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로 살아가는 법 90 가지 3 / 자크린느 클랭 본문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로 살아가는 법 90 가지 3 / 자크린느 클랭
6.이별 이후
"우리는 친구 사이였지. 그러나 각자 이방인이지. 하지만 그건 정말 잘된 거야.
우리는 두 개의 그릇이고, 각각의 그릇에는 특별한 목표와 가야 할 길이 있지.
우리는 엇갈릴 수도 있고, 어쩌면 같이 축제를 열수도 있지. 마치 우리가 이미
그 축제를 열기라도 한 것처럼...." - 프리드리히 니체-
그와 함께 라면, 그녀가 없다면
부부가 이혼하거나 연인 사이에 이별한 직후, "친구로 지내자"라고 제안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표현이 무례한 행동처럼 귀에
울릴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애정 관계에서 불화가 일어난 후에, 사랑의
관계를 충실한 우정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만약 한 남성과 한 여성이 단순히 성적 욕망이나 감정에 얽매어 부부로 맺어졌
다면, 그들의 관계는 결국 이별을 택하지 않을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
계는 그 나머지를 가지고 첫 경작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이 있었다면 그 관계가 이별의 형태로 변했다 하더라고 새로운 만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정은 상대를 인정하면서 상대에 대한 존중, 존경 등이
남아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혼하거나 이별한 경우, 이제 예전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뭔가를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계속적으로 남달리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별에 의해 성처받고, 낙담하고, 모든 것의 끝과도 같은 아픔을 체험했던 많
은 사람들은 상대방을 거부하거나 잊기를 더 선호합니다. 마치 서류 정리를 예전
보다 더 민첩하게 해치우는 것과 같지요.
좌절을 당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별을 야기시키는 사람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당황하게 됩니다. 줄 중의 한 사람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관계는 그때부터 아주 사사로운 감정보다 예민한 반응을 나
타내게 됩니다. 그리고 둘 중의 한사람은 먼저 이별을 선택합니다.
이별의 선택은 노골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그녀와 함께라면,,","그녀
가 없다면...",또는 :그와 함께라면..."그녀가 없다면..."등으로 말이지요.
이별의 순간에는 상대에 대한 소유욕의 취향이 아주 난폭하게 표출됩니다. 그
리고 수백번의 적절한 말로 표현됩니다. "나는 더 이상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아
요","우리는 더 이상 함께 할 일이 없어요","미련 없이 과거를 잊어버려야 해요"
등의 표현은 "너를 가질거야","너를 지킬 거야",너를 버릴 거야","나는 너를 잃었
어","내가 있기에 네가 존재하는 거야","나를 떠나면 너는 아무것도 못할 거야"등
을 의미합니다.
최근까지 그렇게도 극진히 아꼈던 상대를 거부하는 이사랑, 아주 단순하게 존
재하고 호흡하는 이 사랑의 권리는 무엇일까? 이별하면서 증오, 복수, 원한, 또는
무관심만을 주고받는 애정 관계는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역설적으로 애정 관계
의 장점과 깊이는 육체적인 이별 우에도 연속성과 계속성을 지니고 있는지의 여
부로 그 가치를 알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기적이지 않고 환상에 빠진 것도 아닌 진실된 애정 관계는, 필요에 따라 이
별을 겪는다 해도 연속성과 계속성을 지니게 됩니다. 반면에 이별 후에 큰 좌절
을 겪는 경우에는 서로 사랑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나누는 관계가 아닌, 다른 관
계로 맺어져 있기 때문에 좌절이 뒤따르게 됩니다.
두 연인을 영원히 갈라놓은채 희미하게 끝나가는 사랑은 희망도 그리움도, 후
회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서로 만나지 않습니다. 예전의 그들
은 서로 사랑한다고 소리쳤고, 이기심과 권위와 환상의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했
는데도 말입니다.
이러한 빈번한 경우에 있어서, 버림받은 사람은 자신이 잃어버린 사랑을 아직
도 믿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슬퍼합니다. 사실 실연한 사람은 자신의 무분별함에
대해서, 그들이 소중히 여겼던 것들의 파경에 대해서만 슬퍼할 뿐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별 후의 새로운 도전
"몸은 비록 그녀와 헤어졌지만, 나의 마음은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
니다."
35세의 다니엘은 자신의 좌절을 인정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상대를 부인하거나
상대를 잃는다는 좌절감도 없이 과연 어떻게 헤어질수 있을까요? 또 상대방을
포기하는 것으로 자유로워질수 있을까요?
우정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도전, 즉 세심하고 민감한 평등의 추구는 더 이상
매력도, 정열도 혼란도, 사랑의 기쁨도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경쟁, 비난, 후회,
욕망, 복수심, 그리움 등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이해의 조화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우리의 감정과 타인과의 관계의 특성에 대한 냉정한
시험과도 같습니다. 이별은 사랑받는 사람이 자기되취, 관심, 너그러움이나 미숙
함에 의해서만 존재했었음을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힘든 상황은 정신적으로 한층 성숙해질 수 있는, 그리고 욕망에 의해 쥐
었던 것을 다시 놓을 수 있는 기회 일수 있습니다. 실패로 인해 스스로 문을 닫
는 대신, 그 문을 새롭게 통과하는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어 주에서 '좌절(rupture)'과 '자동차 도로(route)'라는 용어는 처음에 같
은 어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인용하는 이유는, 애정 관계에서의 좌절은
함께 공유했던 경험의 갑작스러운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도로를 개척하는 기회
이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좌절은 실패로 끝난 애정 관계를 재정리하여 새로운 관
계를 맺어나 갈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기회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별 후에 그 대상과 새로운 만남을 이어가는 일을 할 수 없다
고 생각합니다. 이별의 경험으로 그들의 자존심이 괴로움을 겪기 때문이며, 상처
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상대에게 애원하거나 동정하는 듯한 인상을 비칠 수
도 있기 때문입니다.
38세의 발랄하고 정열적인 뮈리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정은 확실하게 이별의 고통을 넘어설 가능성이 있지만, 나는 아직 그 단계
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것은 성적인 차원의 만남이 더 이상 불가능할 때 완전히
조절될 것이며, 타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9세의 이자벨은 사랑에서의 후일담을 고려하지 않는 듯,"절교한 사람에게 남
아 있는 감정 중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상대방을 향한 연민입니다. 그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죠. 이때 최선의 방법은 이 연민을 절
제하는 것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도시라는 정글 속에, 깊은 침묵 속에, 우리가 이전에 소중히 여겼고 같
이 살기를 원했던 누군가가 순식간에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선택되고,
애써 찾았던 그 대상은 이제 익명의 행인이 되어 군중이나 대중의 무관심 속에
서 기진맥진하게 됩니다. 우리가 만났던, 그리고 사랑 덕분에 유일하게 인정되었
던 그 사람은 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 축소되어 무명의 인물로 사라져갑니다.
이때 사라져가는 그 사람을 보면서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자기 속에 있는 슬픔
을 겪어내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일까요? 좋아했던 그 사람에게 더 이상 관심을
가져선 안되는 건가요?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던, 그 사람
이 사라지도록 그냥 내버려두어야만 할까요?
이별 후에 자신과 상대에게 가해지는 이러한 고통은 일종의 폭력이 되고 맙니
다. 서로의 관계를 부인하면서, 단호하게 해결하고도 끄떡도 하지 않는 폐쇄적인
이 폭력 때문에 결정적으로 이별하게 된 우리는 결국 무능한 존재인 것입니다.
한때 침대를 같이 쓰고, 시간과 공간을 함께 나누며 서로에게 관심을 가진 후에
도 상대방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은 이 사랑은, 이 사랑은 뭘까요?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았으며,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진실한 사랑이 없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사랑에 대해 이해하기도 힘
들고, 그것의 좌절을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가혹한일로 느껴집니다. 또한 그 관
계의 성격에 대해 판단하지 못하게 되고, 분명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없게 됩니
다. 결국 그들은 서로의 느낌을 솔직하게 확인하면서 자신들의 사랑을 현실에서
견뎌내도록 하기보다는, 오히려 환상이나 그리움을 품기를 선호했던 것입니다.
버림받은 자의 절망
우정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랑은 이별 후에 그 관계가 우정으로 바뀌
기 어렵습니다. 이때 이별은 서로 친밀했던 관계가 껍질뿐이었음을, 그리고 서로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좋아했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또 함께한 생활이
서로에게 종속된 관계 또는 습관적으로 되풀이되었던 것에 불과했음을 드러내둡
니다.
그러나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별이나 이
혼의 원인보다 거기에 주재하는 정신입니다. 남성과 여성은 비겁하게 피하거나
비열하게 서로에게 흙탕물을 튀기는 대신, 애정 관계에서 형성된 신뢰나 존중 등
모든 장점을 가지고 우아하고 신중하게 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헤어
짐에는 우정이 싹틀 수 있습니다.
우정은 인간의 동등성과 평등성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애정적인 좌절이나
절교는 사실상 서로 자유롭고 동등한 관계에 의해서 결합된 우정과 대체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결과가 승리나 실패로 인식되다 해도, 어느 한쪽이 버리거나
버림받는다고 해도, 운명의 신은 항상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배회하게 만들고,
언제나 우리의 모든 관계에 해를 끼칩니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이루어지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먹거나 먹히는 관
계에 놓여 있습니다. 승리하거나 패배하든지, 옳지 않거나 옳든지, 잃거나 얻든
지, 잘못을 저지르거나 결백하든지, 타인을 지배하건아, 지배당하든지...모든 상황
앞에서 양자 택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애정 관계 역시 경쟁이나 권력의 도식을 따릅니다. 그래서 사랑은 그 결과가
실패로 끝났을 때, 필연적으로 증오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정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중용의 도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실현된 거대한 발전을 측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호간의 동의를 통
해, 현실적으로 가능한 만남의 관계를 이룰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우정이 할 일
입니다. 왜냐하면 상호 동의는 자아와 타자의 존경과 존중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우정에서의 상호 동의는 동등성에서 행해지는 것이며, 두 청원자 중 어느 누구
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왜 끝나 가는 모든 애정 관계에서 이 개념을 이해
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요?
39세의 사회학자인 파스칼은 몇몇 여성과 이별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는 헤어
진 후 그녀들을 다시 만나려고 애쓰지 않으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거나, 매우 분노하여 증오심에 불타는 여성 앞에서
우정을 제안하게 될 때면 나 자신이 우스꽝스럽고, 좀 모욕적이라는 기분이 듭니
다. 우정을 제안하거나 서로의 관계를 정리하는 해결책을 내놓는 대신에 아무 말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상대의 감정을 이해할 뿐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과거의 기억들을 붙들고 억지로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사랑의 관계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합리적인 이치를 따질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강렬했던 사랑의 감정들이 평화스러운 관계로, 행복으로, 너그러
움과 묵인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들
의 만남과 이별을 넘어 그 후에 우정이 생길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
으며,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미셀 몽트를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이별이 고통의 경제적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떠나버린 사람이 상대를 대해 간절한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상대를
결코 다시 만나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욕구불만을 갖게 될 상황에
다시 처하게 되는 것일까요? 나에게서 치료를 받은 환자들 가운데, 자신보다 훨
씬 더젊은 여자 때문에 남편에게서 버림받은 한 여성이 생각나는군요. 그녀로서
는 자신에게 그토록 고통을 주었던 남편을 계속 만난다는 것이 견딜수 없는 일
이었습니다.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며, 그녀에게는 그 상처를 되살아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남편을 향한 그녀의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다
른 어떤 방법으로 그 욕망을 억제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쉽게 남편을 피하고
부인할 수 있을까요? 몇 가지의 경우에서, 이별에서 벗어난 관계의 연장은 '피학
대음란증'을 숨기고 있거나 드러나지 않은 욕구가 쌓이게 할 뿐입니다. 그 욕구
는 언젠가는 폭발하게 될 것이며, 상대에게 바라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증오심
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깨어지려 할 때
긴 여정에서 사랑의 이야기를 우정을 변화시킬 수 없는 갑작스럽고도 결정적
인 이별을 넘어,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상대를 안심시키는 중개 적인 시도가 있습
니다. 그것의 실체를 계속 믿으며 다시 관계를 맺으려는 것은 바로 남성입니다.
또 그것의 실제 사례를 모으는 것은 바로 여성입니다. 그러한 사례의 주인공들은
오랜 인연을 가진 사람들과의 유대를 끊어버릴 수 있는 사람, 이별했거나 이혼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관계를 변화시키고, 과거를 부인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보
다는 오히려 그 관계를 연장시키려 하거나 되풀이하려고 애씁니다. 만약 두 연인
이 이별하고 나서도 그 관계가 살아 있다면, 그들이 혼란, 호전성, 절망을 피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들 자신보다 그들의 관계를 좋아한다면, 그들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기존의 것들을 잃는 기회로 그 이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남성들은 자신들의 욕구가 있을 때는 분명한 태도를 드러내지 않
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문제가 끝나버린 후에도 항상 유혹자로 남기를 바라고 있
으며, 항상 다시 시작할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또 여성들은 우정을 계속 영위하기 위해서 애정 관계를 보다 쉽게, 미련 없이
잊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남성들은 자신들의 욕망에 계속 매달리고
있는 것일까요? 남성들은 여성과의 관계를 언제나 애정이나 성적인 충동과 동일
시하려는 것일까요?
대부분의 남성들은 우정의 새로운 틀에서조차 예전과 같은 관계를 맺으려 하
거나 애매함을 그대로 감춰두려 할 것입니다. 많은 여성들은 이별하고 나서 전남
편과 식사를 하거나 그를 집으로 초대하게 될 때 전남편이었던 그 남자는 침실
에서 기꺼이 그밤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털어놓습니다. 그 남자가 헤어지기를 원
했고, 그 이혼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 여성에게 언제나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구
체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은 남성다운 방법일까요?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교제의
결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자신이 거세당하는 일에 조인하지 않는 것이라
고 단언하는 하나의 수단일까요?
여러 연령층의 많은 남성들은 애정 또는 부부 관계를 지키는 우정을 부정적으
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우정을 사랑의 실패, 타락, 또는 자신들을 아
무짝에도 쓸모없는 성불구자로 취급하려 드는 것처럼 여기는 거지요. 그러나 남
성들은 자신의 감정을 여성들보다 훨씬 더 성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며, 자
신들의 애정을 사랑의 행위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르바라는 갈색 머리에 생기 있는 눈을 가진, 구릿빛 얼굴의 스포츠맨입니다.
그녀는 관리부 부책임자로 있는데 37세이지만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입니다. 그
녀는 자신감을 쟁취하도록 해주는 사랑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렇게 말하기도 합
니다.
"나는... 정말 그 관계 이후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어요. 난 어떤 관계의 강렬
함보다는 지속성이 유지되는 것이 더 좋아요. 가끔 일시적인 센세이션이 일어나
기보다는 함께 구상하는 계획이 좋고요. 하지만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안
보고는 못 견뎌요. 정말로 사랑한다면 상대를 떠나는 법이 없으니까요. 난 아주
소박하면서도 평범한 애인이 될 거고, 그러면서도 흔치 않은 친구가 될 거예요."
바르바라는 끝날 줄 모르는 지루한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한 남자와 나 사이에 변심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이를테면 별로 강한
변심이 아니라 해도 그 관계를 그만두고 재빨리 우정을 제안하죠. 내가 전에 사
귀었던 남자들 대부분은 나의 그런 제안들을 받아들이더군요. 그들은 오히려 안
심하는 것 같았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 깨어지려 할 때 생길수
있는 상처와 상호간의 비난을 예방하는 방법이지요. 나는 상대가 이별을 원할 때
는 언제든지 떠나가게 내버려둬요. 사랑이란 면에서는 포기하는 거죠. 그렇지만
우정과는 오랫동안 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에요."
사랑했던 누군가에게 충실해지는 것과 애착을 갖고 있는 것사이에는 가끔 미
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두 사람 중한 사람이 아버지 또는 어머니의
역할을 하게 되는 부부에게서 이런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이들 부부가 결별하거
나 이혼하게 될 때, 아이처럼 의존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상대로부터 독립성을
갖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상대의 사랑을 요구하고, 배려와 애
정, 정성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상대방을 섬기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아이 없이 몇 년간 부부생활을 하다가 이혼한 36세의 프랑크를 그 예로 들수
있습니다. 그의 전부인은 얼마 후 다른 남성과 재혼했지만, 프랑크와의 관계를
우정으로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프랑크와의 이혼이 복잡한 일 없이 이루어졌고
그들 사이에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프랑크와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프랑크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예전과 같은 애정을 기대했고, 그녀로부터
보호받으려 종속성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종속성이 없다면 이들의 관계
는 우정으로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처음에 프랑크는 그녀와 그녀의 새 남편이 제안하는대로, 기꺼이 그들과 함께
자주 외출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크는 자신이 대리만족으로 사랑
의 감정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녀에 대해 느끼고
있는 감정이 우정이 아니라 사랑받으려는, 거부당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럽고 유치
한 욕구라는 것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크는 혼란 상태에 빠졌고, 마침내 어느 정신요법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
습니다. 그후 프랑크는 세 사람이 함께 모임이나 외출을 줄이고 자신의 고독을
감내했습니다. 그의 고독은 버림받은 데서 자신의 고독을 감내했습니다. 그의 고
독은 버림받은 데서 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자기 삶의 방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그가 자신의 전부인과 함께[ 체험하고 있다고
믿었던 우정은 자신들의 지난 과거에 대한 향수일 뿐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
다.
진실을 알려주는 이별
이미 이혼하기로 결심한 부부들의 경우, 아이라는 매개물 때문에 자신들의 문제
를 다시 생각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물론 어떤 부부들은 자녀를 빌미 삼아 상대를
협박하거나 주도권을 쥐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혹하게도, 아이를 두고
부부는 솔로몬의 분배를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이상적인 해결책이 있다면 아이들의 문제는 공정하고 침착하게 접근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나친 손실 없이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헤어지기로 한 부부는 서로 손해를 안 보려는 태도를 보이게 되고, 이
러한 비겁함은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그들이 부부 관계에서 드러내었던 특성을
번식시킬 수 있을 뿐입니다. 일의 순서를 뒤바꾸어서는 안됩니다. 아이들에게는
하나의 커플을 이루는 한에 있어서만 부모가 됩니다. 그것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 생물학적 영역이며, 생물학적인 아이들을 갖게 되는 각자의 영역입니다.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아주 다른 하나의 기업을 이룩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이가 실패하고 있는 부부 관계를 공고히 할 수
도, 보전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이혼 후에도 위로의 역할을 할 수 없
기 때문입니다. 남녀가 부부 관계에서 이룰 수 있는 우정만이 이혼할 때 그들의
아이들을 존중할 수 있게 해줍니다. 우정은 고통을 막아주지는 않겠지만 비열한
짓, 인색함, 저속하고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막아줄 것입니다.
이혼의 또 하나의 양상은, 헤어진 자신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함께 있는 두 사람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던 친구들, 여전히 그들이 함께 있는 두
사람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던 친구들, 여전히 그들이 함께 있는 것으로 알고 있
는 친구들은 그들이 형성했던 부부 관계를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몇 친구들은 그 부부 관계가 깨어짐에 따라 친구 관계가 소원해지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우정은 재판하지 않고, 형을 선고하지도 않습니다.
우정은 언제까지나 한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환대합니다. 사실 우정은 개
체성에 호소합니다. 그러므로 이들 부부의 친구였던 그들은 온전한 사람들 또는
인류도 아니고, 그 부부의 친구로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부부간의 이
별은 그 동안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았던, 피상적인 그 관계들 통해 명확히 밝혀
줍니다. 우정은 이때 위대한 청소를 실시하는 것입니다. 후회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후회하는 관계에는 우정이 없습니다.
나는 전남편과 아름다운 우정을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전남편과 함께,
어떤 친구들과 관계를 유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
는 부부와는 관계없이 서로에게 충실한 친구들입니다. 이혼한지 10여 년이 지난
오늘, 나는 헤어진 전남편 덕분에 알게 되었던 나의 소중한 남녀 친구들을 헤아
려 봅니다.
그 당시에 나는 이별의 통고를 받았고, 시댁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진실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그들 가문에 속해 있을 때, 그리고 내가 그 가정에 합류해 있을 때만 나를 사랑
했습니다.
그들은 아들의 아내를 인정하고 있었지만, 아들의 아내가 아니었을 때는 나를
무시했습니다. 서로의 재산을 함께 소유하고 있을 때에만 사랑할 수있다는 그 끔
찍한 가정의 판결이란... 사면을 받는 길은 우정에 있었습니다. 우정은 상대에게
환원될 수 없는 것을 부여하며, 훌륭한 자유를 부여하고 인정하는 것이니까요.
관계의 변화, 그 두려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처음에는 대부분 우리들 자신 때문에 생깁니다. 우리는
가정을 가짐으로써 안정을 찾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아주 뜻밖의 일, 있을
수 있는 모든 변화를 물리친 후에나 안정을 찾으려 하지요.
그러나 변화 없이 정지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며, 움직이지 않는 다는 것은
죽음과 타협하는 것입니다. 삶은 움직임이며 마음의 설렘, 고통, 탄생, 성장, 분산
등을 겪는 규칙적 순환입니다. 그런데 성격의 변화와 발달이 죽음을 향해 보다
확실하게 나아가는 것과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겐 성격의 변화뿐만 아니라 관계의 변화 역시 죽음의 진전을
알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여성이 그 존재의 과정마다 신체변화(월경, 임신,
출산등)에 의해 그때마다 재생되는 변화와 변신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합
니다. 즉 새로워지는 시간들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되는 과정을 겪는 거지요.
남성들은 그들이 마치 죽음에 이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또 사물의 목표에 도전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남성들은 사랑
하는 여성에게 "변화면 안돼. 지금의 모습 그대로 있으면 되는 거야"라고 말하곤
합니다. 또 10년, 20년이 지난 후에 영예로운 해명이나 변명으로 "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넌 변했어. 그게 네 실수야"라는 비난
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시간에 대한 인식의 차이점을 관찰해 보면, 이별하려 할 때 왜 몇몇 사람들이
시간이 미치지 않는데도 꼭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어하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관계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관계를 분명하게 끊기를 바라
는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어떤 이들은 그 관계를 살아 있게 해주는 유일한 기회를 활용
하며, 그것을 통해 관계를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사랑을 발전
시키고 다른 것에서 사랑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만남의 소중한 인연을 지키기
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35세의 뤼스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증언합니다."나는 애정 관계가 이별의 상
태로 정리되는 것이 인생의 큰 혼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다시는 못
만난다면 나는 불행해질 것입니다. 비록 이별한다 해도 상대는 나에게 하나의 모
델이 될 사람이며, 시간 속에서의 지표이자 방침입니다. 일시적 기분이나 착각이
아니라면, 이러한 생각은 상대에 대한 성실성을 나타냅니다."
이별 후에도 상대와 관계를 맺으며 우정을 간직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충실성
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이별의 손간에 서로의 관계가 영원
히 끝날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랑과 욕망을 품었던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며, 애정의 역사가 끝나려는 그 순간에 결정적으로 자신의 삶에서
상대를 지우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자신과 상대의 공동의 과거에 대한 수치입니
다. 또 그 관계가 파괴적이고 굴욕적이며, 진정 피상적인 것임을 암암리에 인정
하는 셈입니다.
'별'과 같은 우정
한 개인은 많은 다른 사람들, 즉 친구들, 연인들, 부모와 아이들, 행인들, 엄청
나게 많은 익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과 우정을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종말과 함께 엮어진 이야기의 결말을 우리는 알 수 없
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모든 것을 해결해내고 정리하며, 검토합니다. 또 지구
의 어느 한구석에 정성스럽게 마련해놓은 은신처에 조용히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습니다. 공포에 대항하여, 내가 사랑했거나 전혀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항하면서 말입니다.
삶은 우리가 잃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사
람들, 우리에게 그토록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 우리의 시간을 빼았아갔던 사람들
을 우리의 여정에 따르도록 하는 지혜를 부여해 줍니다.
우리가 빼앗겼던 시간은 뭔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고 가르쳐 줄것이 있는 사
람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들과 결정적으로 결별할 수도 있습
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함으로써 안정을 찾게 될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은 안돼. 나는 계산을 끝냈어."
"나는 그걸 믿지 않아. 그녀가 원망스러워. 그녀와 나 사이에 일어나는 일마다
후회스러워. 내가 만일 이 모든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삶에 대해 순수하면서도 잘 난 체하는, 그러면서 영혼에 대한 문맹자이기도 한
우리는 다른 곳에서 온갖 다른 식으로 파악되고 계속될 관계, 30년 후 또는 2세
기 후에 다시 시작될 관계가 여기서 멈추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니체는 진실한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해'별과 같은 우정'이라는 표
현을 했습니다.
"아마도 어마어마한 궤도, 보이지 않은 흔적, 별 모양의 궤도가 존재할 것이다.
그 속에서 서로 다른 우리들의 도정과 목표는 작은 단계들처럼 나타난다. 설사
우리가 적들의 땅 위에 있게 된 다 해도, 별 모양의 우리 우정을 믿기로 하자."
도둑처럼 달아나는 사람
긴 사랑의 이야기는 이미 우정이 풍부하며, 그 사랑에서 우정을 탄생시키기 위
한 넓고 깊이 있는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밝혀줍니다. 이러한 우정은 사소한 욕망
을 버리고 그것을 해방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장하고 성숙해진,
다소 지혜있고 신성한 사랑에 이를 수 있는 특별한 기회입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면보다 직접적, 심리적인 면에서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과의
우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존중과 믿음을 확인받는 소중한 이점
을 갖는 것입니다.
계속성을 보장하면서 존경과 믿음을 살아나게 하고, 심지어 끝나버린 사랑을
되살아나게 하는 우정은 그 무엇도 무너지지 않도록 합니다. 자신이 비참하게 버
림받았고 그것이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만큼, 관계를 끊어버리고
도둑처럼 달아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때 달아나는 사람은 절대로 버림받았다고
여기는 사람보다 자신을 높이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내가 우정을 간직하기를 원치 않았던 애인들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마음
을 가질 것입니다. 이 관계는 의심스럽고 수치스러운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반대로 전남편들과의 우정은 내가 그들에 대해 느낄 수 있었던 것을, 그리고 그
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 줍니다.
그들을 사랑한 것은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옳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
면 사라져가는 열정, 싫증나버린 욕구...그러한 것들을 나는 여전히 존중하고 있
으니까요. 또 내가 그들과의 모임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좋았으니까요.
내가 그들과 헤어지고 나서 경험하게 된 것은 거의 언제나 훨씬 나은 것들이
었습니다. 즉 육체가 서로 섞이게 하고, 서로 싸우게 만드는 애정보다 더 재미있
고 지적이며, 심오하고 감미로운 것들을 경험하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경험으로
여성은 현명해집니다.
그런데 우정의 평온한 기쁨을 체험하려면 반드시 이와 같은 중간 단계를 거치
면서 남성과 함께 지내야 하는 지를 자문하게 됩니다. 여성이 남성과 곧바로 우
정을 나눌 수 있다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하게 될 테니까요. 그것이 훨씬
건설적인 일이 될 테니까요.
이별 만세
남녀가 이별한 후에 우정을 유지하는 것은 굉장한 장점이 있습니다. 우정이 없
다면 이별은 완전한 실패처럼 보이고, 애정 관계는 부조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정은 앞서 일어난 일뿐 아니라, 이별이 불가피하게 일으킨 외로움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애정을 나누다가 버림받은, 그리고 우정을 유지할 수 없는 남성과 여성은 필연
적으로 더 이상 상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우정조차 나누기 어렵
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애정 관계를 끊어버렸거나 중단해 버린 사람의 관점으로
다른 사람과의 우정을 가로막는 것 역시 자신의 올바르지 못한 의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별은 항상 추함, 야비함, 비열함의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셈입니다.
이별은 불만, 잔인성, 그리고 어렴풋하게 생기며 보상받도록 되어 있던 애정
문제의 결산에 집착하여 비난의 불씨가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은 아주 격렬
하게, 원한이 쌓인 감정으로 표출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야비한 성향과 더러운 속옷을 보여주는 대신에 의연하고 예의
를 갖추는, 고매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일 것입니다. 우정에서 우러
나는 너그러운 감정과 침착한 행동은 복수심, 후회, 죄의식, 추억의 반추, 향수
등이 섞이지 않고도 관계의 변화가 이루어지게 할 테니까요.
부부 관계가 우정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삶의 다른 여행길을 찾아나가는 것과
같고, 제2의 발견(사랑했던 사람은 이제 당신의 애인이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감미
롭고, 주의를 기울이며, 전보다 훨씬 즐거워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을 추구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내는 일입니다.
헤어진다는 것은 상대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이 아니며, 떠나는 것은 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중요한 발견을 하게 해줍니다. 즉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다시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잉게르 버그만 감독이 만든[부부생활의 장면]이란 영화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
영화는 이혼한 남편과 아내가 재회하여 사랑의 탈주를 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감
미로운 친구로서, 오빠와 누이로서의 탈주가 이루어지는 그 순간에 두 사람은 각
자가 상대에게 가했던 구속과 속박에서 해방됩니다. 비로소 이들 남녀는 서로를
알게 되고, 흉금을 털어놓으며 새롭게 만나게 되고,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관
계가 됩니다.
이제 그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과 결부시키지 않고
서로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상대에게서 얻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며, 감출 것도 없습니다. 연인들에게 의무적인 몫이기도 한 권리의 요구, 경
멸 ,비난 환멸 등은 이제 교류, 현존의 기쁨, 흠 없는 행복 등에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나는 나의 전남편과 우정 어린 탈주를 경험했습니다. 특히 우리가 함께 걸었
던 곳, 방문했던 장소,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곳, 지체 없이 상호간의
계획을 불러일으켰던 곳, 바로 브레타뉴에서의 산책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남편과 그 경험은 어떠한 후회도 없는, 단순하고 진실한 행복을 찾게 했습니
다. 우리는 같은 침대에서 잠들 수 있는 친구였고, 화해를 나눈 사이가 되었으며,
서로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나는 해변을 향해 있는 오디에른의 호텔 방에서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물결소리와 다음날 아침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모래사장에서의 산책을 말입니다. 끝없이 나타나는 감미로운 그 풍경들... 하지만
결코 사랑의 추억은 아니었던 것, 기대도 없고 달리 요구할 것도 없지만 실망도
없는, 충족된 그 시간들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답니다.
두 개의 반쪽, 두 개의 고독
사랑의 관계는 애정이나 섹스에 국한되지 않은 경우에만 확장되고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관계는 우정의 도움을 얻게 될 때 진정한 사랑을 향해 발
전하게 됩니다. 이러한 발전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나'에서 '너'로, 이기
주의에서 애타주의로 변화되며, '우리'라는 전제에서 시작되고 진행되는 것입니
다.
사랑에 이르기 위해서, 우정은 어쩌면 사랑의 문제에 고행을 부여하고 있는지
도 모릅니다. 사랑의 관계에서는 상대에 대해 불안해하고, 반항하거나 완전히 끝
을 냅니다. 또 심리적 만족감을 기대하게 되며, 그 상대에게서 자신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정은 일어나게 해주고,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정과
사랑에는 시간과 인내, 용기와 단념이 필요합니다.
37세의 조리스는 말합니다.
"나는 친구가 많아요. 하지만 애인은 거의 없어요. 애정 관계가 끝나면 그 관
계는 우정으로 이어지니까요. 나의 경험은 애인과 서로 껴안은 것보다는 우정에
서 자신을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지요."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사랑은 '알고 있다는 것'이란 표현으로 보존되었기 때문
에, 이 감정에 대해 빈번하게 혼동이 일어납니다. 즉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는 것은 그를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이며, 육체는 영혼의 노출과 통하는 것이고,
존재의 신비는 육체적으로 내밀한 관계에서 밝혀진다는 것을 믿게끔 하는 것이
지요.
육체적인 공감은 다른 모든 것을 알게 하고, 그것은 곧 당신을 완전히 알고 있
다는 것을 믿게 합니다. 하지만 일상적인 현실은 이사실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부부들은 자주 헤어집니다. 그들의 외설적인 의미는 그 관
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비밀을 공유하고 상대와 결합함으로써, 우리는 상대의 신비에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적인 관계에서의 비밀스러움과 신비는 곧 드러날
수 있습니다. 사실상의 비밀은 온전히 양도할 수 없는 존재의 본질, 신 , 생명의
본질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랑의 포옹은 신비를 감싸고 있는 형태들중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비밀의 매듭을 풀기보다는 오히려 신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때가 많습니다. 공생 관계가 자유분방한 관계로 대체되는 순간이지요.
남녀 양성 겸유자로 이루어진 두 개의 반쪽(나 없이는 당신도 없고, 당신이 없으
면 나도 없다는...)이 형제처럼 우애 있게 지내는, 두 개의 고독이 있는 순간이 어
느 날 우리에게 찾아듭니다.
[아름다움의 서]의 저자이며, 신비술의 신봉자 중 한사람인 르 조아르는 남성
과 여성의 창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성은 원래 남성과 나란히 있었다. 둘다 나란히 있었던 것이다. 성자가 그들
을 떼어놓고, 그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서로 마주 보며 재회하듯이 서 있도록
다른 장소로 그들을 이주시켰으며, 성자여 축복 있으라!"
'나란히'에서 '서로 마주 보며 있는' 것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우정이 일심동체
의 벗에게 부추긴 고통스러운 도전과도 같습니다. 또 남녀가 서로 다른 별개의
개체이며, 이방인이라는 거리감과 비통함을 갖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와의 관계에 의해 존재하고 나는 너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니, 이 얼
마나 놀라운 일인가!"
사랑에 빠진 한 남성이 상대에게 이렇게 말하자, 해방자인 우정의 그 옆에서
숨을 돌린 후 속삭입니다.
"너는 나와 관계없이 존재하고 있고, 나는 너를 벗어나서 존재하고 있어. 그건
놀라운 일이야! 우리는 서로를 보고 있고,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고 있지. 그뿐
인가? 존중과 존경, 예의와 재치, 명민함, 너그러움... 우정은 깊이 있게 서로 사
랑하고 있거나 함께 살고 있는 남녀에게 이러한 것들을 가르쳐주지."
우정이 상호간의 고독을 끝마치는 일인 만큼, 우정은 그들의 관계를 더 확대시
켜 줍니다. 우정은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동시에 그들 모두를 참여시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발전하도록 해주는 그것을 우리는 형제애의 명언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부부 또는 연인의 관계에서 형제애를 주고 받으며 산다는 것은 아
주 드문 일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러한 관계를 이룬 사람들은 아주 강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상대를 받들어주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며, 욕
구나 받들어주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며, 욕구나 환희, 애정 등을 약
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루 살로메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매시기마다 그와 나의 관계는 어느 형제가 애정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어
요...."
하지만 부부 사이에 형제애적인 관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랑에서 조금 떨
어져서 우정의 섬세한 여과기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연금술이며,
동시에 평생의 작품을 명백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7.올가미와 유령
"친구란, 내가 아주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으며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 -뤼트 뵈프-
외로운 자들의 안식처
진정한 우정은 흔치 않습니다. 모호하고도 넓은 의미를 지닌 '친구'라는말은 사랑
이라는 말만큼이나 많이 쓰이며 '진정한 우정'역시 마찬가지로 자주 쓰입니다. 그
러나 어쩌면 우정은 사랑이라는 말보다는 덜 세속적인 건지도 모릅니다.
친구들은 분명히 우정을 유지합니다. 친구가 많다는 것은 그 자신이 호감형이
며, 너그럽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와 친구로 지낸다는 것은 서로의
필요와 편애심에 의해, 후원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관계를 약간혼동하기도 합니다. 즉 사회적인 관계 직업상의 관계,
국제적 관계, 그리고 이웃들, 일상의 동료들, 소송 관계로 만나는 사람들, 친구들,
조합원들...
나는 각자가 마음에 다른 사람을 맞아들이기 때문에 친구가 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사생활을 나눠 가지면서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은 매력이 있지만, 보
통은 피상적인 멋진 저녁 시간과 같이 체험될 수도 있습니다. 우정에 대한 판단
은 개인적인 수준과 욕구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유용하고 흥미 있는 우정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정은 재
정적 능력, 정치적 야심, 직업에서의 성공을 지향하거나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모호한 축제 분위기를 좋아하는 기질, 공격적인 연대감, 상술적인 친절,
너그럽고 인간적인 행동 등이 그러한 그룹 내에서 희석되며, 종종 외로운 사람들
의 안식처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잘 지내면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 싸우거나 활동하고, 서로 역할
분담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정이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우정은 우선 개인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익명의 그룹이나 어떠한 정당에는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정은 무리들 또는 다른 모든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을 선
택하여 구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만의 모임이
될 수 없으며, 잔인할 정도로 개인에 치우쳐 있습니다. 물론 이기주의적인 의미
가 아니라 용어상으로 철학적인 의미에서 말입니다.
예의바른 의존자
어느 대기업에서 공적인 업무에 열심인 41세의 뱅자맹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친구가 별로 없어요. 나를 쉽게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본심을 숨기
면서 아첨을 떠는 거울에 불과하며, 그 모든 것이 환심을 사려는 언동입니다. 나
는 직업상 내가 무슨말을 할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사실상 불신을 낳고 의심
을 불러일으킵니다. 직장생활에서는 지나친 위선이 있습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
더라고 유리한 거래를 하려고 하지요. 이때 우정을 구실 삼아 사람들은 칭찬을
받고, 스스로 안심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정이란
명목하에 비도덕적이고 위선적이며, 스스럼없이 저속한 많은 일들을 하게 됩니
다."
우정은 아첨, 노예근성, 허위 등과는 양립하기가 어렵습니다. 상대에게 이기적
이고 타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우정은 즉시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유명인사,
스타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 좋은 시절이 지나고 나면, 자신들이 영예
롭게 지내는 동안 수많은 친구들이 밀려드는 것을 경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
닫게 됩니다.
몰리에르는 자기 작품의 등장인물인 알세스트를 통해 이렇게 외칩니다.
"우정의 겉모양에 불과한 수치스러운 거래를 가차없이 징계하면 안되는 걸까
요? 나는 우리들의 대화에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것들까지 다 드러났으면 좋
겠고, 말하는 사람이 정말 그 사람이길 원해요. 그리고 우리의 애정을 쓸데없는
칭찬으로 감추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미 키케로는 봉사하는 일과 우정을 분리하는 차이점에 대해 강조한바 있습
니다. 그는 "우정은 유익해야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우정이 있기 때문에 우정이
오는 것도 아니다"라고 썼습니다.
우정은 관습이나 의무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또 우리에게 반드시 우정이 필요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열차 안이나 대합실에서 만난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도 있습니다. 이웃간에는 차례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부모간의 대
화를 나눌수 있으며,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습니다. 여행을 함께하는
동료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정이 생기게 하려면 그 이상의 뭔가가 필요합니다. 용모 또는 사회적
역할, 예절을 뛰어넘는 뭔가가.... 이때는 그 사람의 진실, 장점, 마음의 깊이를 참
조하게 됩니다.
우정은 반복되는 만남에 의해 분위기가 지배되는 이웃간의 좋은 관계와는 다
른 역동성, 발전을 가져옵니다. 신뢰감을 주고, 추억을 반추하고, 사람들을 하나
로 묶어주는 관계를 모두 우정이 라고 믿어서는 안됩니다. 우정은 언제나 진행형
이므로, 오히려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고 전복시키며, 앞으로 전진하게 합니다.
우정은 때로 험한 바다에 나가고, 실천에 옮기며, 더 멀리 떠나는 모험을 감해
하기도 합니다. 언제나 새로운 분위기에 지배받은 우정은 옛 동창들의 모임, 군
대 동기들의 모임, 향우회의 모임 등에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우정 어린 관계가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관습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
면, 오히려 우호적인 그 관계가 소멸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었습니다. 침체된 채
반복되는 관계, 그리고 이기적인 관계등은 상호교류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오로지 구명대 또는 자신의 양쪽 귀로만 간주하는 사람, 또는 상대
덕분에 과거와 안정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우정의 지고함을 지닐
수 없습니다. 우정이 생기게 하려면 이미 소자에서 벗어나 있어야 하고, 상대가
자신보다 호감이 있고 그 이야기를 들어줄 만하다고 평가해야만 됩니다.
우정은 만병통치약?
힘 없는 우정의 대린인들은 많습니다. 그들은 고해를 듣는 신부 또는 정신적
치료자의 역할을 하면서, 도움을 청한 사람에게 변화를 주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사실상 그들은 상대를 자유롭게 하고 책임감 또는 의식의 고취를 요구하는 대신,
상대가 그들에게 의존하도록 하는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정신분석학자나 정신용법학자들은 인간적인 고독이나 파괴를 덜 느끼게하는
위대한 의사들입니다. 그들은 환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미리 수용함으로써, 환자
들의 감정적인 무기력을 관리해줍니다. 정신병학 의사인한 친구가 의기소침해서
자살할 우려가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어느 날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정, 이것이야말로 내가 알고 있는 최상의 치료법일세! 그 환자를 의기소침
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어떤 도움도 필요가 없어. 친구들의 애정과 활력밖에는....
그들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치료약이나 정신과 의사와의 만남은 우정의 스
펙트럼이거나 난생아일 뿐이야!"
사랑의 문제가 종종 눈물, 의기소침, 동일성의 위가, 병원이나 정신병원을 찾아
가는 일로 끝나게 된다 해도, 우정은 결코 그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보장해 줍니
다. 유효성 있는 치료제인 셈이지요.
이런 점에서 보면 우정은 만병통치약입니다. 하지만 상대의 재생과 변화의 능
력에 관심을 가지게 될 때에만 우정이 만병통치약인 셈입니다. 우정은 그 추이와
변화를 허용하며, 협력관계로 정성을 다하는 방법입니다.
"내가 사랑의 실패를 체험했을 때, 오로지 따뜻한 우정만이 그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도록 돕습니다."라고 올가는 말합니다.
그러나 우정은 사랑이라는 배를 타고 있거나 난파당한 사람을 위한 은신처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우정은 사랑 관계의 대리자로 소용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또
사랑의 문제를 보상하거나 매장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정은 실제적이고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함께하는 것입니다. 삶의 소
용돌이, 또는 마음의 소용돌이에도 아랑곳없이 지속되는 것이 우정입니다.
소유지향성의 비극
사랑의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 많지는 않지만 우정으로 실
망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아직까지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
보다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우정을 거부하거나 비난하기도 합니다. 우정을 성장시키고 발
전하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 관계에서 기쁨, 위안, 또는 보상을 바라기 때문
입니다. 또 실제로 우정을 나누었던 사람들에 대해서, 자신들이 사랑의 관계에
서 체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가 그 관계에 대해 자기도취적이며, 소유적인
기질을 드러낸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소유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이기적인 발상입니다. 비
록 전제적이긴 하지만, 사랑의 열정에서 실현될 수 있는 진부한 꿈은 우정에 어
떠한 여지도 주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정이 한 개인을 이기적이고 유치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는 것은 바로 그런의미에서입니다.
우정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실망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라
는 우정은 유아기의 아이처럼 거리낌없이 사랑받고 칭송받고자 하는 욕구와 같
으니까요.
74세인 앙드레[는 조용하면서도 우수에 찬 듯한 두 종류의 우정을 기억하고 있
습니다. 그 우정은 삶 또는 다른 사랑에 대해 열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절이 지나갔지만,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첫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를 다
시 만났어요. 그녀는 아름다웠지요. 그녀는 다른 사람을 비웃는 듯한 커다란 눈
을 가지고 있었는데, 분명하고 강한 인상을 주었어요. 나는 그녀의 친구들에게
질투를 느꼈지요. 그녀의 관심을 끌고 싶었거든요. 졸업한 후에는 용돈을 벌어야
했고,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어요. 내가 먼저의 우정과는 전혀 다른 두 번
째의 우정을 만난 것은 바로 그때였어요. 그녀는 마들렌느예요. 매력 있고 조용
한 성격이었지요. 거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여자라고나 할까요? 나는 그녀를 무
척이나 소중히 여겼지요. 알 수 없는 깊은 침묵은 서로간의 깊은 공감대를 느끼
게 하는 셈이었고, 경박스러움을 멀리하며 우리 주위에 펼쳐져 있는 우정의 초원
에서 유혹자들을 멀리하게 해주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떠난다는 인사도
없이 사라졌어요. 나는 다른 친구들을 통해 그녀가 떠나 이유를 알게 되었지요.
그녀가 나에게 말한 적이 한번도 없었던 그녀의 애인이 나타나, 나에게서 그녀를
빼앗아갔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녀는 곧 아이를 낳게 된다는 거였어요.
나는 나만큼이나 순진했던 마들렌느를 상상하곤 정말로 엄청난 실망을 했답니다.
우리는 서로 속내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나는 그때 아주 큰 배신감
을 느꼈어요."
어느 회사에서 개인의 정보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39세의 아델라이드는 여
러 번의 격심한 실패를 우정으로 극복했습니다. 우리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어
떤 사람들은 사랑의 아픔으로 고통을 겪었던 것처럼 우정으로 실망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에서처럼 나는 우정에 빠집니다. 그 관계에 완전히 잠기게 되지
요. 또한 다른 삶으로부터 그와 같은 기쁨, 그와 같은 약속을 기대합니다. 아름다
운 환멸도 경험했어요. 나는 열정적인 우정을 체험하고 나서, 결국은 혼자 있게
되었지요. 내 또래로 보이는 한 여성과의 우정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자주 만났
어요. 이틀마다 전화통화를 했고요. 우리는 영혼의 깊은 고까지 서로 나누었지요.
마치 나치 나의 누이와 같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그 전적인 나무, 배타적인 그
우정이 점점 귀찮아지게 되었어요. 마침내 우리는 서로를 정탐하게 되었지요. 그
리고 서로를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우리는 숨겨왔던 감정들을 모두 꺼내
놓으며 이별을 맞게 되었지요. 그 끔찍한 장면이 일어난 후부터는 다시는 만나지
않았어요."
아델라이드는 자신의 열정적이며 소유지향적인 성격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자신만이 상대를 소유하고픈 욕구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
리고 아주 다른 뭔가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요구했으며, 아
무것도 용서할 줄 몰랐습니다. 그녀는 상대의 자유와 자율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 열정적이며 소유하려는 유형의 우정은 거의 언제나 여성들의 문제라
고 기록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우정에 대해 실망스러운 사랑의 비
약을 하고 있을까요? 자신들이 사랑에서는 체험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열기, 강
렬함, 격렬함등을 친구에게서 찾고, 친구에게 그것을 맹세하는 걸까요?
이 여성들은 특이성 또는 진정한 가치를 인정하는 대신, 우정으로 열정을 만들
고 싶어합니다. 이점에 대해 상포르는 이렇게 썼습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사랑에서 차용했던 것만을 우정에 돌려줄 뿐이다."
부재중인 이성의 자리
나는 최근 5년 동안 소유적이고 열정적인 우정의 희생자가 될 뻔했습니다. 하
지만 내가 나누었던 다른 우정은 계시자와 해독제로 쓰였습니다. 내가 재빨리 알
아차렸던 사실은, 그 여성이 나와 커플이 되기를 열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녀의 집 또는 나의 집에서 단둘이 만나곤 했습니다. 가끔씩이었지만,
난 그것이 예술과 정신적인 추구 등에 대해 편안하고 깊이있게 대화하기 위해서
라고 생각했지요.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가슴속에 숨겨둔 채 혼자 살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녀에
게 친구들, 직장 관계 등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만남들은 아무 소용이
업었지요. 그녀는 나를 자기 것이라고 확정지은 듯했어요. 그녀 자신이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을까요? 마침내 우리는 혼자서 친구들을 초대하지 않게 되었습니
다. 정확하게 말해서 부부처럼 지냈던 셈이지요. 나는 그것이 불편했습니다.
그후 나와 함께 외출하곤 했던 남성들을 그녀가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나와 다른 남성과의 교제를 그녀가 비난하곤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내가 다른 사람과 아름답고 즐거운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흥분했습니다. 내가 자기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
는다는 것도 그 이유였고요. 그렇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처럼, 나에겐 그녀만이
유일한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나는 자유의 기쁨과 새로운 얼굴들에 홀딱 반한 나머지, 그녀의 죄수가 되고
만 셈이었습니다. 그녀가 점점 더 가혹해지고, 기분 상해하고, 나를 멸시하게
된 것은 바로 그 당시였습니다. 나에겐 그녀와 함께 지내는 것이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었습니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서 벗어나 있었으니까요.
나는 우리의 순수하고 지고한 우정을 도야하는 대신에 다른 천박한 사람들과 사
귀었습니다. 유머, 웃음등은 언제나 나에게 보디가드 역할을 해주는 확실한 표식
이었습니다. 어떠한 관계에서든 그러한 요소들이 없다면 신중해야만 합니다. 그
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비판을 합니다. 그녀는 투덜거리고, 농담이라곤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시샘과 질투로 병들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나에게 절교의 편지 한 통을 보내왔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우
정, 유쾌한 만남, 마음속으로 그녀를 감히 대신하고 있던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서 그녀는 심한 비난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토록 많은 멸시와 증오, 폭력
등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편지를 재빨리 찢어버렸습니다....
우정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우정은 자비심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헌신과 혼동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정
은 그 신실성의 취향에 의해 정의됩니다. 거짓말, 배신, 도덕적인 범용에 대해서
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잉그마르 버그만은 자신의 전기에서 우정에 관한 아주 아
름다운 글 몇 페이지를 썼습니다.
"우정은 솔직성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정의 유일한 조건
이다. 하지만 그것은 혹독하다."
우정은 존재의 기쁨과 유쾌함을 거부하지 않는 엄격함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멸시하거나 무관심을 유도하는 사람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정은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해야만 할까요? 관용, 차이점의 인정이라는 명목하에
죄를 범하고 횡령을 저지른 누군가를 위해, 약품 거래를 하거나 파시스트적인 태
도를 취하는 사람을 위해, 우정으로 용서하는 것이 필요한 일일까요?
만일 정의, 선과 관련하여 우정의 지표를 제시한다면, 우정은 그 가치가 우롱
당하게 될 때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정은 인간을 해롭게 하는 것과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삶을 해치는 것이며, 사람을 타락시키기 때문입니다.
너그러운 영혼은 살인자, 강간자를 동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를 위해 기도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윤리적으로 우정은 불가능합니
다. 그것이 우정의 한계이며, 동시에 우정의 위대함입니다.
십대한 과오를 범했던 친구들을 전향시킨다는 것은 비열한 깃이 아닙니다. 그
것은 안티고네(그리스의 신)의 방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인간의 감정보다 상
위 차원의 법률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파괴적이고 패륜적인 사랑의 문제를 끝내는 것은 건전한 일입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해를 입히고, 가치를 떨어뜨리고, 또는 가치가 떨어지도록 이
끄는 모든 관계를 거부하거나 끝낸다는 것도 건전한 일입니다.
우리가 친구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완벽한 존재들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마음
속에 진, 선, 미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우정은 상호적인 변화를
할 수 있으며, 서로 경탄할 수 있습니다.
다시 순환되는 관계
우정에는 감춰진 일면이 있습니다. 즉 고백되지 않은 요구, 억제된 열정, 성적
욕구에 대한 억압 또는 두려움, 사랑의 파생 등입니다. 우정은 자신의 진실된 감
정을 감히 체험하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들을 위한 정신적인 피난처의 역할을 합
니다.
우리가 사랑의 시험에서 실패하고 모든 것을 잃지 않으려고 할 때, 우정은 부
득이한 수단 일수 있으며 일종의 시도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 남성은 마음
속에 오로지 친구일 뿐인 한 여성과 사랑의 관계를 갖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아
주 빈번하게 그는 실망하여 멀어져갑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욕구로 인해 우정에 이르게 될 거라는 은근한 희망
속에서 관계를 유지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들은 욕구불만이나 저의 없이, 우정
의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서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불확실하며, 변동되기도 하고 왜곡되는 우정은 특히 남녀 사이에 많이 생깁니
다. 남녀의 욕망은 서로 다르며, 이러한 상황은 자유로운 자신을 허용하지 않습
니다. 26세의 디안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피에르를 만났을 때, 아주 강한 무엇인가를 느꼈어요. 그를 향해 억제할
수 없는, 하지만 물리적인 것은 아닌 어떤 이끌림 같은 것을 느꼈지요. 속박이
없는 영원한 사랑 같은 것이죠. 하지만 그는 고통이나 충동을 보여주지 않았어
요. 어쩌면 그것을 감추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우리는 여러 번 만났어요. 나는 그
에게 지나친 애정의 몸짓을 피하기 위해 자제했지요. 그러나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으며, 그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 이상의 다
른 무엇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차렸어요.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와의
관계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었지요. 점차 그를 만나는 일을 포기하게 되더군요.
그와 우정을 나누며 산다는 것은 나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니까요. 나는 그토
록 다른 것을 꿈꾸고 있었던 거죠. 그와의 관계가 나에게 고통을 주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아요. 내가 신중하게 처신하고 있으니까요."
31세의 말리카는 우정을 열정 또는 애정을 변화시키는 피뢰침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소록을 옮겨 적다가 나에게도 친구가 많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하지만 그
친구들은 나와 함께 사랑을 시작할 가능성이라곤 전혀 없어요. 이러저러한 일들
을 생각하면서 나 자신의 행동을 분석해 보았지요. 내가 만난 남성들에게, 그들
이 비록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우정과는 다른 선택을 하도록 내버
려두었거든요. 그러면서도 나는 온갖 유혹의 유희를 단절시켰어요. 장난 삼아 하
는 연애나, 욕구와 비슷한 것을 즉각적으로 돌아서게 했지요. 나는 나의 이런 태
도를 이해할 수 있어요. 그것은 어린 시절과도 관련이 있지요. 왜냐하면 어머니
는 충분히 나를 기를 수 있었지만, 나를 다른 사람에게 버려두었으니까요. 버림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또다시 그런 고통을 겪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나는 확실한 감정이 아니면 빨리 뿌리치는 길을 택했던 거예요."
애정이 강렬하지 못하기 때문에, 육체가 원치 않기 때문에, 요컨대 두 사람이
우정에서 더 편안하고 자유롭기 때문에, 그 결과로 타당성 있는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우정도 있습니다. 내 친구 상드린느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건 사랑보다 미묘해. 최상의 방법은 상대를 아는 것이고, 아니면 그 가면을
벗기는 거야. 이 비밀스러운 만남이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추억을 남겨주지 못했
기 때문에 난 다시 시작하지 못했어. 그리고 나는 브리앙과 내가 다시 동침하지
않고도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많은 술책을 써보았지. 브리앙은 이해해
주었고, 그는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갔지. 하지만 우리는 친구였어."
이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우정이 다시 순환되는 사랑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혼돈 상태도 아니고 상실도 아닌, 진부함을 가지고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우정에서 싹트는 사랑
사랑이 있는 우정은 혼란스럽습니다. 남녀가 연인 관계가 되고, 서로 나누는
비밀 이야기 또는 공동작업이 사랑의 전주곡이 되기 위해서는 그 어느 것도 충
분한 것이 없습니다. 다미앙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라와 나는 3년 전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만났어요. 함께
점심을 먹거나 저녁을 먹는 일이 많았죠. 나는 그녀가 아름답고 호감이 가는 여
자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우리의 관계에 대해 그 어느것도 상상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나는 그때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져 있었지요. 사라는 솔직하면서도 생기
발랄했어요. 그런 점이 나를 우정으로 이끌 뿐 아니라, 가끔은 신비스럽고 소중
하게 여겨지기도 했지요.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만나는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되
었죠.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솔직하게 주고받았어요. 사생활만 제외하고 말예요.
그러는 동안에 나는 사라와의 우정이 당시 내가 겪고 있던 감정의 혼란을 극복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어느날 저녁, 무슨 광기의 작은 바
람이 불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헤어지기 전에 그녀의 뺨에 키스하게 되었지요. 그
런데 그것이 사랑의 키스로 변해버린 거예요. 정말 예상도 못한 일이었지요. 하
지만 우리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저항하지 않았어요. 그건 아주 행복한 일이었
죠. 그나 저녁의 환희는 그 동안 계속되었던 우리의 우정을 손상시키거나 깨뜨리
지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가 말한 것이 없는 의문은 남아 있죠.' 그날 저녁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달빛 탓이었을까, 아니면 운명의 장난일까?' 하는.... 우리는
한번도 그 순간을 떠올려본 적이 없어요. 그건 서로가 지니고 있는 비밀과 같은
것이니까요."
8. 열린 모임
"나는 나의 집안에 이성 있는 한 여인, 책들 사이로 지나가는 고양이 한 마리,
계절에 따른 친구들이 있으면 좋겠다. 나는 그들 없이는 살 수가 없다."-기욤므
아폴리네르-
고립된 자들의 만남
갓난아기의 요람을 들여다보는 요정들은 아기에게 아름다움, 우아함, 지성등을
양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정을 줄 수는 없습니다. 우정은 개인적인 방식이
기 때문이지요. 또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계속하면서 삶의 다양함과 풍부
함을 즐기려는 욕망이니까요.
요정들은 인간에게 행동의 매력과 두뇌의 명민함에 대해서 도움을 줄 수는 있
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정의 기초를 세우고 성장시킬 수는 없습니다.
서로가 의사를 전달하면서 우정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언제나 위험스럽습니
다. 그것은 자아에서 떠나는 것이며, 상대의 말을 들어주고, 상대에 의해 새로운
문제가 제기될 위험성도 있는 일입니다.
오늘날 대도시에서, 공동의 환희에서, 극장에서, 텔레비전 앞에서, 패스푸드점
에서, 이불 속에서... 외롭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서 웃고, 우편엽서를 보내고, 저녁을 준비하고, 숲속을 걸으며 산책할 것을 제안
할 시간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다른 사람들을 흥미 있게 하고, 풍
요롭게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줄 만하고 받아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얼마나 될까요?
의식적이든 아니든, 고립된 사람은 정말로 우정을 원하게 됩니다. 우정은 사회
계층과 모든 연령층, 모든 직업에서 사람들을 규합하게 하니까요.
그러나 우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 교환하고 공유하는 것이지, 가지고 있는
것을 교환하거나 공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주는 것이며, 스스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무관심하게 있거나 두려워서 몸을 오그리고 있는 대신, 우정을 이룬
관계에 대한 책임감을 갖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건 내 문제야','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나를 감동시키고, 나
자신에게 흥미를 주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우정은 시작됩니다. 그것은
행운의 기적도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운명과 신의 의지를 능가하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탐색입니다.
자아에서 떠나는 것
우정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 사랑의 관계는 벼락처
럼 갑작스레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정은 우선 자유로운 처분을 요하며, 자유
로이 선택하고, 자신과 타자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은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처
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허영이 아니라 자유의 행동입니다.
우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존재에 있어서 중요하고 가장 명확한 것을 비물질적
인 재산으로 건설하는 일입니다. 우정이 있으면 더 이상 세계는 공허하거나 부조
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모습과 의미를 갖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환
자들, 박탈당한 사람들, 죄수들, 노인들은 일상의 양식보다도 방문, 애정, 우정이
훨씬 더 필요한 것입니다.
의사전달의 기술에 대한 많은 강연을 했던 미국인 달르 카르네지는, 1936년 자
신의 책[어떻게 친구를 사귈 것인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신실하게 흥미를 가짐으로써, 두 달 내에 더 많
은 친구를 사귀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호감을 갖기를 기다린다면 당신
은 2년이 걸려도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을 테니까요."
이것은 모든 진정한 관계, 즉 사랑 또는 우정의 정신적인 법칙입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상대의 말을 듣지도 않고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 까요? 이해도
도움도 없이 어떻게 우정이나 사랑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소자아에만 흥미를 갖는다면, 오로지 나의 걱정거리와 나의 행동, 나의
삶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면, 너무 많은 친구를 사귀어선 안됩니다. 만일
다른 사람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면, 판단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고통을 당할까
봐 두려워한 다면, 우정에서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정으로 대담하게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적인 안정과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는 의무적으로, 위협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롭게 지낼 때, 혹은 어둠을 밝히고 그 어둠을 인지할 때
비로소 우정을 나눌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다면 이제 상대는 더 이상 위협적이고 불안정한 대상으로 인식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상대는 당신의 기대, 당신의 공허함에 답하기 위해 오
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을 풍요롭게 하고, 놀라게 하고, 당신이 새로운 삶을 창조
하고 전진하도록 하는 완전한 존재로 인식됩니다.
친구는 기쁨의 원천
우정은 엄격합니다. 이 말을 반복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고대 철학자들로부터 우정은 귀족적이며. 예의에 속하는 것이라고 들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우정은 왜 엄격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정을 맺을 만한 모
습을 보여주어야 하고, 그 관계를 통해 행동하고 확장하고 진정되어야만 하기 때
문입니다. 우정은 존재를 위한 소유가 가벼워져야 하고, 사랑하기 위해 권력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상기하게 합니다.
우정은 타인들 사이에서의 기쁨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의 진실된 공유에
서 생기는 기쁨을 줍니다. 진부한 일들을 나누는 대신 두 사람이 서로 만나고 이
야기하고, 자율적으로 서로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때 우정은 코끝을 보여주듯이
살며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의사소통은 우정을 계속해서
나누도록 권유하며, 우정을 원하도록 인도합니다.
우정은 기쁨, 즐거움, 조그만 선물, 놀라움, 배려, 다양한 축제를 포함하고 있습
니다. 상대를 생각하는 것, 그의 취향과 생일날 등을 기억하고 축하해 주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상대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내어 방문하고, 편지를 쓰고, 함께
산책하는 일등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자동차들로 넘쳐나는 불안한 도시에서 사람들은 피로에 지치게 됩니다. 그리고
저녁이면 텔레비전 앞에 혼자 않아 있거나 가족 단위로 모여 있게 되지요. 물론
두 친구가 드물게 만나거나 서둘러 만나다 해도 우정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서로에게 편지 쓸 내용이 점차로 줄어드는 경우가 아니라면, 규칙적인 상응이 이
루어지고 있는 거라면 우정은 알맞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정은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것은 아닙니다. 한가한 부인
들의 심심풀이도 아니며, 웅대하게 꾸민 주방을 갖춰놓고 하녀를 둘 정도의 부자
들이 갖는 안락도 아닙니다.
조감독을 맡고 있는 내 친구는 탁자 하나를 놓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스튜디오
(사무실 겸 숙소)에 살고 있을 때도, 아침, 점심, 저녁을 얼마나 준비했는지 모릅
니다. 그녀는 예쁜 식탁보를 펼쳐놓았고, 친구들은 둥그렇게 둘러앉았습니다. 그
녀는 친구들이 서로 만나 우정의 열기가 방안에 가득하도록 하려고, 친구들의 육
감미와 사랑으로 넘치는 식사를 즐기면서 그것을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모릅니
다.
당신의 주위를 잘 살펴보세요. 친구가 없는 사람들은 초대하기를 망설이고, 심
지어 커피 한잔 대접하는 일도 주저합니다. 그들은 추운 듯이 웅크린 채 자신들
만을 위한 주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질러놓은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전화하기를 망설이는 것입니다.
나는 말없는 협상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세련된 우정이라 할 수
있는데,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과 현재 상태를 재빨리 알아차리는 태
도는 직접적인 상호 이해로 이끌어줍니다. 친구는 당신이 부르기도 전에 벌써 거
기에 와 있거나, 질문이 제기되기도 전에 알맞은 대답을 합니다. 그 계제에 알맞
게 전화를 하거나 당신의 일상을 빛나게 해주는 작은 카드를 보내주기도 합니다.
또 당신이 고뇌의 강가에 있을 때, 친구는 당신을 웃게 해줍니다.
공유되는 사랑, 되찾은 시간
친구들은 행동, 여가, 만남의 관점에서 파악되는 존재의 계속성을 보장합니다.
그것은 분산되고 간헐적이며, 반점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여
기서 존재, 사물, 기원, 영원성 등으로 제시되는 사랑의 장점을 찾기를 원할 것입
니다.
삶에서 그 관계가 깨어지기 쉬운 순간에 여러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하고, 실천
에 옮기기 위해 관계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조지안느와 이네스의 이
야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한 여인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7살 무렵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자주 어울렸으며, 서
로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원래 외국인이었던 이네스는 멀리 떨러
져 있는 나라에서 떠나왔으므로, 가능한 한 우리들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우리는
스무 살이 되던 해쯤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4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네스는 심각한 의기소침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중에 벗어나게 되기
는 하지만요. 그 시련에 따라 그녀는 어린 시절의 모든 친구들의 자취를 되찾기
로 마음먹었고, 그들에게 그 소식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모든 친구들은
그부름에 응했습니다. 이때 제일 먼저 응답을 보낸 친구가 바로 조지안느였습니
다. 조지안느는 먼 나라에 있었지만 이네스를 방문하러 갔습니다. 이 방문은 잊
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떨어져 있었지만, 각기 다른 우리들의
경험은 정말로 소중한 순간을 준비했던 셈입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순박함과
솔직함 그대로, 그 시절로 되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또 다른 예로, 현재 60세 가량인 한 농부에 관한 얘기를 들 수 있습니다. 샤를
은 지방의 큰 도시에서 농장과 포도재배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결혼하여 자식
과 손자까지 둔 그는 어느 나 문득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졌고, 그래서 일종의 경
찰과 같이 우정어린 탐문을 시작했습니다.
그 탐문은 어린 시절의 가장 친했던 동창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수개월동안 끈기 있게 그 일을 계속했는데, 옛친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해
서는 열차는 타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그들 중 몇몇을 다시 만
나게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초등학교 시절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자리에 앉았
던 같은 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각기 10살과 11살 때 헤어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50년후에 다시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종사하는 직업도 달랐고, 거의 모두 가정을 가지고 있었
지요. 관대한 우정의 기적에 관해 가끔 회자되는 말로는 이런 것들이 있지요.
"정말 옛모습 그대로구나! 난 널 완벽하게 알아보겠는걸."
이렇게 해서 그들은 장난기 있고 소란을 피워대던 어린 학생으로 돌아간 셈입
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정은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을 능가하며, 시간과 함께 개선됩니다. 포도재배자
인 농부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정은 그 여행이 '길다'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정은 죽음을 면할 수 있게하고, 무시할 수도 있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정은
영원히 상대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지 않으며, 상대를 시간 속에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풍요로움이 주는 선물
"우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신뢰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뿐 아니라, 따사로움
을 되찾고 삶에 대한 사랑을 되찾는 사람들이다"라고 세르주는 말합니다.
미소, 웃는 얼굴, 직선적인 눈길 등은 우정의 첫 관문을 통과하는 일입니다. 어
두운 표정을 지으며, 쇠약하고, 찡그린 태도를 취하면 취할수록 그 사람은 우정
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미소짓는 사람, 즐거운 사람은 공
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정을 나누십시오. 당신은 친구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친구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생기가 넘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삶이 언제나 미소짓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친구들이 많은
것입니다.
우정은 삶과 공통되는 결실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우정에게 문
을 열어준다면 새롭고 아름다운 만남들이 언제나 가능하며, 친구들의 모임이 확
장되며, 우정은 퍼져나가게 됩니다.
나는 나의 직업활동을 통해, 또한 다른 친구들의 중개를 통해 활동적인 많은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정의 의미 그 자체를 알았습니다. 그 의미는 '공
유'이며 '순환'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친구들을 감추려는 생각, 자신을 위
해 조심스럽게 친구들을 보호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 나는 다른 사람들의 집에서 만났던 친구들을 살짝 떼어놓고는 행복했
습니다. 그들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여들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내
친구들 중 몇몇은 무척이나 서로 존중하며, 나 없이도 서로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나는 기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관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생 텍쥐페
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작은 여우가 말했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삶의 순환을 허용하는 일입니다. 내가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관심과 애
정을 보인다면 그는 나에게 애정을 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아주 숨가빠질
것입니다.
미, 사랑, 삶의 풍요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과 애정을 돌려줄 누군가에게 내가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각각은 어느날 또 다른 대상으로부
터 관심을 끌고, 삶의 측면에서 예기치 않았던 다정한 한마디의 말을 들을 수 있
습니다.
결론 결혼하기
"특별히 고결한 사람들을 친구로 삼으라."-피타고라스-
초월성의 가치
우정은 사생활을 구속하지 않지만, 사회적 영역에 접하면 인간이 더 넓은 지평
선을 향해 열리도록 하는 감정입니다. 미덕과 유사성이 있는 우정은 애정과 윤리
를 결합하면서 평화, 지연과 사람과의 화해, 형제애를 향해 열리게 됩니다.
우정은 개인들의 차이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평등, 자유, 권력, 정치, 전쟁
등에 관해서도 당연히 의문을 제기하도록 인도합니다.
우정이 나타내는 도덕적인 가치와 개인적인 책임감은 우정을 체험하는 사람들
에게 정당한- 정의, 특히 조화와 관련하여-것에 대해 질문하도록 부추깁니다. 우
정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인간 관계에 도덕성을 부여해 줍니다. 또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이 이데올로기가 좌초했던 초월성을 부여해 줍니다.
우정은 자유로운 모습, 반순응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혁명적인 감정은 아
닙니다. 그렇지만 발전의 방향으로 진행되며, 성장, 구성, 계속성의 가치를 지닙
니다.
피에프 솔리에는 우정에 대해 이렇게 단언했습니다.
"우정은 새로운 가치를 알려주고 찬양합니다. 만일 종교적, 관념론적인 신념이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를 혼란스럽게 하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면, 여성의 가치는
복귀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실한 남성 속에서의 여성성, 그리고 여성의 이중성에
사랑의 미덕이 표현될 수 있도록 가치가 부여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충동, 배설
욕, 성욕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이러한 에로스적인 형식은 새로운 대화, 새로운
말, 새로운 복음을 야기시킵니다. 나는 정신화된 그 에로스, 우정이 잠겨 있는 잠
겨 있는 자유로운 사랑을 위해 그것이 완화되고 변화하리라 생각하며, 그렇게 되
기를 희망합니다."
함께하는 삶의 아름다움
현대인들이 우정에 대해 갖게 되는 호의는 실제로 우정을 나누고 있음을 나타
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정을 이슈로 간주하고 있으며 아직 그 우정의 원천
을 밝혀지지 않은 가치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 관계의 갈증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텔레비전
을 보면서, 진정제와 수면제를 마시면서, 컴퓨터통신, 미니텔, 구인광고와 온갖
종류의 치료요법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심리적 불안과 애정의 공허함을 감춥니다.
우정으로 이끄는 첫 행동을 나타내는 대신 그들은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기를 바
라고, 이해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종 대중매체를 통해서 자신들의 고독을 채워줄 수 있는 새로운 세계
를 대신 체험하곤 합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지요.
우리는 이제 살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이성을 만나기를 기대하지 않습니
다. 위대한 사랑에 그다지 투자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정을 향해 더욱더 문
을 열 수는 있습니다.
남자에서 여자에 이르기까지, 우정은 성에 대한 지나치게 오랜 전쟁에서 일시
적 휴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전투(정복, 유혹, 소유욕, 복수 등)를 중단하는 것
이며, 몹시 힘들고 빈약한 싸움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또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대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휴전은 사랑과는 달리 남녀 사이를 기본적인 결합과 평화로 인도합니
다. 또 사랑의 갈등에서 대화로, '자신을 위한 각각'에서 '함께하는 것'으로 넘어가
는 방법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정은 사생활의 장벽을 넘어 새로운 사회적 관습을 이끌어내기도 합니다. 개
인적인 생활에서 체득된 우정의 경험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행동에 영향을 주
게 됩니다. 즉 예의, 정중함, 친절, 협력등에서, 우리는 "시민들이 우정의 덕을 실
행한다면 국가는 정의롭게 될 것"이라고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다시 떠올
리게 됩니다.
우정은 사람들이 서로 무관심하지 않도록 해주며, 타인들과 사회생활, 세계의
발전에 무관심해지지 않도록 합니다. 그리고 시민의식과 책임감을 일깨워 줌으로
써, 사회 속에서 개인적인 변천을 이룰 수 있게 해줍니다.
이것은 각 개인들을 보다 넓고 초월적인 관점에 위치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
에서 우정은 경계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부여해 줍니다. 그래서
우정은 기쁨이 넘치는 사랑이라고도 합니다.
자유, 평등, 박애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우는 이 표어는 사실 우정의 표어이기도 합니다. 우정
은 자유의 학교입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상대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며, 우
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존재, 감정, 행동 등)을 수용할 수 있게 해줍니다.
우정을 돈독히 한다는 것은 모든 모임, 온갖 허위적인 설득공작, 파벌적인 지
배력에 대한 일종의 튼튼한 대응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수상쩍은 종파와 무리들이 어떻게 퍼져나가고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더러는 이 종파 속에 들어가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혼자라고 느끼게 되고, 함께 교제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러한 집단들은 개인의 모든 생활에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친구들 사이를 떼어놓
고, 그들을 제거하려고 노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집단에 들어갈 뻔한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집단
속에서 우정의 힘을 얻고 인간의 이상을 추구할 수 있으리라 믿지만, 지배층(혹
은 포교사)들은 자기 집단 이외의 사람들을 멀리하거나 거부하도록 충고합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정신적인 변화는 이미 족쇄와 같은 것이니까요.
가수인 자닌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정은 이타성에 근거하여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이때 그 인간 존재는
죽음을 공포에 대한 반항 또는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만일 타인을 하나의 선물로 받아들이거나 상호간의 풍요로움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대상으로 간주한다면, 우정은 언제나 가능한 일입니다. 여기
에서 '결합'은 힘을 만들고, 우정은 공동체를 만들어내며, 박애정신이 생겨나게
합니다.
일반적인 공동체의식의 경우, 우리는 실제적의 적이건 상상의 적이건 그 적에
대해 서로 연대책임을 지게 됩니다. 박애정신의 경우에는 보다 더 공고한 관계가
되기 위해 다시 규합되기를 선택하며, 그 구체화에 의해 서로 관계가 강화됩니
다. 박애정신은 결국 자신에 대한 고집을 버리고 타인을 향한 열림을, 그 명성을
선택하게 됩니다.
미셀은 20년 가까이 나누었던 우정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야미나는 내 여자 친구인데요, 카빌리아 출신으로 가문은 아주 보잘것없었지
요. 우리는 초등학교 출구에서 만나게 되었어요. 각자 자기 아이를 기다리고 있
었거든요. 그녀는 한 예쁘장한 사내아이에게 손짓을 보냈어요. 그녀의 아들 아센
이었죠. 그런데 그때 우리 두 사람 모두 그 아이에게 시선을 보내게 되었죠. 내
딸은 크리스틴인데, 우연히도 이 애들은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났던 거예요. 여
기서 유사성이 생긴 거죠. 그후 나는 두 가정의 사건들에 자주 관련되었고, 축제
에 초대를 받기도 했죠. 각자의 종교생활에서 신에 대한 탐구자이기도 했던 우리
는, 기독교의 축제와 회교도의 축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그리고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죠.'즐거운 부활절을!','성인 라마당..."이라고요. 시간이 흐르면서
야미나는 조금씩 어린 시절의 아픔을 털어놓았고, 그 다음에는 여자로서 자신이
느낀 배신감, 꿈과 계획 등을 털어놓게 되었지요. 마찬가지로 그녀는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행복을 찾게 하려는 그녀의 질책을 존중하
고 있어요... 우리는 파리 근교에 살고 있었지만 그다지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전화통화는 자주 했어요. 내가 전화를 걸때면, 야미나는 '당신인 줄 알고
있었다니까! 라고 탄성을 지르곤 했어요. 이건 마음이 서로 통한다는 표시 아니
겠어요?"
우정과 사랑을 동시에
우정과 사랑을 동시에 나누며 살 수 있는 귀여운 장난꾸러기들이 있습니다. 그
들은 그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겸하고 있거나 그러한 능력을 처음부터 타고난
것일까요? 아니면 관대한 마음을 가진, 열정적인 한 개인의 특성일까요?
이 점에 대해 피에르 솔리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정을 나누는 재주를 타고난 사람들이 있을까요? 단지 우리는 모든 사람들
의 평등성을 주장하기 위해 타고난 본능을 물리치려는 과정에 있어요. 인간의 권
리, 시민의 권리를 장려하기 위해서 말예요. 예를 들면, 나는 음악과 피아노에 전
혀 재능이 없지요. 이를테면 악착스런 노력과 고통을 극복하면서,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우정 어린 식사때에 한 소절을 제대로 연주하는데 성공하게 될거
예요. 하지만 결코 위대한 연주가는 되지 못할 거예요.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으
니까요. 그건 우정에 있어서도, 일반적으로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요."
내가 보기에 우정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며, 자만심 뒤로
숨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연다'는 의미로 "예" 라고 말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인들, 동양인들, 그리고 많은 전통적 사회는 남성들 사이에서 주로 우정
관계가 성립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동물들에게 강, 나무, 산 등에게 보
여주는 우정은 당연히 통일성의 감정으로부터 생겨납니다. 하지만 그건 관념에
불과한 우정이지요.
많은 서양인들은 시간과 돈, 능력 등을 필요로 하는 산업문명 사회 이후로 자
신들의 지상에서의 토대와 하늘에서의 토대를 잃었습니다. 자신으로부터 이탈되
어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은 고아가 된 그들은 자신들의 견고함을 위해 행동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신의 틀에 가두
고, 타인들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잃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며, 자신들의 심오하고 정
신적인 영역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관계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포기하고, 자신에 대해서도 이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
니다.
계층, 종족, 가정, 고향, 그리고 다른 소속 관계에 대한 개인의 감정은 이 지구
와 별리 총총한 하늘의 아이가 되는 알고 있으며, 하늘과 땅에는 자신의 종족이
없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은 그 누구보
다도 우정을 지향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두 사람의 흥미나 공동의 취향, 공동의 작업을 통해 우정이 시작
되며, 그후 더 내적이고 깊은 교류를 통해 우정을 공고히 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의 상황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정이 생기고 지속
되는 것은 바로 중요한 것을 함께 공유하며, 마음과 마음으로 대화함으로써 가능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음의 진정한 기쁨
외적인 관계는 내적인 관계의 거울입니다. 타인들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이
미 자신과의 만남의 길을 튼 셈입니다. 우정을 통해서 삶의 질을 높여나가는 사
람들은 우선 타인들과 평화롭게 지내면서 자신의 내적인 갈등을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안정하지 못하고, 분열되거나 자신 속에서 반항을 일으키는 사
람들은 실제로 그러한 경험을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은 그 내적 경험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우정과 사랑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장점
이 있는 관계는 두 사람의 장점을 밖으로 드러냅니다. 평범하거나 피상적인 관계
는 더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개인들게에만 책임지울수 있는 일입니다.
특별한 우정, 위대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그 두 사람이 존재의 특별한 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고 지속되는 것입니다. 내 친구들 중 한 친구는 이런
말을 하더군요.
"온전하고 열정적인 모든 사람은 혼자 존재할 뿐이며, 동시에 사랑으로 둘러싸
여 있다...."
수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
던 것이 소심성에 대한 대담성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그 욕구를 숨
기고 부인한다 할지라도, 나는 그들이 모두를 사랑하려는 욕구와 사랑받으려는
욕구를 스스로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정을 얻기 위해서는, 처음에 친구로 다가가려는 용기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
러면 만남의 경험으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언제나 우정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
각하게 됩니다. 능동적인 행동은 갈망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다는 그 사실에
서 전체적인 자유로 강화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인터뷰를 했던 사람, 나를 치료했던 의사, 유명하거나 인기 있는 사
람, 전문적인 직위가 있는 사람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이끌어 내거나 수용하는
것을 결코 난처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나는 언제나 그들과 동등
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정과 사랑의 감정에는 어떠한 장벽도 편견도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대담성은 우정, 사랑, 애정에 대한 가치의 인식을 통해 그 사람을 형성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단계로 인간적인 관계를 자리매김하는 것입니다.
나로서는 언제나 우정을 만들어내고 지켜야 한다는 견해가 삶의 태도를 결정
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이제까지 파리에 머물러 있었던 이유는 직
업상의 이유 때문도, 내가 체험하지 못했던 관습상의 안정성 때문도 아니었습니
다. 그것은 내 친구들이 파리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는 자주 만날 필
요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끔은 불쾌한 업무를 수용할 필요가 있었던 것도, 나는 언제나 우정의 분위기
에서 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직업에 있어서의 걱정거리보다는 삶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과 함께 산책하거나 저
녁식사를 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이니까요. 그것은 침묵이나 신성한
존재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선물들이니까요.
어쩌면 몇몇 친구들이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었
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나를 절망으로부터 구해 주곤 했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전화통화를 하던 한 친구는 내가 슬픔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
고 즉시 나를 보러 왔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며 그 친구가 나를 위로해 주겠다고
제안할 때, 나는 그 기적에 대해 경탄했습니다.
브뤼셀에 살고 있는 친구들은 내가 건강이 안 좋다는 소식을 듣고는 "네가 좋
다면, 우리는 열차를 타고 너를 만나러 가겠어" 라고 말합니다. 나는 고마움으로
와락 울음을 터뜨리게 되고, 이 세상은 결코 황폐하고 메마른 것이 아님을 실감
하게 됩니다.
모든 인간 존재는 애정, 도움, 감정을 주고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삶의 취향,
삶에 대한 감사의 표시는 죽음의 자극과 어두운 관념보다 더 강한 것입니다. 행
복했던 원시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며, 본래적으로 상류층의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또 반드시 사회적 존재로 인간을 축소시킬 필요
는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아 마땅한 인간 존재는 관계망의 존재이며, 동시에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이 말은 고독한 존재인 동시에, 땅과 하늘과 뗄 수 없는
존재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인간인 것입니
다.
사랑한다는 것, 마침내
우정에서 사랑을 구별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일일까요? 내가 보기에 사랑한
다는 것은 뉘앙스, 이미지, 사용된 말과 행위들이 어떠하든 인간에게 가장 중요
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친구가 있다'는 것은 우리를 안심하게 하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친구와의
관계에서 우정을 생기게 하고 우정을 부여한다는 것은 더 귀한 일입니다. 친구를
가진 행복한 소유자로 행동하기 보다는 세상이 밝아지도록 하기 위해서 우정이
생기게 하고, 결국 우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보다 더 가치 있는 일입니다.
우정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배려, 이해하기, 인내, 정력, 애정, 기쁨 등을 발견
하게 해줍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능가하며 끝없이 우리에게서 벗어나는 것,
즉 사랑에 이르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어떠한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
며, 문제를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 모든 관계를 허용하는 일입
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의 이야기를 끝날 때, 우정이 지워질 때, 왜 후회가 남을까
요? 사랑의 끝이 사랑의 실종은 아닌데도 말입니다. 사랑은 일시적으로 무대의
막을 내린 것처럼 보이지만, 내일은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타나게 될 것
입니다.
만일 태초에 사랑의 신이 우리를 사랑했더라면, 우리는 정말로 사랑할 수 없었
을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 생기게 되는 것
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그 사랑의 통과를 허용하거나, 사랑으로 하여금 우정, 애타주의
,또는 정신적인 우애쪽으로 기울게 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사랑에게 다양한 이름
과 다양한 관습을 부여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총체적인 모습으로 있는 것이지 나
누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사랑과 우정에 관한 글들이 결코 사랑의 절박한 사건과 그 기쁨들을 대
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에 관한 우리의 표현은 사랑의 신이 비
쳐주는 빛 앞에서 떨고 있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의 신이 나에
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출처, 네블,인드라의그물
'OUT > 읽고싶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침묵 / 르 클레지오 1 (0) | 2007.06.02 |
---|---|
기호 개념과 역사 / 움베르트 에코 (0) | 2007.05.31 |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로 살아가는 법 90 가지 2 / 자크린느 클랭 (0) | 2007.05.29 |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로 살아가는 법90가지 1 / 자크린느 클랭 (0) | 2007.05.16 |
히페리온 / F. 횔덜린(Friedrich Holderlin) (0) | 2007.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