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로 살아가는 법 90 가지 2 / 자크린느 클랭 본문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로 살아가는 법 90 가지 2
연인과 친구 사이
남녀간의 우정을 구체화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강요된 행동
을 원하는 오랜 유산을 갖고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한 여성과 단둘이 만찬을 나
누는 남성은 보통 딴 생각을 하게 되어 있고, 만약 그가 아무 제안도 하지 않는
다면 체면을 잃게 될 것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것은 한 개인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해도, 남녀가 단둘이 있
게 될 때 은연중에 강요당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녀간의 우정 관계가 모호하고, 의심스럽게, 게다가 온전
히 실망스러운 것 같다고 말합니다. 더구나 각자 부부 관계를 맺고 있거나 사랑
의 관계를 갖고 있다면 더욱 어려운 것처럼 느껴지는 모양입니다.
기욤은 39세의 광고인입니다. 그는 자신을 욕망의 남자로 규정했습니다. 하지
만 욕망이 지배하는 사랑에 관해 말함으로써, 그는 스스로를 속이는 셈입니다.
욕망은 빈번하지만 일시적인 것이고, 사랑은 훨씬 더 진귀하지만 엄숙한 것이거
든요. 그에게는 남녀간의 우정이 "이미 그들이 성관계를 나눈 경우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정은 서로 인정하고 책임을 지게 되는 욕구 이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순
수하게 지적인 관계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감수성의 만남이요. 친화력과 감동으
로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나는 일이나 여행, 외출 등을 내가 원하지 않
는 여자와는 구상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37세의 독신녀인 마리옹은 연인과 친구 사이에서 불안스럽게 짝이 없는 상태
로 미묘한 동등성을 추구하려 한 것 같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있어 우정은 언제나 애정이 담긴 관계예요. 내 또래의 유부남과 나는
우정 관계를 유지하면서 육감적인 관계로 갖고 있지요. 우리는 서로 껴안고, 애
무하고, 비벼대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건 장난 삼아 하는 연애가 아니에요. 그렇
게 해야 상대를 발견하고 탐색할 수 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문제에 들
어가는 것도 아니고, 각기 다른 두 개인간의 관계에 대한 육감적인 면을 생각하
지 않는 것도 아니지요. 육체적인 친화력을 갖지만 성관계는 아닌, 이 내밀한 관
계는 우리 사이의 대화를 더 쉽고 자유롭게 해주거든요. 난 그 남자를 보는 쾌락
과 기쁨이 있어요. 하지만 일상에서 그와의 계속된 관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
은 없어요. 그래서 우리 관계는 거북하지가 않지요. 서로 독립적이니까요. 하지만
가끔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하죠. '어쩌면 나는 행위로 옮겨지는 욕구를 두려워하
는 건 아닐까? 사랑의 결과로 표현하는 약속에 대해 두려워하는 건 아닐까? 하
고요.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우정은 나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약속은 아니
에요."
그렇다면 남녀간의 모든 우정에는 사랑이 담긴 우정, 위험한 유희, 매혹적으로
일시 정지되었거나 지체되는 욕구가 담겨 있는 게 아닐까요? 나타샤는 연인도
아니었고 연인이 되지도 못했던 한 남자의 동료로, 관능적 욕구의 순간들을 기억
합니다.
"아! 우정과 사랑이 담긴 감정 사이의 국경이었을까요? 나는 줄리앙을 상냥하
고 신선한 감정으로 사랑했어요. 니콜라는 우리의 친구고요. 우리는 수년간 저녁
시간, 주말, 휴가 등을 함께 보냈어요. 나는 니콜라를 만나는 것이 즐거웠고, 그
와 이야기하며 다정하게 지내는 것이 기뻤어요. 하지만 우리 관계에는 다른 뭔가
가 더 있었어요. 웃음, 유머, 정중함, 수많은 세련된 것들이 우리들 주위에서 도
깨비불처럼 춤을 추었어요. ...타는 듯한 어느 여름날이었지요. 우리 세 사람은 이
탈리아에 있게 되었어요. 그때 줄리앙은 밀라노에서 사업상 약속이 있었지요. 니
콜라와 나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샤르퇴즈 드 파비를 방문하려 했어요. 좁은 침
대가 있는 수사의 독방에는 각각 엄숙하지만 조밀한 분위기의 벽에 십자가가 있
고, 돌마다 빛의 얼룩들이 스며 있었지요. 꿀과 왁스칠된 목재 냄새, 부동의 대기
에 울리는 시계소리들, 그 모든 것들이 무의식 속의 잊을 수 없는, 그리고 우리
가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랑의 몸짓보다 더 강렬하게, 표현할 수 없는 뭔가에 집
중돼 있었어요."
우정과 사랑의 경계
우리는 이제 우정의 감정으로부터 사랑이 담긴 감정을 분리하게 되는 미세한
경계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남녀간의 성관계는 경계선을 굳
건히 하는 것으로 끝나게 될까요?
내가 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우정과 사랑의 경계에서
남성들의 체험을 확인하는 것이 더 까다롭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남녀간의 우정에서 남성은 성욕과 자신의 본질적인 욕구에 대한 확인, 그리고
그것의 구체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런 점에 대해 남성의 관심이 여성보다 더하
다면, 우정은 그 남성에게는 일종의 재갈이며 장애물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그래
서 많은 남성들에게 있어서 상대를 안다는것은 거의가 필연적으로 관능적인 지
식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남녀간의 우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성의 공유입니다. 마치 남성들이 보
다 더 깨끗하고 평화스러운 방향으로 관계를 진행하기 위해 꽤나 거추장스러운
욕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그들은 성적 대상과의 진정한 우정을 추구합니
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습니다.
남성들 대부분은 상대방에게 말 또는 고백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애
정을 육체 관계를 통해 보여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성들 대부분에게 성관계는
애정이나 내밀한 관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반면 여성들에는 서로 공유된 내밀한
관계와 감정이 성적 교환에 이르게 됩니다.
장 크리스토프는 남녀간의 성관계와 우정의 성립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남녀는 친구 사이에서 사랑에 빠질 수도 있고, 단순히 우정에 구애됨이 없이
육체적으로 만날수도 있지요. 하지만 상호간의 우정과 신뢰가 현실적이라면 한때
의 사랑이 우정으로 변할 수도 있고, 육체적인 만남을 가질 수도 있으며, 서로를
더 잘 알게 하며, 어쩌면 서로 이해하게 해주는 공유된 쾌락을 맛볼 수도 있지
요."
이런 유형의 변화 있는 관계는 불편이나 어리석음, 고통을 이끌어내지 않으면
서도 애정 관계의 이점(육감적인, 성적인)들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인지할
수 있고, 명철하게 그것을 책임지거나 그 욕망을 능가할 수 있습니다.
37세의 사진사인 스테판은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존재에 매우 민감합니다. 하
지만 자주 유혹에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욕구는 소유욕이죠. 그래서 난 주의를 합니다. 나에게는 남녀간의 우정이 아
주 어려워요. 왜냐하면 욕구를 단념하든지, 아니면 그 욕구를 변형시켜야만 하니
까요."
소르본느 대학의 교수인 자닌 상퇴르는 '전쟁에서 평화로' 등의 저자이며, 어머
니이자 할머니이기도 합니다. 풍부한 인생 경험을 가진 그녀는 남녀간의 우정에
서 생겨나는 미묘한 관계를 밝혀줍니다.
"우정은 의무와 포기를 전제로 해요. 그 구성요소들은 공통의 관심사이고요.
이를테면 상대 또는 자신에게 편협성을 갖지 않도록 해주는 무사무욕이라고나
할까요? 진정한 우정은 상대에게 자유를 줍니다. 상대에 대한 근본적인 동의지
요. 우정은 농락자는 아닙니다. 욕구의 만족에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소유욕이
적은 애정에서 표출되는 우정이니까요. 그래서 남녀간의 우정은 일종의 도전을
유발합니다. 그것은 욕구의 소멸이 아니라 우정의 욕구가 자리매김되는 것이지
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욕구의 범람과 표류로 인해, 남녀간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죠."
육체에 열중하는 사랑
남녀간의 욕구를 술책으로 숨길 수는 없습니다. 그건 이 세상이 생겨난 태초의
시기부터 생겨난 이야기입니다.
최초의 인간 세상을 낳게 한 자의 이름은 '이브'라고도 하고 '뱀'이라고도 하며,
'유혹자'라고도 합니다. 그저 응낙하는 데 만족한 착한 아담을 제외하고는, 모든
다른 사람들이 그 당사자인 셈이죠. 요컨대 밤에도 남성은 이 문제를 그다지 깊
이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는 욕망을 지배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좀더 잘 알려고
하는 대신, 욕망에 이끌리는 것을 더 즐겼던 것입니다.
니체는 우정과 욕망의 문제를 이렇게 간주했습니다. "여성들은 남자와 우정을
아주 잘 연결지을 수 있다. 하지만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육체적인
사소한 부조화와의 경쟁이 필요할 것이다"라고 . 달리 말하면 여성은 자신이 전
혀 원하지 않는 남성들하고만 친구일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에게서 바랄 것이
조금도 없을 테니까요.
즐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여성은 성적인 대상이 아니면서도 유혹하는
내기놀음을 하기도 하고, 요컨대 그를 거부하면서도 남성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광적인 놀음을 합니다. 무엇 때문에 타락하고, 무엇 때문에 우정을 승무원 화물
과 함께 침물시키게 하는 걸까요... .
나는 아주 지적이고 교양 있는 한 남자와의 관계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와의 관계를 그만두게 되었습니
다. 왜냐하면, 어느 날 저녁 아주 유쾌하게 저녁을 먹고 나자 그와 함께 있다는
것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마지막 축배를 들러 올라가는'
것을 제의했지만 나는 허락하지 않았지요. 그에게서 어떠한 욕구도 느낄 수 없었
거든요. 그는 화가 나서 가버렸지요.
그후 그는 전화하는 일도 뜸해지더군요. 그러고는 내가 동성연애를 한다는 소
문을 돌게 함으로써 앙갚음을 했던 것입니다. 거부당한 남자의 욕구, 그 승낙할
수 없는 일을 승낙하게 하려던 그는 스스로 우롱당했다고 생각한 걸까요?
나체의 가설을 넘어, 이성간의 교류를 악화시키는 음흉하고 완고한 욕구를 전
적으로 반대하거나 무기력하게 만드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부한
일에 의해 그 욕구를 무미건조하게 하여 중화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흔히 '사랑하는 친구'라는 표현으로 지칭하는 진부함, 넌지시 돌려 말하지 않고
우연한 동반자가 있어야 할 필요성과 교묘함의 단계를 지칭하는 진부함이 있습
니다. 두 개체는 여행을 떠날때부터 일 때문에 또는 저녁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서
로 만납니다. 그리고 진정한 욕구가 없으면서도 같은 침대에서 동침합니다. 어쨌
든 한 남성과 한 여성이니까요. 쌍방이 얼마나 포기하려고 노력했을까요! 이 욕
구는 우정의 가장 작은 단편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첫 만
남을 초월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도 우정도, 상대로부터 환심을 사려는 마음과 무관심을 방해하지는 않습니
다. 그러나 욕구와 열정은 광기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정은 도전에 응하고, 위험
을 자초하도록 인도합니다. 하지만 이 두가지 경험을 통해 여성들은 본래의 모습
을 되찾게 됩니다.
만약 사랑의 관계나 우정의 관계가 심오하고 신실하게 존재한다면, 상대들 각
각은 그로 인해 변하게 됩니다. 상처를 입고 문제를 제기하거나, 변형되거나 쇄
신되든지 간에 말입니다. '사랑하는 친구'에 의해 욕구와 우정을 동시에 중화시킨
다면, 그들의 사랑은 상대의 몸에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작은 개인의 안전
성에 열중하는 평범한 개인임을 알려줍니다. 이는 해방의 온전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남녀 사이에 이러한 관계가 실패하게 되면 서둘러서 잊으려 하게 됩니
다. 거기에는 강렬한 욕구나 사랑도 없고, 우정과 존경도 없습니다. 단지 슬픈 위
선, 보람 없는 겉치레, 아주 평범한 관계만이 있습니다.
탐험되지 않는 대륙
남녀간의 우정에서는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본능적인 욕구들을 자유롭게 단
념하도록 동의하는 측면을 볼 수 있습니다. 우정은 욕구의 둘레를 감싸고 있지
만, 각자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서로 존중하는 태도에 의해 그것들을 능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록 배척되는 감정이라 할지라도 성관계는 언제나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정은 욕구를 매정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욕구를 지배하고 변형시키며,
창의적으로 만듭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많은 구상과 예술적인 실현을 이루었
다는 점을 자주 주목합니다. 우정은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사생활로부터의 도피는
결코 아니지만, 성적인 본능 또는 초월적인 사랑의 본능에 의해 자유로워지는 강
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친구라는 존재는 너무 작고 못생기고 나이가 많고, 때로는 짐승 같아서 아주
작은 사랑의 가능성도 허용되지 못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세련되고, 센스가 있고, 바라보기에 유쾌하고, 분명히 욕구를 느낄 만한 사람을
뜻하지요. 이것은 분명 사랑의 선택보다 더 중요하고 진귀한 것입니다.
35세의 필립은 남녀간의 우정이 지속적인 새로움의 형태로 표출된다고 말합니
다.
"남녀간의 우정은 일상의 속박에서 빼앗긴 독창성을 되찾는 상징으로 자리합
니다. 마찬가지로 그 우정은 도덕성의 경계를 가볍게 스치고, 그 관찰자들의 상
상력을 자극합니다. 이 관계의 힘은 인간의 특성과 인간성에 대한 탐험되지 않은
공간을 탐색하는 모험가, 개척자 등으로 정의되어야 할 두 파트너의 능력을 측량
하게 됩니다."
우정 안에서는 언제나 상대의 육체가 완전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육체는 욕망
의 대상이 아니라 명상의 주체가 되며, 그것은 아름답고 유쾌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 육체가 나의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는 아름다움을 호흡하고, 그 아름다움을 퍼뜨립니다.
남녀간의 우정은 보통 정신적인 사랑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정은 육
체적인 매력이나 육체적인 관계보다 정신의 일치를 더 높게 자리매김하고 있으
니까요. 또 우정은 남녀 사이에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관계에 대한 이상적인 모델
을 희미하게 나마 보여주게 됩니다. 때로는 순간적인 우연성에 복종하기도 하고,
이와 결부된 필연적인 우수의 영원성, 절대성, 신이 내려주는 풍요로운 축복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욕구로부터의 자유
우정은 우연의 열매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특별히 인간적이어서 신과 삶의 법
칙을 무시하는 피조물일까요?
나는 우정의 세계를 생각하고 그것을 찬양하는 데 마음이 끌립니다. 우정은 운
명과 본능, 각 종류의 법칙들에 직면하여 우리 인간의 자유를 만들어냅니다. 그
래서 마치 인간성의 담보물이며, 어쩌면 신성에 대한 불복종과 오만함, 그리고
'신들에 대한 불손한 태도'처럼 보입니다.
최근의 꿈 속에서 나는 우정에 관한 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신은 우정을 구원
하지만 우정을 만들지는 않는다."라는 구절이었지요. 이 내용은 아름답긴 하지만
풀어야 할 수수께끼처럼 느껴집니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즉 우정은 발생론
적인 법칙, 생식본능을 단절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정은 상대
방을 형체로 나타내주긴 하지만, 그 상대는 신의 계획과 인생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욕구, 열정, 낭만적인 사랑, 성욕, 결혼 등은 본능적으로 종족번식의 법
칙에 따르는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정-특히 남녀간의 우정-은
육체의 접촉과 육체의 결함을 추구하는 동성애보다 더 강하고 더 섬세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건없이 두 이성을 결합시킵니다. 또한 그들을 자유롭게하고 육체적
인 우발사건이나 명령적인 생물학적 법칙보다 높은 차원으로 그들을 고양시키기
도 합니다.
신은 우리를 창조할 때 우정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
만 신의 은총은 '자유' 또는 '우정'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신은 인간의
우정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지만, 결국 우정을 구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정은 인간의 미덕이며, 정신적인 고양과 발전을 이루는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
입니다.
기독교 종파에서 이단시되었던 그노시스파(1~2세기경 그리스,로마 등지에서 기
존의 기독교를 극복하려는 의도로, 신비주의적 사상을 나타내었던 종파. '구약성
서'에 나오는 신들을 비인격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으로 바꾸는 시도를 했으며, 율
법을 배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으면서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부인했다)들과 카
타르리파(중세 기독교에서 이단시되었던 한 종파. 마니교에서 주장하는 '영육이원
론'의 입장을 취하며 금욕주의를 제창했다)의 탐색이 떠오릅니다. 말랭은 그의 작
품에 이들을 등장시켜 완전한 세계를 추구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상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찾기 위해 악을 계속 창조하거나 거기에
몰두하는 대신, 우리는 정신적인 접근과 순수한 사랑으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정의 의미가 작용합니다.
우정은 남녀 관계 없이도 가능합니다. 일정한 결과나 규범 없이, 우정은 진정
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끔 하기 위해 생물학적인 삶의 법칙에서 우리를 벗어
나게 해줍니다. 명쾌하면서도 자유롭고 즐거운 이 우정은 본능에 의해 나타나는
복종이나 불투명을 거부하며, 모호하고 끈질긴 생존본능도 거부합니다. 또 물질
에 대한 집착이나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는 욕구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줍니다.
우정은 우리를 구원해 주고, 악몽과도 같은 상태를 취하고 있는 지상으로부터
분명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이러한 '카타르리파'적 우정은 보다 더 깨끗하게
부활하기 위해, 생물학적인 유기체로 인간성이 부여된 정신적인 존재를 만들기
위해 자신과 세계에 이르는 교묘한 과정에서 입문입니다.
환상과 욕구불만
남녀가 서로 즐겁고 풍요롭게 우정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계속 앞으로
전진해야 하며, 그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자신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관계는 괴로움과 욕구불만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미셀 몽트를레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녀간의 우정에서, 성적 학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여성들은 '성관계의 회
피'라는 형태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남성들도 마찬가지인데, 학대음란증이 있거
나 여자를 싫어하는 남성들은 마치 여성이 그 남성의 모든 욕구를 거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처신합니다."
그러나 남녀간의 우정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보여줍니다. 우애있고 솔직
하며, 친절이 넘치는 관계이지요. 여기에서 성은 더 이상 중요하지도 않고 외설
적이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것은 캘리포니아의 젊은 신세대들에게서 종종 보게
되는 일인데, 여기서 에로티시즘이 사라진다면 그것에 대해 비판해야만 할까요?
그리고 비판의 관점에서 볼 때 외설은 자유, 사랑, 지식 등의 요인일까요?
이와 같은 의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해답을 찾게 될 겁니다. 즉 많은 여성
들은 남성들의 환상으로 답습되는 그러한 관계들에 싫증을 내고 있으며, 약간은
새로운 뭔가를 더 좋아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성과 우정을 나누며 산다는 것은
여성 스스로 새로운 공기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미셀 몽트를레이는 "우리는 자주 이러한 관념, 즉 '한 남성이 한 여성의 친구라
면 그녀에게서 욕구를 채우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접하게 되지요.
이것은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사실상 사랑에 있어서 욕구를 유발시키는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서는 감정이 불분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신비도 필요하고요. 섹시
해지려는 여성은 감정이 분명치 않거나, 더러는 아주 냉정해질 필요까지 있습니
다. 보들레르의 여인들을 생각해 보세요! 상호간의 신뢰와 대화가 있다면 욕구는
완전히 소멸되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합니다.
아주 아름다운 영화 한 편이 생각나는 군요. 드레예르 감독의 '게르트루드'인
데, 한 여인의 삶과 그 여인의, 감상적인 환멸, 그리고 철학자인 한 남성과의 신
실한 우정을 다룬 영화입니다. 그녀의 애인이 그녀를 위해 손수 쓴, 그러나 일관
성이 없고 깊이나 감동이 없는 시를 그녀에게 낭독해 주는 동안, 그 철학자는 자
신의 여자 친구 게르트루드에게 거울 하나를 줍니다. 게르트루드는 그 거울을 보
면서 아름다운 뭔가를 감상하게 되는 거지요.
이 영화에서 게르트루드의 애인은 그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찾으려 하
지도 않았던, 여인에 관한 꿈과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환상은 막연하게 사
랑받고 있는 여성의 '불투명성'을 비춰줍니다.
남자 친구인 철학자는 오랫동안 게르트루드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그후
오랜 삶 동안 그녀와 동행하며, 그녀의 성격을 밝게 해줄 것을 암시합니다. 거기
에선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거나 환상에 들뜬 어떤 표정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유혹하기
여성과 친구로 지낼 수 있는 남성은, 일반적인 여성의 관점에서는 특별하게 기
대할 것이 없는 남자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남성다움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얘
기지요. 그것은 단지 남성의 욕구와 웅성적인 측면으로만 정의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남성은 신용을 잃지 않고 자신을 우스꽝스럽다고 여기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감정과 약점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돈 주앙 같은 유혹자들과 자기 자신에 도취하는 남성들은 여성을 소유
하려는 욕망으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그들은
여성을 농락하고, 소유하고, 그럼으로써 여성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지요. 결국 이들은 사랑의 유희와 육체적인 쾌락에 국한되는 관계만을 자신들의
세계로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에겐 육체 관계가 오로지 유혹하거나 유혹당하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이므
로, 그 관계가 우정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유형은 끔찍하게도 그 욕구에, 성적인 일치감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습
니다. 그래서 이들은 인간이 스스로 유혹당하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 안도감을 느
낀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스스로 살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그냥 지나가도록 방치하는 것은 체면을 손
상시키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한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거나 무시하고, 또 과소평가하거나 부
인한다면, 그는 오로지 성적 욕구에 한정된 남성다움만 중요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동성애나 육체적인 속박과도 같은 사생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남성들과
는 거의 우정을 나누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관계의 '외인부대
사병'들이나 교양없는 사람들이 지닌 면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여성과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성적 무능력자나 가세된 사람과 같
기 때문에, 여성들과 우정을 나누는 일은 아주 불편할 뿐입니다.
이러한 남성에게 모호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너무 남성
답고, 너무 역동적이고, 매혹적인 껍질 뒤에 지나치게 보호돼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여러 층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어렵다는 사실로부터 그 존재의 비극이
오게 됩니다. 그는 인지와 감정의 영역을 성적인 영역으로 억제하고 있기 때문
에, 그의 욕구는 이 성적인 영역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우정의 관계를 보면 이와 대조적입니다. 우정은 타자에 대한 의식과 그 관계를
점점 넓히며, 개인으로 존재하는 창들을 열어젖히고 그 영역을 넓혀줍니다. 신으
로부터 이사야에 이르기까지의 고상한 말씀을 다시 갖기 위해서, 우정은 그 '기
거하는 공간을 넓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남성과 우정을 나누며 사는 여성은 유혹의 자질구레한
유희들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보다 가치있게 사는 여성인 것입니다.
이런 여성은 자신의 매력으로 남성을 유혹하는 능력, 남성의 시선이나 주의를
그는 능력을 증명해 보일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 자질구레한 유희들이 그
녀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남녀 사이, 또는 우정이나 사
랑에 있어서 함께 행동하고 공유하는 것을 최선의 방법으로 여깁니다.
반면에 남성을 유혹하려는 여성은 욕망 있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비장합니다.
그녀는 언제나 상대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며, 더 이상 주목을 끌지 못할까 봐 불
안해하면서 삽니다. 그녀는 고통을 겪어야 된다는 두려움, 버림을 받게 될지 모
른다는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오로지 유혹만을 연주하는 이런 유형의 여성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어
코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녀가 펼치는 힘과 계책
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신뢰의 부족을 측정하게 합니다.
그러나 남성과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여성은 반드시 사랑하려고 애쓰지는 않습
니다. 그녀는 자유롭게, 그리고 오만하게 사랑하고 싶어합니다.
욕망 있는 남성, 또는 본능적으로 남성을 유혹하려는 여성은 자신의 욕구를 중
단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노년이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사실 시간에 직면하고
불가피한 일에 직면하게 되는 사랑의 욕구와 쾌락은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는
가소로운 얼굴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정은 쉽게 그 시련을 이겨냅니다. 왜냐하면 우정은 시간으로 양식을
삼고, 시간을 먹고 자라니까요. 욕구는 죽음을 부정하고 거부하기 위한 겉치레인
셈이죠.
브리지트와 아드리앵은 15세 때부터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같은 회
사에서 일하지만 부서는 다릅니다. 브리지트는 44세이고, 아드리앵은 42세입니다.
두 사람 모두 결혼하여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들에게 따로따로 질문을 던졌는데,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나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한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행운이예요"라
고 말입니다.
브리지트는 먼저 자신에게 접근해서 신뢰감을 주었던 사람은 바로 아드리앵이
었다고 합니다. 아드리앵은 동료로서 그녀의 남자 친구가 되었고, 신뢰 관계를
맺었다는 겁니다.
브리지트는 "뭔가 일이 잘 안될 때, 아드리앵은 나를 격려하면서 더 깊은 생각
을 하게 해주지요. 그는 내가 더 멀리 내다보도록 돕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드리앵은 "그녀는 나의 훌륭한 동료이죠. 큰누이 같기도 하고, 어머
니 같기도 하고요. 어려울 때 나를 이해하고 도와주었던 건 바로 그녀거든요."라
고 말합니다.
우정에 관한 이야기는 분명하고 유쾌하게 발전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정
은 그러한 표식을 달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부생활과 우정의 관계 사이에는
자유로우면서도 평등한 관계가 성립됩니다. 이것은 그냥 주어지는 행운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입니다. 우연한 사실도 아니며, 약속의 실체인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우정은 질투를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 존중하는
부부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브리지트의 경우, 부부 관계에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남편에게 아드리앵에 관한 얘기를 했어요. 그들은 서로 만나기
도 했고, 서로 공감하기도 했지요. 또 아드리앵은 우리 아이들과도 잘 지내지요.
그는 우리 가족의 일원인 셈인걸요."
브리지트에 이어 아드리앵은, "브리지트의 가정을 방문하게 될 때 나는 그들의
불청객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어요. 내가 그들의 부부 관계를 깨뜨리는 사람이라
고 느낀 적도 없고요. 그건 온전한 신뢰와 너그러움에 근거한 그들 부부 관계의
장점에 있지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러 번 사랑의 환멸을 체함하고 나서 지금은 12세 연하인 아내와 살
고 잇는 아드리앵의 경우, 브리지트와의 우정은 아내로부터 의심받게 되거나 라
이벌처럼 의식될 수도 있습니다. 아드리앵은 아내의 질투를 인정합니다.
"물론 곤란할 때가 있어요. 아내는 의심이 많거든요. 나의 모든 과거가 아내에
게는 견딜 수 없는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아내는 순전히 기쁜 마
음으로 나의 친구들을 맞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과거와 관련된 질투 때문
에 혼자 괴로워 하고 있거든요."
이것은 아드리앵이 브리지트를 만나는 데 장애가 되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 대해 브리지트는, "신뢰가 가장 중요하죠. 그건 사랑과 우정 간의 공통분모
인 셈이니까요"라고 결론짓습니다.
이중성과 상보성
브리지트와 아드리앵의 이야기는 남녀간의 우정에서 사랑을 구분하는 것을 인
정하게 해줍니다. 그 차이를 명확하게 구체화시킨 사람은 피에르 솔리에라는 정
신분석학자입니다.
"이중성과 상보성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정에서는 이 이중성이 작용하
는 것이지 상보성이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에 대한 욕구는 어느 하나를
다시 만들기 위한 결여이며 욕망입니다. 흔히 사랑이라 일컫는 감정에서 우리는
강렬하고 뜨겁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욕구와 상보성에 대한 필요성을 추가하게
됩니다. 반면에 우정에 있어서의 이중성은 '나'에게도 상당 부분 속하고 있지요.
나는 나에게 부족한 것을 드라마틱하게 찾을 수는 없으니까요. '나'는 남성에게서
여성적인 이중성을 이해하게 되며, 여성에게서 남성적인 이중성을 이해하게 됩니
다. 이 이중성은 그토록 평화롭고 안정돼 있는 것이죠."
만일 우정의 교류가 한마디로 말해서 자유롭고 행복하다면,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남녀가 끈질기게 사랑 쪽에 관심을 기울이는지 자문하게 될 것입니다. 피에
르 솔리에는 이 점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사랑으로 인한 귀찮은 일로 돌아가게끔 하는 것은 바로 욕구
이죠.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며, 상보성에 대한 어쩔수 없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본능은 우리를 부추기고 강요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인류의 개
체적인 봉사자이니까요. 하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본능은 60세가 지나야 평온해지
고, 우정에 대한 모든 희망은 그때 약속된다고 말씀드릴수 있어요! ...사람들은 결
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을 꿈꿉니다. 그러나 우정은 결여가 아니라 일종의
플러스이죠. 프로이드의 학설적 표현에 따르면, 사랑은 반복되는 강압 같은 거예
요. 우정을 나누게 되면 우리는 결여도 욕구도 없게 되지요. 그게 자유예요. 위대
한 우정은 '항문'과 '구강'(프로이트의 학설에서 행위로 성적인 리비도를 충족시킨
다는 의미.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가리킨다)을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변모시키
죠. 즉 우정에는 생식이 없거든요. 그래서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희생적인 사랑으
로 진행되는 겁니다."
장애물이 제거된 숲
나는 남성들과 여러 번의 아름다운 우정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
간의 우정, 남성간의 사랑만을 경험한 다른 여성들에게는 특별한 여자로 취급받
습니다. 또 합법적이며 용기있는 투쟁으로 오로지 남성에 대한 호전성과 멸시만
을 품고 있는 여성운동가들에게는 배반자로 낙인찍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러한 평가들은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나를 기쁘게 합니다.
나는 사실상 이성과 타협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그러나 성욕으로 인한 다산의 함
정에 빠지거나 열정으로 인한 문화적 구습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남년간의 우정은 정말로 속임수와 반순응주의로 보아야만 합니다. 나는 자신들
의 자유를 악착같이 주장하고 지키려는 모든 여성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자유는
억누르거나 상대를 제거함으로써 구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와 함께 대화
하는 과정을 통해 구체화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남녀간의 우정을 유지해 나가는 여성은 진실로 방어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
유로고 자율적인 여성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남성간의 우정을 통해, 남성의 위
협에 대해 두려워하는 대신 자유를 보장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재정적인 자율,
연애와 성생활의 선택, 그것은 여성들끼리 우정과 마찬가지로 이성간의 우정의
교류를 생성시키고, 그 차원을 높이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날 여성들은 직업, 정치, 경제, 스포츠, 학문, 예술 등의 영역에서 남성들처
럼 일할 수 있으며, 또 그들만큼 잘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여성들은 많은 남성들
처럼 애정과 인간적인 열정, 재능등이 '발전'과 '권력'이라는 극악한 기계를 계속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되도록 그 기계를 적게
돌리기 위해, 기존의 남성적인 사상과 삶의 체계를 바꾸어나가는 것이 문제이지
요,.
이제 여성들은 인간 존재와 관련하여 존경이나 배려를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여성들은 스스로 자신 속에 갖혀 있는 대신, 인간의 본질에 대해 세심한 배려를
하는 증인으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정은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손쉽고 유유히 흐릅니다. 말하자면 우정을
나누는 남성과 여성은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는 존재들로, 일종의 남녀 양성적인
일체로 되어 있다고 볼수 있지요. 내면에 남성만 있다는 것은 감정, 친교, 비밀,
내면성을 방해하는 것이니까요. 또 내면에 여성만이 살고 있다면 창의적인 역동
성, 또는 우정이 나타내는 정복을 구속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일 여성들과 느낀 우정과 남성들과의 우정에 대해 차이점을 환기시켜
야만 한다면, 무엇보다도 우선 남성과의 우정이 지적인 교류면에서 더 넓은 자리
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살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매우 빨리 어떤 구상이나
계획, 실현 (여행, 공동연구)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여성들간의 우정은 안락과 자기도취의 위험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반면 남성
과 여성의 우정은 서로를 누에고치로부터 나오게 하여, 더 나아가거나 반응하게
합니다. 확실히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보다 창의적인 한 남성과 한 여성간의 우
정은 자기 자신의 끔찍하고도 무서운 외로움, 유일한 이상스러움을 스스로 고려
하게 합니다.
여성들간의 우정은 심오한 쪽으로 진전되며, 남성들간의 우정은 전진하는 것입
니다. 여성들의 우정은 혈연 관계에 깊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남성들의 우정은
환경의 변화, 놀라움, 어떠한 발견을 만들어냅니다.
나는 모든 남성 친구들과 함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책이나 잡
지, 현지보고서, 라디오 방송 등 많은 일을 함께 구상했으며, 그것을 실현했다고
말입니다. 그러한 구상은 남성 친구들에게서, 혹은 나에게서 나왔지요. 물론 함께
일하고 싶다는 욕구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요.
나는 우리의 우정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던 사생활에 대해서는 간신히 알고
있을 뿐입니다. 사생활은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사생활에는 감정적인
사생활과 심정의 토로가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우정은 그
무엇도 잠식돼 있지 않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 은밀한 역할을 나타내는 걸까
요?
대기의 호흡, 갈등없는 장소, 유쾌한 공간, 이러한 것들과 함께 우정은 가장 훌
륭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사생활과 내면에 관련된 대화, 신
체생활에 관련된 비밀, 마음과 정신, 인간의 운명에 관한 의문을 서로 나누지 않
고는 우정을 상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우정은 흰 조약돌을 파종하고, 감정의 미궁을 밝게 하며, 또 쓸모없는 몇몇 가
지들과 가시덤불들을 제거해 나갑니다. 감정의 혼란 ,정욕의 혼란, 융합, 열정, 환
상과는 거리가 먼, 장애물이 제거된 숲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 내가 너의 친구가 된다면 우린 무얼 할 거지?" 라고 장 지로두의 소설 주
인공인 주피터가 묻습니다. 그러자 알스멘느가 명석하게 대답하지요. "우선 당신
생각을 할 거예요. 당신을 믿는 대신에 말이에요."
5. 부부간의 우정
"만약 그녀가 남자였다면, 친구로 선택했을 여성만을 배우자로 선택해야 한다."
- 조제프 주베르-
충실성을 약속하는 결혼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남녀들이 서로 만나고, 관심을 갖고, 사랑을 나누고, 그
래서 함께 살거나 사랑만을 기원하며 헤어지거나 합니다. 또한 사랑의 감정에 끝
까지 매달리거나, 우정에 의한 관계를 정당화하면서 결혼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상대방이 충분한 인내심이 있고 상당한 의지가 있다면, 그리고 그
들이 개인적인 욕구나 안락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부부 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우정 덕분에 지속될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부부간의 유대감은 성욕에 의해서 생겨나거나 아이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각자를 진보하도록 해주는 우정에 의해서 생겨나게 됩니다. 사
랑의 감정은 금방 변하기 쉽고, 순간적인 것이니까요. 우리는 우정에서 그 어느
것도 할애할 것이 없습니다. 즉 욕구는 필연적으로 변덕스럽고, 기분에 의해 좌
우되고, 꿈과 환상으로 길러진 것처럼 보입니다.
우정은 부부 관계를 지속시키도록 하는 요구를 제공해 줍니다. 감정의 돌발과
열정의 격동, 육체적인 허약함이나 불명예에도 불구하고, 우정은 그 부부를 진정
으로 교화시켜 줍니다. 또한 두 사람 각자를 성장하도록 하고, 새롭게 만들어내
게 해주고, 서로 신뢰하게 해줍니다.
25~45세의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확하게 우정을
정의하려 하지 않고도 부부간의 우정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
다. 우정은 그들에게 종교적인 관념이나 사회적 협약에 의해 규정된 충실성보다
더 확실하고 지속적인 가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일 충실성의 약속이 위선적이거나 비현실적이라면, 남녀간의 계약은 이들을
보다 더 진정한 관계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부부간의 우정은 상대와 함께, 상
대의 옆에서 계속해서 살 수 있는 단호한 선택입니다. 그것은 상류층의 충실성이
요구하고 있는 것과 같은 속박이나 강요된 행동이 아닙니다.
14년간의 부부생활 경험을 가진 파브리스는, "이기중의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
주되는 우정은 부부에게서 중요한 것입니다. 우정은 상호간의 도움, 상대에 대한
존중을 가능하게 해줍니다"라고 증언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자신이 좋아하는 직
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직업은 그녀에게는 독립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함께 있는 시간을 위해서 틀에 박힌 휴가를 보내지는 않습니다."휴식은
각자 상대에게 숨돌릴 시간, 자신을 재발견할 시간을 주지요"라고 파브리스는 말
합니다. 그들은 서로 얼굴 찌푸리는 일 없이 가사일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아이
들의 교육에 관여합니다.
이들은 현대적인 부부,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살아가는 부부라고 말할 수 있습
니다. 보다 더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파브리스는 아내를 용서해야만 했던
몇번의 경험이 있습니다. 아내와 광기와도 같은 열정에 빠져 가족과 가정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파브리스는 아내가 한때의 기분에 빠져 있었
음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사건들을 아내의 충족되지 않은 욕구, 호기심,
환상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녀의 실수가 결코 이들 부부를 위험에 처하게 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는 아내가 방랑자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인정하지 않으
며, 다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상적이고
자유로운 부부는 아니에요. 이런 표현이 우스꽝스럽게 보일수도 있지만, 우리는
일시적인 시간과 모험에 맞서 싸우는 우정의 감정에 의해서 명확하게 결합됩니
다."
에로스와 필리아
부부 사이에 우정이 성립되기를 바라는 것은 관습의 변화에 응하는 것이며, 남
성과 여성을 자유롭고 동등한 인격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결혼
에 대한 새로운 관념에 부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계급제도가 세습되었던 사회에서, 더구나 아내가 하녀로만 취급받았던 결혼생
활에서는 부부간의 우정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동등성, 상호 인
정의 측면에서 부부 관계를 바라볼 수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집에만 있는 아내들, 아이들이 많은 가정을 원하는 전통주의자들은 그
들의 관습에 우정을 포함시킬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성은 남성들보다 하위에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남성들에게 헌신하거나 남성의 권위, 경제력 등에 복종
해야 하는 존재였으니까요. 그래서 여성은 가정에서만 바쁘게 일할 수 있고, 요
리와 빨래, 아이 돌보는 일 등만 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에도 이런 류의 부부 관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부생활에서는 우정을 고려할 수 없습니다. 우정이 성립되는 부부 관계
에선 친구로 여겨지는 배우자가 /대로 반항할 수도 있고, 헤어질 준비를 할 수도
있으며, 가정의 문턱을 넘나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 관계에서 우정이 불가능하다는 의심을 낳게 하는 또 다른 종류의 남성들
은, 어린아이처럼 여성에게 의존하는 유약하고 무기력한 자들입니다. 이때 여성
은 어머니와 가정교사, 유모, 간호사등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우정은 단 하나의 의미로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정은 대화와 상호간의 도
움, 귀기울여 주는 태도등으로 유지됩니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부부 관계에서 남성은 여성에게 아버지 또는 보호자의
역할을 합니다. 이때 연약하고 의존적인 여성은 우정을 요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정은 바로 그 여성으로 하여금 누에고치 속과 같은 그 생활에서 나
오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소녀, 보실핌을 받는 여성의 위치에서 자율적
인 성인의 단계로 넘어가도록 해줄 것입니다.
부부생활에서의 우정은 동반자와의 동등성의 표현이며, 상대를 욕구의 대상으
로 삼는 대신 서로 협력하고자 하는 욕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보통의 남녀는
두 사람의 생활에서 역할과 책임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생활만은 공유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함께 건설하고, 서로 교대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생기는 부부간의 쾌락과, 노력을 통해 생겨나는 다른 기쁨등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의존, 개인적 이익, 종속 관계 또는 매력 등으로 이루어진 관계에는 우
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결혼을 앞둔 남성들은 흔히 부부생활에 대한 부담
을 느끼며, 서로 싸우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는다고 합니다. 또 여성
들은 남편으로 인해 고통을 겪지나 않을까, 남편에게 버림받지나 안을까 하는 두
려움 때문에 주저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각자 상대방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이상, 이들 사이에 우정이 성립될
수 있을까요? 이들은 수세에 몰린 도망자들처럼 상대에게 마음을 열수도 없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인정할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부부로 살기가 어려울
것이며, 우정에 의해 감동받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우정은 서로간의 대화, 상대의 가치에 대한 인정, 상호 신뢰등과 관련이 있습
니다. 부부 관계에서의 우정은 한 사람의 복종이나 상대의 마음을 사려는 마음
등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일시적인 기분전환이나 가벼운 위선 등도 허용도지 않
습니다. 우정은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공유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이루어지므로,
환상이나 망상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성공적인 부부생활, 서로 발전하며 자유를 꽃피우게 하는 부부생활은 에로스
와 필리아 사이의 대화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즉 부부간의 사랑은 연인간의 사랑
보다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필요로 하며, 육체적 결합과 쾌락뿐 아니라 정신의 기쁨을 공유
하게 하며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친구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일 필리아입니
다. 덕성을 지닌,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우정은 부부에게 생길수 있는 일시적인
불화나 오해를 극복하게 할 뿐만 아니라, 거부와 욕구불만을 넘어서게 하고 초월
하게 해줍니다.
다음의 이야기를 상기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즉 고대의 신화에서 사랑의 신
에로스가 단지 욕망의 신, 사랑의 신, 매혹의 신에 불과했다면, 그는 인간이거나
신일 수도 있는 상대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것으로 족했을 겁니다. 그는 안식
처에 머물러 프시케(에로스의 아내)를 만나는 날까지 사랑의 열정에 이르지 못했
습니다. 그녀의 이름의 의미는 영혼입니다.
에로스와 프시케는 밤이면 비밀, 신성에 의해 결합됩니다. 그들이 서로 구속을
금하지 않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그는 신처럼 잘 생겼고, 그녀는 인간들 중 가장
매력있는 존재였다), 그들의 일치는 감정과 정신의 일종의 협동입니다.
이 신화에 의해 아퓔레는 나중에 보통명사화되어 거의 대중적으로 된 그말의
의미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에로스는 에로티시즘과 길은 관련을 맺게 됩니다. 즉
성적 욕구와 성적인 상호 이해는 부부를 이루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퓔레는 에로스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에로스의 동료가 되고, 에로스를
깊이 뿌리박게 하고, 심지어 그를 변모시키기까지 합니다. 이는 마음과 영혼의
유사성을 나타냅니다. 각기 상대에 대해 갖고 있는 욕구는 이때 상대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 인간의 사랑은 신성한 차원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나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철학자 지닌 상퇴르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욕구의 강도에 의해 부부가 이루어지는데, 이 욕구의 강도는 종종 대상을 다
시 찾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부부들은 서로 불안정합니다. 이들이 만일 우
정이 생길수 없는 그 친화력에 더주의를 기울인다면, 욕구와 직면한 실체를 발견
할 수 있을 겁니다. 자년가 이 친화력을 대신할 수는없습니다."
부부간의 우정은 서로의 사랑을 자라게 하고, 명백하게 하고, 뿌리를 내리게
합니다. 그래서 상실과 고통보다는 개방성, 상상력, 창의력을 부여해 줍니다. 여
기에서 불투명한 욕구는 동요하게 되고, 무디어지며, 명확하지 않은 감정은 헛돌
게 됩니다.
감미로운 관계
프랑스 문학의 역사는 우정과 사랑의 경계에 있는 남녀간의 관계에 대해 증명
해 주고 있습니다.
디드로와 루이즈 앙리에트 볼랑이 1754년에 만났을 때, 그들은 40대였습니다.
디드로는 결혼하여 한 딸을 둔 아버지로, 그는 이미 유명해졌습니다. 20년동안
그는 규칙적으로 루이즈 앙리에크와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는 그녀를 '내 다정한 친구','나의 소피','소중한 친구'등으로 불렀고, 편지에서
'당신의 애인이','당신의 친구 디드로라고 서명을 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디드로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의 '감미로운 관계'
는 서로 공감하고, 즐겁고, 아이러니하기도 한 다정한 교류였습니다. 이러한 교류
는 육체적인 애정 관계로만 볼 때는 가능하지 않을 듯한 관계이겠지만, 그들은
서로의 마음과 지성의 친화력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1761년 10월 2일, 디드로는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불러일으켜준 애정과 우정은 영원히 내 행복의 가장 감미로운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이 선한 남자, 관대하고 열정적인 이 남자에게 우정은 열정이며 미덕입니다.
우정은 영혼의 고양과도 같은 열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편지를
씁니다.
"나의 소피, 우리의 삶은 나에게 더욱 소중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내가 당신
에게 덕성을 보여주면 줄수록 당신은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오."
디드로는 1784년에 죽게 됩니다. 그리고 몇 달후에 소피 볼량도 죽습니다. 우
리에게 잘 알려진 장 콕토를 생각하게 되는군요. 그는 여자 친구 에디트 피아프
와 같은 날에 죽었습니다, 그건 돌이킬수 없는 그 울타리들을 뛰어넘은 공모이며
협약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디드로와 소피 볼랑이 함께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됩니
다. 만약 그들이 결혼했더라면, 그들은 아마도 사랑과 우정이 본래의 모습을 잃
고 쇠락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되었을 거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만일 트리스탕
과 이죄가 결혼할 수 있었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이 적대 관계에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들의 그 강렬한 열정이 생겨날 수 있었을 까요?
사랑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우선 충동, 강렬한 열정, 무모한 정, 격렬한 욕구로
이루어집니다. 만일 이 관계가 거기에만 머물기를 원한다면, 이렇게 이루어진 관
계는 결국 일상생활에서 멀리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관계는 현실과 직면하면
할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고, 애초의 그 감정은 조금씩 메마라갈 것이기 때문입니
다.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 부부들은 우정을 멀리하거나, 모르고 있거나 부정합니
다. 우정은 그들인 사랑에서 무미건조한 것이며, 그 사랑을 박탈하게 된다고 생
각하기 때문이지요.
만일 그들이 일상의 현실, 타자와 자아에 대한 인식과 맞닥뜨리게 된다면, 필
연적으로 그들의 환상이나 꿈, 몽상등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우정에 접근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그토록 서로가 집착하는 사랑을 하고 나서 그
들이 헤어지게 된다면, 그것은 다시는 서로 만나지 않기 위해서이거나 영원히 미
워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사랑의 해학, 너그러움
우정은 적어도 '너그러움'과 '우아함'이라는 두 가지 양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부생활에서 우정을 필수불가결하게 하는 면이기도 합니다.
너그러움과 우아함을 지닌 우정은 함께 살고 있는 남녀가 진부함 속에, 저속한
생활에 빠져들지 않게 합니다. 또한 각자 자기 만족을 너무 추구하다 보면 서로
에게 마음을 열 수 없게 되는데, 이때 우정의 너그러움과 우아함은 서로의 마음
을 열게 하고 숨통을 트이게 해줍니다.
우정은 지혜와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사랑의 관계를 진정시키며, 그 관계의 절
대성을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엔 사랑하는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
니까요. 또한 유일하다고 느껴지는 그 존재를 세상과 도저히 바꿀수 없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행복의 보장은 아니며, 늘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보기 힘들 정도로 드물게 지나가는 것만큼이나 상투적인 언어사라고 우정은 투
덜거립니다....
부부관계나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유머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부
부들이 지속적으로 살아가고 존재하는 데 활력을 주고, 명랑하게 살기를 원한다
면 말입니다. 그것은 감정이라는 코미디에 속지 않기 위한 즐거운 후퇴이기도 합
니다. 또한 놀이와 축제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내가 만난 부부들 중에서 평등하
고 지속적인 우정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계 속에서 자주 유머로 인
내하고 있었습니다.
신화에 집착하는 연인들은 함께 살기로 결정한 후, 상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대신하고, 각자 상대에게 만족하며 상대의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행복에 타인이 끼여
드는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러한 부부의 유형에서 사랑으로 규정되는 감정은 서로에게 기생하는 형태에
불과하며, 결국 사랑의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부부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다른 관계
(우정 도는 일 관계)들에 대해 인색하고, 초대할때도 마지못해 하거나 형식적으
로 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때마다 놀라긴 하지만, 그들이 내세우는 구실들을 이
해할 수는 있습니다. 피곤하다든지, 대도시의 교통문제 때문이라든지, 시간이 없
어서라든지, 아이들 때문이라든지....
하지만 혼자사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 저녁식사에 친구들을 초대하기를 좋아
합니다. 그리고 외출하고 ,극장에 가고 콘서트에 갈 정력을 가지고 있으며, 전화
를 걸거나 편지를 쓸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부부들은 꿈틀거리면서 강해지려고 합니다.' 부부'라는 감옥에 들어가는 일, 그
것은 두 사람중 한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는 형식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빛나는 오렌지빛의 절반은 퇴색한 셈입니다. 한때 남녀 양성을 겸유할 능력을 지
니고 있었으나, 부부관계에 얽매이는 순간부터 한쪽이 서서히 무너지게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신화적인 사랑은 먼지와 눈물로 얼룩지고, 실망과 상호 비방으로 모습을
바꿉니다. 이들에겐 한 번도 우정의 향연이 베풀어진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정이 요원하거나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씩, 부부사이에서, 배우자의 친구가 자신의 적과 같은 존재로 표현되는 것
을 볼 수 있습니다. 남편의 친구는 그를 술마시게 하고, 노름하게 하고, 다른 여
자에게 접근하게 하니까요. 그리고 그 이면에는 배우자와의 관계만을 중시하고
그를 독차지하려는 욕구가 숨어 있습니다. 즉 부부 관계의 성립은 종종 친구들과
의 결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친구가 없는 부부, 우정이 끼여들 여지가 없는 부부는 두 사람만의 사
랑으로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이러한 부부 관계는 역동적이고 마르지 않는 사
랑의 샘을 지켜가는 특별한 두 사람의 만남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관념, 혼합물,
응결된 상태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길을 선택한 셈입니다
우정은 부부가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너그러움을 지니고 있
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잃을까 봐, 또는 스스로 잃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 하는
두 사람만의 가정이라기 보다 는 오히려 사랑의 일시적인 장소라 할지라고 그
외부세계와 교류하게 해줍니다.
외부세계와 교류하는 우정은 부부간의 사랑에 크나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두
사람이 공유하는 쾌락이나 기쁨을 넘어, 우정은 남녀의 사랑이 사회적으로 의미
가 있고, 그 사랑이 유익하며 애타주의적인 것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부부로 하
여금 정신적인 진보, 마음의 문 열기,세계를 비추는 존재로 성장하고 그것이 배
가되기를 명령하는 것이 바로 우정인 것입니다.
올바른 거리감
우정은 상대와의 거리감, 공간과 인성을 존중합니다. 반면에 본능적인 사랑은
접근, 둘러싸이기, 속박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랑에만 집착하는 부부
의 경우, 사랑은 상대를 잠식하는 만큼 더욱더 그 공간을 침해할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진정한 우정은 정중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아와 타자에 대한 존중
이며, 관계에 대한 세심한 배려입니다. 정숙하고 예의 바르며, 존경에서 우러나오
는 관대한 침묵과 조심성을 지니고 있는 우정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취향을 가지
고 있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예의 바른'좋은 매너'는 언제나 상대를 고려하고 있다는 표시이며,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정과 공통되는 것으
로, 결코 말, 행동, 태도 등으로 상대에게 충격을 주는 법이 없습니다. 또 위선적
인 사회에서의 여분으로 남은 것이거나, 낡아빠진 형식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
다.
상대에 대한 정중함은 부부로, 가족으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태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정중함이 없다면, 부부는
이제 거칠고 매력 없는 짝짓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가정은 되는대로 이루어지는
종족이 되며, 친구들은 버릇없는 태도와 침입자의 태도를 갖게되며, 온 사회는
추한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54세의 엘로디는 삶을 사랑하고 ,그 세계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사랑하는 사
람입니다. 그녀는 이혼했는데 ,다음과 같은 증언을 들려주었습니다.
"한 사람과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그의 결점과 함께, 그의 진보와 퇴보를 함께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입니다. 또 그의 생각들, 부족한 면 또는 유머적인 접근, 그
의 경향, 탈선, 광기... 등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짜여진 관계는
나를 수축시키고 곤두세우며, 주름살지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나는
그를 지나치리만큼 존경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고통을 겪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내 영혼을 잃었습니다. 나는 다란 사람의 생활에 지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부부생활 속에 우정이 생기기를 원하는 것처럼, 우정은
나에게 저속한 모든 표현을 금지시켰습니다. 정중함은 나의 내적인 분노를 감추
게 합니다 .몰론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엘로디가 원했던 우정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부부관계에서의 우정은 약간의 친절, 신선함, 기대, 거리감, 평등, 박애의 정신
등으로 동물적인 사랑의 상태를 진정시키기를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불
가피한 대면에서 형제애를 나누는 것과 같으며, 동시에 인간적이면서도 보다 단
순해지는 것입니다."
우정은 상대를 속박하거나 제멋대로 규정하는 대신, 상대의 모든 것을 존중합
니다. '차별화'와'정중함'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정
은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아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진지함 말과 행동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정은 어느 누가 한쪽으로 진지한 흡수되거나 떠나게 될 것을 두려
워하지 않는, 올바른 거리감을 굳건히 지켜줍니다. 그러면서 사랑의 감정을 성숙
시키고 자라게 합니다. 이것은 결코 하잘 것 없는 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껏 트럼프판에 나온것과는 다른 카드를 내미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우정은 감상적인 사랑에서 시간과 함께 자신을 발전시키며, 사랑의 감정이 세
련되고 심오해지는 기회를 부여해 줍니다. 이 기회는 이때부터 동맹 관계로 나타
나는 것이며, 적으로 인식되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혼란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단절과 욕구의 일시적 기분을 넘어서는 관계를 추구할 용기를 나타냅니
다. 우정은 사랑이 계속되기를, 완료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성공한 부부들의 신화
부부를 구성하고 지속시키는 사랑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부부관계가 서로간
의 융합 과정에 있는 교류임을 믿는 것입니다. 또 서로간의 이해는 열렬한 사랑
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며, 이것은 곧 우정을 성립시키게 됩니다.
우정은 친절과 상호간의 도움입니다. 이것은 감정과 애정을 강화하고 ,서로를
믿을 수 있게 하며, 사랑이 일시적인 감정으로 끝나지 않게 합니다. 부부간의 우
정은 사랑의 관계에 통일성과 매끄러움을 부여하며, 서로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
고 성실성을 유지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꺼이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동일시되기를 원한다면, 애인이
자신의 욕구와 일치되려 한다면, 우정은 그 사실들을 고려하기 위해 퇴보(지성,
지혜, 유머, 또는 명민성의)를 감행할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애인 관계에 불구한 것도, 배우자의 관계에 불과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35세의 독신자인 캥탱은 우정으로 변화된 자신의 사랑과 그 경험들로부터 이
런 교훈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부부가 감정적, 애정적으로 어떤 성숙 단계에 이르렀을 때는 애정의 해로운
족쇄를 모면할 수 있습니다."
파란만장한 부부는 사랑에서 증오로, 열렬한 사랑에서 폭력으로 변하는 감정의
갈피를 잡지 못하며, 결국 침대에서 위에서 분쟁을 해결하곤 합니다. 애인이면서
적이기도 한 이부부 관계는 우정과 대체되어야만 평등과 평화를 발견하게 될 것
입니다. 분명 우정은 열정보다 요란스럽지 않으며, 광기나 편견과도 거리가 멉니
다. 우정은 보다 확실하게 두 사람을 긴 여행길로 안내합니다. 서로가 대치하면
서 힘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이루기 위해 인내심을 발휘하며 두 상대
의 힘을 이용합니다.
우정은 고요이며, 신뢰입니다. 그래서 각자가 자신을 재발견할 수 있고 자신을
보상받을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제공합니다. 우리에 갇힌 두 마리의 동물은
서로 움직이며, 불안해하면서 공격하는 적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좁은 공간
에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자신을 위한 공간-외부활동의 장소, 은거와 침묵의 장소, 내적인 공간
등-을 충분히 갖게 된다면, 한 부부를 이루고 있는 두 사람은 행복하고 평온한
관계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유명한 여류시인 마리 드 프랑스의 "내가 없으면 당
신도 없고, 당신이 없으면 나도 없으리"라는 글은 행복한 사랑, 성공한 부부들의
신화가 사실은 많은 참혹함과 희생을 휩쓸어갔다는 사실을 요약해 주고 있는 듯
합니다.
피에르 솔리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들은 처음의 낭만적인 사랑을 애정으로, 우정으로 변
화시킬수 있어요. 감상적인 차원에서 정신화된 자애의 우정으로까지 나가면서 말
이에요. 사랑의 감정과 신뢰가 없다면 사람들은 함께 살지도, 결혼하지 않을 것
입니다. 하지만 부부 관계의 지속성과 안정성은 상호간의 우정의 힘에 달려 있습
니다. 이와 같이 우정은 쟁취되는 것이며, 반면에 사랑의 융합은 주어지는 것입
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우정은 진정한 정복입니다. 그것
은 고행의 도이며, 일상의 고행입니다.... 마찬가지고 상대와의 공감대는 말을 다
듣지 않고도 그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게 해줍니다. 그것은 서로 자유롭게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며, 자신의 일시적인 욕구를 억누르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련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우정은 상대의 노쇠와 조락을 담당하게 해주며, 상
대의 얼굴에 비친 아가페적인 사랑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게 해줍니다."
떡갈나무와 보리수나무
[사랑의 기술]을 쓴 시인 오비드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어느날 주피터와 메
르퀴르가 지구를 산책하고 있었는데, 피로를 느낀 그들은 숙박할 곳을 찾아다녔
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들은 대부분 문이 닫혀 있었지요. 그래서 신들은 두 노인
이 살고 있는 초라한 초가집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초가집에는 필레몽과 보시라는 노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보시였고
남편은 필레몽이었는데, 그들은 너무 가난하여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말할 수
조차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정의 임무를 서로 공유하고 있었습니
다. 펠레몽은 정원에서 바쁘게 일했고, 보시는 불을 피우고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주피터와 메르퀴르는 식사를 대접받으며 그곳에서 유숙하게 됩니다.
이들 부부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개방적이었습니다. 식사가 준비되는 동
안, 노부부는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포도주와 곁
들여서 요리와 그 외의 모든 것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 그
들의 얼굴에 비쳐지는 선생, 열성과 신실한 너그러움"이 모든 것에 더해졌던 것
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퍼내도 포도주가 동이 나지 않았습니
다. 그릇엔 언제나 포도주가 가득 채워져 있었지요. 필레몽과 보시는 두려워졌습
니다.
신들은 이 노부부에게 포도주가 동이 나지 않은 이유를 이해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노부부를 따로따로 어느 산에 어느 산 위로 데려 갔습니다. 필레몽과 보
시는 애써서 그 길을 기어올라갑니다. 이것은 노력의 상징이며, 정신적 고양의
상징입니다.
정상에 올라가자 신들은, 자신들을 푸대접했던 집들과 자기들이 징벌로 사라지
게 할 마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노부부의 초라한 초가집은 그 벌을 면하게 될
뿐 아니라 사원으로 변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주피터는 필레몽과 보시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합니다. 노부부는 같은 목소리로,
자신들은 그 사원의 신부와 문지기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소
원으로 "같은 시간에 우리를 데려가도록 해주세요.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마음
으로 결합되어 살아왔으니까요"라고 말합니다. 이들에겐 세상을 떠날 때 함께 떠
나는 일이 정말로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세월이 흐른후, 인간으로서의 임무를 완
수한 그들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나무로 변했습니다. 한 사람은 떡갈나무, 한사
람은 보리수나무가 되어 서로 가까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이렇게 한 것은
두 사람이 본질적으로 똑같은 나무로 있는 것보다는 서로 다른 나무가 되어바라
볼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보시와 펠레몽이 이루었던 부부 관계에서는 어떠한 문제도, 고통도, 열정의 환
희도 육체만을 고집하는 완고한 욕구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인 오비드는 그들
이 함께 발전할 수 있었던 마음의 결합과 정신적 공유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필레몽과 보시는 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정신적으로 결합되었지만, 그들은
똑같은 본질을 가진 똑같은 인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언제나 가까이 있지만, 서
로 섞여 있는 존재는 아닌 것입니다. 신들이 그들을 떡갈나무와 보리수나무로 있
게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부부 관계에 대한 의미와 깊이를 어떻게 부여해야
할지 이해하게 됩니다. 또 이상적인 부부가 되기위한 방법을 이들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정은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하나의 모델입니다. 왜냐하면 우정은 두 사람에
게 개인적인 창의성, 관계를 맺는 개방성, 내적인 믿음 등을 허용하며, 그것을 통
해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부의 목표가 자신보
다 더 위해하며, 두 개인성보다는 더 위해한 뭔가를 함께 건축하도록 유도합니
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랑과 가장 가까워집니다.
사랑의 신성한 차원
우정은 개인의 정신적 특성에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육체보다는
정신에 의지합니다. 사랑하는 남녀간의 관계에서 욕구는 환상, 부정행위, 용이성,
습관에 침몰하는 특성 등을 가지면서도 신성한 차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주
목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우정입니다.
자신의 소자아를 망각할 필요가 있는 우정은, 우주적 차원에서 개인의 정신적
특성을 보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오직 육체만 존재한다면, 그것
은 슬픈 일입니다. 연인들이 추구하는 쾌락은 충동이며, 권태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며, 그 문을 여는 것입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으로 간주된
다면, 결국 권태에 빠지거나 또 다른 쾌락을 위해 끊임없이 상대를 괴롭힐 뿐입
니다.
사랑의 신성한 차원을 거부하는 것은 개인의 모든 신비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
신성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지
만, 그들이 모두 사랑의 신성한 차원을 진전시켜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결혼이 사랑의 승낙이라는 모독을 범하고 있으며, 아내의 복종을 강요하며,
폭력을 당하면서 아내들이 가정에서 창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지...!규방의
그 불결한 비밀들과 직면하여 가장 경쾌한 우정은 귀족처럼 보이며, 아주 드물게
볼 수 있는 존경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성욕은 사랑과 우정에서
감수성, 상상력, 자기도취 등의 개인적 표현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우정과 사랑은 의사전달이 필요하지만, 성적인 만남이 강요되어서는 안됩
니다.
우정은 인간의 사랑이 성적 행위에만 집중되지 않도록 하며, 스스로를 모독하
지 못하도록 금지시킵니다. 또 에로스적 사랑이 지니지 못하는 차원의 신비와 그
깊이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끝없이 우리에게서 벗어나는 절대적인 사랑의 신을
향한 모습과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어집니다~
출처, 네블,인드라의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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