

 누구의 무덤에서 발굴된 풍속인가, 회벽의 그림 속 산

수는 단풍 들지 않고 밤마다 나는 말굽에 쫓겨 산중을

헤매는 꿈에 자주 젖었다

 

 액자 속 장생하는 고대 왕의 어깨보다 천 년을 도망하

는 짐승의 눈빛을 나는 더 많이 보았던 것이다

 

 세상의 왕은 빗물처럼 사라졌으나,

 모든 화살은 박물관으로 날아가고 초원의 말은 경마

장을 달리고 있으나 왕의 옆구리, 칼날만은 남아 지금

도마 위를 걷고 있다

 

 도마 위의 발자국, 저 발겨진 살점들이 지난밤 내 꿈

의 흔적이다

식탁이여, 경건한 백색 조명 아래 널브러진 시신의 걸

음 가지런히 목구멍의 장지로 보내는 주방장의 모자도

희지만

 

 강원도 깊은 덕장에서 하늘의 목 축여주며 입 벌려 마

지막 고함 산천에 뿌리고 싶지 않은 생이 있던가, 저

도막 난 근육들이

 주름진 내장을 헤엄쳐 오늘 밤 내 꿈의 산중에 가닿을지

도 모른다

 

 왕의 말굽이 도마 위를 질주하는 참치횟집, 무너진 시

대를 품고 있어도 무너지지 않는 회벽 반대편은 지금 빗

물이 타흐를것이다

 그 등허리로 수묵처럼 섞이는 어둠

 

누군가 피 흘리고 섰으니 아직 수렵은 끝나지 않겠다

 

사과 고르는 밤

 

희디흰 손으로

사과를 고르는 여자 오늘 밤

아이를 가지리

사과 속살같은 애가 서리

 

청과물상회 앞에 놓인 과일들을

백열등 흰 깃털이 내려와 품어주고 있다

품어 늦도록 부화하고 있다

 

벽에 세워진 리어카 허연

배를 드러내고

헛되이 돌려보는 바퀴처럼

 

겨울밤 언뜻 눈에 들어온 청과물상회 앞에

그만그만한 무게로 놓여 있다

 

제 몸으로 무덤을 삼는 영혼들이

무덤을 껴입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한다(문학과지성사 2004)


산수유꽃 

 

 데인 자리가 아물지 않는다
 시간이 저를 바람 속으로 돌려보내기 전 가끔은 돌이켜 아픈 자국 하나 남기고 가는 저 뜨거움 물집은 몸에 가둔 시간임을 안다

 마당귀에 산수유꽃이 피는 철도 독감이 잦아 옆구리에 화덕을 끼고 자다 나는 停年이 되어 버렸다

 노비의 뜰에나 심었을 산수유나무
 면도날을 씹는 봄햇살에 걸려 잔 물집 노랗게 잡힐 적은 일없이 마루턱에 앉아 동통을 앓고 文書처럼 서러운 기억이 많다

 한 뜨거움의 대를 유배시키기 위해 몸을 키우는 물집 그 수맥을 짚고 산수유가 익는다고 비천하여 나는 어깨의 경사로 비탈을 만들고 물 흐르는 소리를 기다리다 늙는 것이다

 시간의 문장은 흉터이다 둑 위에서 묵은 편지를 태웠던 날은 귀에 걸려 찢어진 고무신처럼 질질 끌려 다녔다 날아간 연기가 남은 재보다 무거웠던가

 사는 일은 산수유꽃빛만큼 아득했으며

 나는 천한 만큼 흉터를 늘리며 왔고 데인 데마다 산수유 한 그루씩이 자랐다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문학과지성사 2004)

 

버드나무 어장


   버드나무 잎 속에는 지느러미 잔금 같은 잎맥들이 있

어 들머리 버드나무 휜 가지마다 물고기떼가 마을을 달

고 헤엄을 쳤다


   머리를 치받으며 차르르르 바람의 상류로 거슬러 올

랐다


   여름내 나는 얕은 물가를 첨벙이듯 버드나무 검은 둥

치가 찔러놓은 허공의 깊이로 툭툭, 약시의 시선을 엮어

그물을 던졌다


   햇살을 뒤집어 물결을 치는 푸른 비늘을 쫓아가면
   바람의 발원에 닿을 수 있으리라 거기, 알을 심고 생을
  

누인다는 물고기처럼 그러나

  
   성긴 어망의 몸 가을 속으로 내렸을 때

   버드나무 그늘은 회초리자국 몇으로 빈 투망을 후려치

고 있었다 축축한 노을만 가득 담은,


   내 수확은 외진 골목마다 서걱이는 울음 몇 장을 얻었

다 지느러밀 잃고서야 울음주머니 하나 찰 수 있는 개구

리처럼


   어귀의 수면마다 배 뒤집고 누운 잎사귀들 하나같이

제가 헤엄치던 허공의 깊이를 붉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

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 회초릿소리로 갈라지는 바람 한 떼

 

시집,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창비 2007

 

붉새

 

   함양 상림 떡갈나무숲을 지나며 바람이 머리를 땋는 것을 보았다 누구나 처녀였던 것처럼, 어느 처음엔 한 덩어리였을 바람 강물이 교각 사이를 지나며 물결을 얻듯 바람은 나무 사이를 지나며 결을 얻는다 서 있는 것들에 찢겨져 얻게 되는 무늬, 오래 거쳐온 것일수록 가늘게 갖는 결을 나는 늙은 여자의 몸속에서 만났다 붉은 속살이 열어놓은 일몰의 깊이로 빳빳한 허기를 세워 밀어넣었다 세월의 조각도가 새기는 어둠마다 나날이 첫 피가 비쳤으니 훗날, 어느 저녁의 갈피가 나를 탁본해낼 것인가 지나간 것들이 모른 듯 긋고 간 만큼씩의 상처를 강물이 교각 둘레에 물이끼를 치듯 서 있는 것들도 제 속에 주름으로 새기는 데 시간의 갈비뼈에 꽂힌 여자여, 먼 함양 상림이 너절한 치마폭을 펼치는 저녁, 한 그릇 세발 바람을 비벼먹는 어둠의 혓바닥 처음처럼 붉어

 

시집,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창비 2007

 

지하철의 노인

 

일생을 눈감고 살아 온 사람이

내 앞을 지나간다

그 지팡이 위태로워

잡아주고 싶지만

이미 더는 내려가지 않을만큼

단단하게 바닥에 닿아있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고 싶어

안으로 깊어졌을

눈, 작은 몸 어디에서 녹아

풍금소리를 만드는지

그가 지날 때마다 노랫소리 떨어져

지팡이가 눌러놓은 자리를 동그랗게 메우고 있었다

계단을 오를 때나

구릉을 지날 때도

나는 발끝을 보지 않았다

가야 할 곳은 언제나 멀리있어

내 속에 노래를 키우지 못했다

폭 크게 서둘던 내 걸음 잠시

찬송가 밑에 세워둘 때

앞발의 뒤꿈치가

뒷발의 앞코를 넘지않으며

나아가는 풍금의 건반이 희다

문득, 세상의 빛이 사라져

모두가 비명을 쏟으며 발을 섞어도

노인은 홀로 유유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면서

노인이 지나간다

사람들은 비명을 안고 잠들어 있다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한다 (2004 문학과지성사)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나는 천 년을 묵었다 그러나 여우의 아홉 꼬리도 이무

기의 검은 날개도 달지 못했다

   천년의 혀는 돌이 되었다 그러므로

   

   塔을 말하는 일은 塔을 세우는 일보다 딱딱하다

 

   다만 돌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비린 지느러미가 캄캄한 탑신을 돌아 젖은 아가미 치통

처럼 끔뻑일 때

 

   숨은 별밭을 지나며 바람은 묵은 이빨을 쏟아내린다

잠시 구름을 입었다 벗은 것처럼

   허공의 연못인 塔의 골짜기

 

   대가 자랐다 바람의 이빨 자국이다

   새가 앉았다 바람의 이빨 자국이다

 

   천 년은 가지 않고 묵는 것이니 옛 명부전 해 비치는 초

석 이마가 물속인 듯 어른거릴 때

   목탁의 둥근 입질로 저무는 저녁을

 

   한 번의 부름으로 어둡고 싶었으나

   중의 목청은 남지 않았다 염불은 돌의 어장에 뿌려지

는 유일한 사료이므로

 

   치통 속에는 물을 잃은 물고기가 파닥인다

 

   허공을 쳐 연못을 판 塔의 골짜기

   나는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에 물려 있다 천 년의 꼬

리로 휘어지고 천 년의 날개로 무너진다

 

오래 닫아둔 창

방도 때로는 무덤이어서 사람이 들어가 세월을 죽여 미라를 만든다
골목을 세워 혼자 누운 방
아침 해가 건너편 벽에 창문만 한 포스터를 붙여놓았다 환한 저 사각의 무늬를 건너
세상을 안내하겠다는 것인가 아이들 뛰는 소리 웃음 소리 아득히 노는 소리 그러나
오로지 그녀를 통과하면서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녀의 몸에 남은 지문에 검거되어 영원한 유배지에서 다시 부모가 되어야 한다
몇 번의 바람이 문을 두드리고 지나갔지만
햇살이 방바닥을 타고 다시 창을 빠져나갈 때까지,나는 일어나질 못했다
언제나 건널 수 없는 곳으로 열려 있는 추억처럼
어떠한 발굴도 뒤늦은 일인 것을
낮에 뜨는 흰 달이 모든 무덤을 지고 망각을 향해 건너가는 캄캄한 세상의 내부에서
언제쯤 내가 만든 미라가 발견될지 모른다
창문 너머 불타는 가을 산,
그 계곡과 계곡 사이에 솥을 걸고 싶다 바람의 솥 안에 눈송이처럼 그득한 밥을 나의 잠은 다 비우리라

 

갈대 등본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깊은 날은 갔다 모든 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구름 그림자


태양이 밤낮 없이 작열한다 해도
바닥이 없으면 생기지 않았을 그림자

 

초봄 비린 구름이 우금치 한낮을 훑어간다

 

가죽을 얻지 못해 몸이 자유로운 저 구름

몸을 얻지 못해 영혼이 자유로운 그림자

 

해방을 포기한 시대의 쓸쓸한 밥때가

 

사랑을 포기한 사람의 눈으로 들어온다

 

중심을 쏘다

 

사수가 한쪽 눈을 감는 것은 과녁을 떠나는 그 영혼을 보지 않기 위해서다

 

어떤 형벌이 사수의 눈동자 속에
과녁의 동심원을 그렸을까

 

한 입 어둠을 씹어먹는 허공의 아득한 중심에서

 

정확히 자신의 죽음을 겨누어 떨어지는, 빗방울
우산은 방패가 아니었다

 

바람 불 때마다 영혼의 부력으로 뒤집히는 중심의 테두리 그 팽팽한 시간
위에서

 

빗물이 명중의 제 몸 잠시 허공에 흩어 놓을 때

 

한 발의 생이 안개처럼 피어 오른다 - 그리하여 저편
영혼으로 과녁을 치는 무지개,

 

중심을 산 너머에 숨겼으므로
검은  부리로 넘어가는 새가 있다 구름 사이로

 

누구를 겨누어 저 달은 오늘도, 눈꺼풀을 내려 초점을 잡는 것일까 한쪽
눈을 감을 때마다 보이는

 

둥글게 갇힌 자신의 영혼 그리고
영원히 외눈인 해와 달

 

사수는 두 개의 과녁을 노리지 않는다

                    

시작, 2007 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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