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김충규 시모음 본문
1965년 경남 진주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8년 <문학동네 > 로 등단
2002년 시집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
천년의시작
2003년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 문학동네
2006년 <물 위에 찍힌 발자국> 실천문학
현재 <문학의전당> 대표
밤이라는 것
하늘에 어지럽게 찍혀 있던 새와 구름의
발자국들이 땅으로 내려오는 시간, 땅거미가 진다
그 발자국들이 지상의 멍들을
꾹꾹
누르며 밤으로 스며든다 앓는 소리를 내며
서성이던 벌레들은 잠 속으로 눕는다 혹은
제 가벼운 껍질 속으로 생애의 끝을
눕힌다
제 껍질이 곧 수의인 벌레들,
한 어미는 수의도 마련하지 못하고
두 아이와 함께 아파트에서 추락했다
세상이
잠시 쑥덕거렸지만 이내 고요해졌다
깊어 갈수록 밤은 곪는다
문드러진 달이 거대한 지문을
지상의 반쪽에 꾹 찍고 희미해져
간다
메워버린 우물들이 땅 속에서 울렁울렁 우는 소리,
지상으로 범람한다 지친 몸을 지탱하던 뼈들이 금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몰래 집을 나와 골목을
서성이는 사람들,
거미가 되어 숲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
제 멍을 꾹꾹 밟으며 서러운 노래를 부르다
껍질만 오롯이 남겨놓고 지상을 떠나가는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밤이 그들을 지워버린다
새에게서 숯내가 났다
후끈 달아오른 꽃들이
향기를 폐수처럼 콸콸 땅으로 쏟아내고 있다
그 향기에 취해 여드레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콧등이
벌겋게 달아올라
성냥불만 갖다 대면 이내 화상을 입을 것 같던 꽃나무,
그제야 어쩔 줄 모르고 허둥거리다
바람의
매질에 온몸이 퍼렇게 질려 간다
세상 곳곳에서 반점처럼 잎사귀가 돋는다
어디서 날아온 초라한 새 한 마리
가지 사이에 숨어 고개
떨구고 가느다랗게 떨고 있다
그에게서 숯내가 물씬 풍긴다
지는 꽃들이 그 새를 발견하고는
허공에서 잠시 멈칫,
하다가
땅바닥에 닿기도 전에 파르르 흐느낀다
흐느낌의 물결이 사방으로 번진다
벌레
하늘에서 자잘한 벌레들이 꼬리를 물며 내려오는 것같이
비가 숨소리를 참으며 꼬물꼬물 내려왔을 때
평소 다소곳하던 왜소한
나무들이
갑자기 몸이 가려운지 이리저리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세상이 한 척의 배처럼 잠시
기우뚱거리는 듯했으나 침몰하지
않았다
나무 뒤편의 앞집 담장 미세하게 갈라진 틈마다 꼭꼭
숨어있던 어둠과 햇빛의 알갱이들이 빗물에 서로
뭉쳐져 땅바닥에
철버덕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어디서 기어 나온 벌레 한 마리 비의 화살이 괴로운지 연신
입을 꼼지락거리며 제 몸으로
가느다란 고랑을 파며
비를 피하려는 듯 이동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으나 벌레는
눈물을 찔끔찔끔 쏟아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벌레가 지나간 자리, 손으로 만져보지 않아도
다른 곳보다 더 따뜻했다 이무기 한 마리가
빗줄기 사이를
뚫고 속도를 내며 하늘로 오르는지
그걸 가려주려고 잠시 천둥이 치고 번개가 내린 사이
벌레는 아무 신음소리도 내지르지 못하고
점점 시야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헛것
물 속에 잠긴 달이 처연해서 손가락에 물을
묻혀 내 마른 눈썹에 발라보는 밤,
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소리
물 위에
뚝뚝 떨어진다 물 속의 달이
거기 자리잡고 살겠다는 듯
환하고 가느다란 뿌리를
사방으로 뻗고 있다 그 뿌리들
사이에서
칭얼거리는 물고기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들과 함께 나도 돌아다니고 싶다
물의 표면 고요하지만 물 속은
물고기들이 일으킨 물결로 사나워진다
그 일렁거림에 몸을 맡기면 지느러미가 없이도
편안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
물
속 저 환한 것이 달이 아닌
헛것이라고 말하지 말아요
헛것이라도 나는 달이 좋아요
저 달이 태아처럼 부풀고
있잖아요
갑자기 내 배꼽이 아려요
태아시절의 내 탯줄이 그리워요
내 젖은 눈썹 위로 떨어진 달빛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내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물 속으로
얼굴을 비춘다
헛것! 내 얼굴이 안 보인다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는 대체 누구?
눈동자
우리의 눈동자가 보는 것은
망막에 맺히는 형상만이 아니다
눈구멍 속에 잠긴 절반의 뒷편 눈동자가
우리의 막막한
심연을 관찰하고 있다
노출된 반쪽 눈동자의 망막에 맺히는 형상과
노출되지 않은 반쪽 눈동자에 맺히는
우리 심연의
형상이 다정하게 만날 때
그때 우리의 눈동자 전체는 가장 투명해진다
우리의 심연이 깊은 어둠에 잠겨있을 때
노출된 반쪽
눈동자가 보는 것은 헛것에 불과하다
그때가 귀신이 기습적으로 몸속에 침투하는 때,
그러므로 귀신에게 몸속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우리 심연이 언제나 환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법
허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노출된 반쪽 눈동자의 망막에 귀신이
일렁거리는 날은
우리의 심연이 아무리 환한들
우리 몸과 영혼이 시름시름 앓게 되는 법
아, 잠에 들어 눈동자 전체가 정전
상태일 때
그때가 어쩌면 가장 평온한 순간인지 모른다
눈 감고도 펼쳐지는 꿈의 영상을 관람할 수 있으니
잠자리에 든 우리
몸이 일시적인 시신의 상태라
귀신이 수작을 부릴 까닭이 없으니
시집 <물 위에 찍힌 발자국> 2006년 실천문학
통증
저 일몰이란 것, 밤이 되기 전에 보여주는
하늘의 통증 빛깔이다
통증을 참으며 밤의 캄캄함을 견디는 하늘의
살갗에 돋아나는 별은 통증의 열매이다
지상에서 통증 가진 사람만이 피멍 들도록 입술 깨물며
별을 더듬으며 시간의 잔혹을
견뎌낸다
자궁을 막 빠져 나온 신생아는
그 어미의 통증 덩어리인 것,
신생아가 태어나자마자 우는 것도
이내 눈뜨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무에 열린 열매를 쳐다보며
입 속 가득 달콤함의 침이 고인 사람아,
그 열매는 나무의 통증인 것
통증으로 쑤시는 생애를 살아온 또 다른 사람에게
그 열매는 피가 굳어버린 멍으로 보인다
시집 <물 위에 찍힌 발자국> 2006년 실천문학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