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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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 시모음

휘수 Hwisu 2006. 6. 26. 15:09

1968년 충남 서산출
중앙대학교 문창과 졸업
200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악어> 2005년 실천문학사


 악어 


  지하철 문에 한 여자의 가방이 물려 있다 강을 건너다 잡힌 새끼 누 같다 겁에 질린 가방은 필사적으로 뒤척이지만 단단한 하악(下顎)*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더 깊은 질식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언제가 나도 저 강을 건너다 어깨 부위를 물린 적이 있다 깊은 흉터가 있다 예측할 수 없는 저 입은 어미와 새끼를 갈라놓고 동료를 애인을 갈라놓기도 한다 새끼를 따라 시골에서 올라 온 한 늙은 어미가 혼자 입안에 갇혀 공포에 가까운 눈으로 문을 두드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밖에선 새끼가 떠내려가는 제 늙은 어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매정한 입은 몇 정거장을 지나쳐도 열리지 않고 숨이 잦아든 여자는 멍하니 제 깊은 상처, 물린 가방을 지켜보고 있다 반대편으론 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닫히는 입을 피해 강으로 뛰어들고 다시 재빨리 뛰어나가고 있다 또 한사람이 센 물살에 떠밀려 팔 한쪽이 물렸다 용케 빼낸다 살아난다 이 乾期의 땅, 유유히 강은 흐른다

 

* 하악 - 아래턱

 
즐거운 소음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건물 전체가 울린다.
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
그 틈, 못에 거울 하나가 내걸린다면
봐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저 한밤중의 소음을
나는 웃으면서 참는다.

 
나팔꽃과 개미 


나팔꽃을 들여다보니 그 속
개미 서너 마리가 들어있다
하느님은 가장 작은 너희들에게 나팔꽃을 불게 하시니


나팔꽃은 천천히 하늘로 기어오르고
하루하루의 푸른 넝쿨줄기,
개미의 걸음을 따라가면
나팔꽃의 환한 목젖
그 너머


개미는 어깨에 저보다 큰 나팔꽃을 둘러메고
둥둥, 하늘 북소리를 따라
입 안 가득 채운 입김을 꽃속에 불어넣으니
아, 이 아침은 온통 강림하는
보랏빛 나팔소리와 함께

 

밥그릇

 
밥하던 아내가
포개진 밥그릇이 빠지지 않아
나에게 들고 왔다

 

그릇이 그릇을 품고 있다
내 안에 있는 당신의 아픔
당최, 힘주어 당겨도 꼼짝하지 않는다
물기에 젖어 안으로 깊어진 마음
오늘은 저리 꼭 맞았나 보다
 

한 번쯤 나는 등 뒤에서 너를 안아보고 싶었네


선반 위,
씻긴 두 개의 밥그릇이
봉분처럼 나란하다


이, 도둑놈의 꽃아

 

여름이 지나자 봉숭아 줄기 밑
큼지막한 자루가 생겼다
어느 집 젊은 과부라도 보쌈한 듯
온통 안주머니가 불알처럼 탱탱하다
자루를 움켜쥔 손목에 힘이 들어가 있다
그 불알 같기도 하고 젖통 같기도 한
주머니를 살짝 손으로 건드리니
에그머니나, 그 속에 몸이 단 과부 대신
검은 씨앗들이 튕겨졌다

 

다음해 여름, 키 낮은 담 밑에는
유난히 눈동자가 검은 처녀들이
한나절 담 밑에 턱을 고인 채
긴 치맛말기를 씹으며 첫사랑을 기다렸다
그 손톱이, 마음이 산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오줌을 누던 나는 얼른 바지 속에 나를 숨겼다
마음이 간단없이 울렁거렸다
봉숭아는 그 여름 내내 시집도 안 간
처녀들만 골라서 보쌈을 했구나
에이구, 이 도둑놈의 꽃아!
내 사랑을 다오
슬쩍 다가가 자루 주머니 하나를
툭, 터뜨린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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