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손세실리아 시모음 본문
2001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기차를 놓치다> 2006년 애지
얼음 호수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 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 없다 요지부동이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
중간중간 위태롭기도
했다
여기 이르는 동안 단 한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封해 본 적 있던가
한 사나흘 죽어본 적
있던가
없다,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
말복
퇴화된 날갯죽지가
축 처져 녹아 내리는 냉동 닭을 손질한다
움츠린 허벅지 사이
말끔히 지워져 버린 수태의 흔적
저 아득함이라니
지상의 어떤 양식으로도
결코 메워지지 않는 썰물이다, 공터다
한 존재를 내려놓고 통과해낸
지난 세월이 저러했던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아
그리도 깊고 오랜 절망으로 휘청거렸던가
해체된 닭을 들여다 보다
기억의 허방에 잠시 발을 헛딛고 만다
가혹한 쓸쓸함이다
압점
옥돌 몽돌 차돌 뿐 아니라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자갈을 콘크리트에 꼿꼿이 박아놓고 맨발로 걸으란다 고장난 오장육부의 막힌 혈을 뚫으려면 어지간한 고통쯤은 참아낼 줄도 알아야 한단다 옹이 박힌 발바닥 내딛는 부위마다 비명이다 그새 또 병이 깊어진 게다 자갈의 둥근 이마를 짚고 맨발마당을 한 바퀴 돌아나오는 동안 발바닥 신경분포도 옆 공용신발장에서는 밑창 닳고 뒤축 꺾인 신발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등 돌려 서있다 어느 한 군데 성한 곳 없는 생의 환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듯 정면으로는 차마 쳐다보지 못하겠다는 듯
'다람쥐 쳇바퀴 돌린다'는 말
대낮엔 톱밥 속에 파묻혀 꼼짝도 않던 햄스터란 놈이 자정만 넘으면 새장만한 집 쇠살에 거꾸로 매달려 기어다니다 낙상하기도 하고 동틀 무렵까지 플라스틱 쳇바퀴를 하염없이 돌리기도 한다 처음엔 신기하고 귀엽더니만 닷새쯤 지나자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영민한 생김과는 달리 무망(無望)한 헛발질로 밤새 소란 떠는 꼴이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어슴새벽, 덜컹거리는 소요에 잠이 깼다 세상에! 바퀴 살과 살 사이 촘촘한 틈새로 봉숭아 떡잎보다 쪼끄만 발이 푹푹 빠지고 있는 게 아닌가 빠진 한쪽 발은 잽싸게 빼내 회전하는 살을 붙잡고 수습된 나머지 발은 다시 허공 향해 내딛는 거침없는 질주를 지켜보다 그만 숙연해지고 만다 돌아보면 숨통 조여오는 사방 쇠창살뿐인 섬뜩한 집,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린 길, 시시각각 숨 조여오는 감옥 같은 폐쇄된 창살의 기억을 말끔히 지워 버려야만 비로소 그 안에 숲길이 열리고 알곡 그득한 먹이 곳간이 놓이게 됨을 알아차린 것일까 밤새 무모한 발길질로 날마다 새 길을 열어 가는 저 것들
허투루 흘려듣던 '다람쥐 쳇바퀴 돌린다'는 말
지워지고 끊어진 길을 잇는 구도의 출구가 그리로 나있을
줄이야
곰소댁
고등어 배 갈라 속 긁어내는데
단 몇 초도 안걸린다는 곰소댁,
낭창거리는 칼날이
그 여자 잰 칼질의 이력이라는데
뱃놈 시절엔 계집질로 뭉칫돈 탕진하고
말년엔 노가다 십장질로 알탕갈탕 번 돈
노름방에 홀랑 갖다 바친 서방 덕에
새새틈틈 갈라 터진 손으로
등 푸른 어육의 배를 째고
물컹한 내장 그악스레 훍는다는
수협공판장 일용직 잡부
곰소댁
하루도 잘 날 없는 멍꽃에
신신파스 도배하듯 붙이며
"조강지처는 맷구럭, 첩은 좆구럭"
구시렁거리다 재차 쥐어
박힌다는
그 넋두리엔 소금기만 간간하다는데
빈속에 해장이라도 한 잔 걸칠 양이면
야속함도 탓함도 싹 잊어버리고
침발라 헤아린 일당 단단히 챙겨
집으로 직행한다는
맹하고 선한 곰소댁
휘어진 등, 곱은 손!
그대, 변산에 가시거든
거죽 얄팍한 산 눈에 들면
우측 갓길에 차를 세우시라
산 허물어지고 물길 끊어진
저기, 해창석산
저기,
해창갯벌
곁가지 본가지 뒤틀려
생목숨 정수리에 이고 지고
갯바닥에 맨발로 시리게 서
있는
못생긴 소나무 밤나무를
무심히 장승이라
싸잡아 갯것이라
괜히 객지 사람 티내지 말고
이 참에 이름 한번
불러보자
짱둥어야 생합아 농게야
집 나간 누이 부르듯 애타게
농쟁이야 댕기물떼새야
돌 지난 조카 부르듯
살갑게
찰진 영토 빼앗아 둑 쌓고 길 넓힌 죄가
이름 한 번 부른다고 다 용서될까마는
듣거나 말거나
불러주자
외사랑하듯 불러주자
부르다보면 정도 붙고
정들면 뒤엉켜 살고도 싶어지느니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