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임찬일 시모음 본문
시인 一風(南雨) 임찬일
1955년
6월18일[음력 4월28일] 전남 나주 출생
1983년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6년 월간문학 단편소설 당선
1986년 중앙일보 전국 시조백일장
장원
1986년 스포츠서울 시나리오 당선
19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199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9년 임찬일 시집
1권 알고말고 네 얼굴 출간[문학촌]
1999년 임찬일 시집 2권 못다한 말 있네
출간[문학촌]
2000년 임찬일 시집 3권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오면 난
그쪽 하늘부터 바라본다 출간[문학촌]
2001년
임찬일 장편소설 소설 임제 출간[창해]
2001년 임찬일 시집 4권 내게로 온것들은 눈이 슬퍼라
출간[창해]
2001년 6월 1일[음력
4월10일] 47세를 일기로 타계
해바라기
얼굴만 좀 볼 수 있다면
목이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 서 있겠다 여름 날 내내
그대 창가에 내 키를
올리다가
날이 저무는 시간
나는 못내 고개를 떨구지만
환한 불이 들어 온 그대 방 높이로
다시 내 마음을 밀어 올릴 수
있는 건
오직 그것만이
그대에게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얼굴에서 그리움이 익어 익어
씨를 남기는 이 사랑
오직
발돋움치는 것만이
그대에게로 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시집, 못다 한 말 있네(문학촌, 1999) 중에서
소나기 Ⅱ
지상의 모든 것들이 더욱 청춘일 때
그들의 영혼이 푸른 잎을 달고 나부끼듯이
나는 너를 갈망하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후줄근한 모습으로
단숨에 뛰어 올 수 있겠느냐
참으로 긴 발을 내려딛고 와
너의 중심에서 젖어 버린
이 하얗고도 축축한 영혼
누군가의 마음으로 뛰어드는 일이
살아 있는 날의 사랑이라면
기꺼이
내 몸을 받아주겠느냐
나는 네 이마에서 흐르고
손등도 적시지만
그보다는 네 가슴 속에서
콸콸 부서지는 물소리 내며
네 사랑에 섞여 흐르고 싶다
그토록 퍼붓던 내 마음을
이제 조금 알 것도 같으냐
시집, 못다 한 말 있네 중에서
봄나물
말이 봄이지 아직 땅 밑은 덜 녹은 때
어머니는 어제 낮부터 캐 모은
봄나물 보따리를 이고 새벽버스로 떠나신다
숨죽기
전에 저울에다 달아야 근수가 더 나간다며
단돈 몇 백 원 더 받기 위해 첫차를 타시는 것이다
물 빠진 수건으로 얼굴 옆을 가리고
허둥지둥 집을 나서시는 어머니
누가 저 나물을 삶고 데쳐서
풍성한 식탁을 꾸미는 것일까
도회지의 시장이나 길거리
가판대 위에
한 무더기씩 봄을 얹어 놓는 사람이
젊고 예쁜 나물 캐는 봄처녀가 아니라
늙고 가난한 내 어머니였었구나
나는 새벽 바람 탓인 줄 알았는데
그 사실 때문에 두 눈을 찔끔거린다
아침 밥상에는 어머니가 팔다 남은
봄나물이
올라와 나를 나를
기어이 눈물나게 만든다.
시집,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 오면 난 그쪽 하늘부터 바라본다(문학촌, 2000) 중에서
어떤 그릇을 생각하며
불보다 좀더 뜨거운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하자, 가령 네 눈빛이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 불길 같은 사랑 말이다
우리들 마음도 뜨겁게 지지면 무늬가 생기지
문신처럼 새겨진 국화무늬나 대나무 이파리 모양도
알고보면 뜨거운 화상 아니더냐
그 흉터의 아름다움 속에서 잠자는 불을
보아라, 오히려 뜨겁고 활활 타오르지 않느냐
독짓는 옹기장이의 눈빛이나 마음처럼
우리도 좀더 불 같은 사랑으로 화상을 입으면
그 마음의 지울 수 없는 무늬를 증거 삼아
한 개의 아름다운 그릇이 될 수 있을 텐데
청자빛은 아니더라도 분청사기처럼 수수한
흙빛깔 사랑 한 개쯤은 구워낼 수 있을
텐데
거듭 알고 보면 이 세상 사랑이란 사랑은 모두
뜨겁게 뜨겁게 가슴을 지져 놓은 화상
아니더냐.
시집, 못다 한 말 있네 중에서
알고 말고, 네 얼굴
(99년 세계일보 신춘 당선작)
옛 친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함께 다녔던 국민학교를 들추어내고
그때 가까이서 어울렸던 친구의 이름도 떠올리고
그제서야 자기가 아무개라며
나에게 묻는다
기억이 나느냐고
이것저것 지난 세월에 묻은 흔적을 증거삼아
비로소
서로를 확인하는 이 낯선 절차
그래, 물 같은 세월 흘렀으나 거기에
비추듯 남아 있는 우리들의 코 묻은 얼굴과
남루했던
시절
흑백사진처럼, 아니 아니 눌눌하게 빛바랜
창호지처럼 다소 낡은 모습으로 떠오르는
그 무렵의 일을 이제는 옛날이라고
싸잡아
네 이름처럼 불러야 되는구나
친구야, 오랜만이다 애들이 몇이고?
그래, 나랑 똑같구나 딸 하나 아들 하나라니 !
이 한통의 전화가 걸려 오기까지
삼십 년이나 걸려야만 했단 말이냐
서로 연락도 하고 언제 한번 만나자며
전화를
끊었지만 우리들의 기약은 다시 아득해지고
무슨 꿈결처럼 잊혀져서 나는 또
가물가물한 너의 얼굴을 영영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
남은 것이라곤 적어 놓은 너의 전화번호
연락처를 알았으니 가끔 전화라도 하마
만나자, 만나자, 하다보면 그 말이 씨가 되어
이 세상 어느 한구석을 차지하고서
끊어진 것들 가슴속 이야기로 이을 날이 있겠지
심사평 : 유종호 , 신경림
임찬일의 '먼지 같은 뉴스', '공지천에서', '알고 말고, 네 얼굴' 등은 꽤 연륜이 느껴지는 시들이다. '알고 말고, 네 얼굴'은 일상적 삶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삶에 대한 회의와 체념을 주제로 하고 있다 하겠지만 "끊어진 것들 가슴속 이야기로 이을 날이 있겠지"와 같은 구절은 작자가 가진 긍정적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호감이 간다. '공지천에서'도 그의 세상을 보는 눈이 만만치 않음을 말해준다.
슬픈커피
헤어진 사람하고도 그때 좋았을 당시에는
가슴에 프림처럼 감미로운 이야기를 풀어 저으며
따뜻한 눈빛 아래 한잔의 커피가 있었다
추억은 이제 벽에 걸린 찻잔 모양 물기가 마르고
오이씨처럼 풋풋한 눈물로 슬픔도 푸르게 자라던 그 시절을
혼자 빠져 나와 또 한잔의 커피 앞에 앉는다
갔다, 내가 붙들지 못한 사랑의 발목
냉커피처럼 내 가슴을 식혀 놓고 흘러간 그 사람
우리 사이에 남은 쓴맛을 낮추기 위해
나는 처음으로 설탕을 듬뿍 떠 넣는다
이제 그의 이름만 떠올려도 옛 시간은 블랙커피처럼 쓰다
오래 전 턱을 괴고 앉아 그를 기다릴 때
나는 무슨 느낌으로 커피에게 내 입을 빼앗겼을까
돌려받을 수 없는 시간을 그 사람은
갖고 떠났다
그와 나눈 한잔의 커피가 이 세상의 가장 진한 이야기가 되어
지금 내 가슴을 휘휘 저어대고
있다
함부로 커피를 마실 일이 아니다 보낼 사람이라면
갈색 이마와 그윽한 눈빛을
한잔씩 마시면서
사랑이 얼마나 슬픈 약속인가를 그때는 왜 몰랐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뜨겁게 물들이던
슬픈 커피 앞에서 나는 그 사람이 비운 자리를
혼자 지키고 있다
아마도 그를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양말
밖에서 놀다 들어오면 아무렇게나
홀랑 까뒤집어서 벗어 던지는
아이들의 양말
걔들 엄마는 호통치기 일쑤이지만
나는 그냥
그 귀여운 발목이라도 보는 듯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아이들의 발은 못 말리는 것!
이 세상을 쿵쿵 뛰기 위해 온 그
녀석들을
누가 무슨 재주로 말린단 말인가
양말을 까뒤집으면서
때묻은 어른들의 꿈을 까뒤집으면서
아이들은 크는
법
양말에 묻혀 온 저 꿈의 얼룩들이
아름다운 무늬가 되어서
우리 집을 채우는 저녁
아내가 돌리는 세탁기
안에서까지
깔깔거리고 쿵쿵대며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의 발목
세상의 모든 숨은 꿈의 머리카락을 찾아내는
너희들의
양말
꿈은 너희들이 신고 뛰놀아야 할
아름다운 양말
나는 그 꿈 속을 놀다 온 양말을 보면
덩달아 괜히 즐겁고
저절로
저절로 세상이 재미있어진단다
오래 전 뒤꿈치를 꿰매 신던
이 아빠의 어린 양말로
히히, 그런 때가 있었거든
고향 무정
다시 떠나왔네
고향 마을에 늙으신 어머니를 남겨 두고
우리가 택시 문을 닫을 때
한발 앞으로 다가서시며
울음을
가리듯 당신의 눈앞에다
닭발 같은 손을 흔드시던 어머니
차장 밖에서 점점 작아지는
어머니의 모습이
마침내 눈물방울만하게 남았을 때
평생을 저런 크기로 가슴
졸이며
자나깨나 자식 생각에 한시 반참도
마음을 못 놓으셨을 일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이 아프네
나는 왜 어머니의 두 눈에 박혀서
이날 입때까지 짠한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눈 감고 잠이 드시면
나는 왜 어머니의
꿈속에까지 박혀서
눈가에 눈물 그렁그렁하게 맺히게 하는 걸까
고향은 어머니가 싸 주시는
고만고만한 보따리에 함께 들어 있거나
어머니 앞에 몰래 놓고 나온
얄팍한 봉투 속의 내
마음처럼 들어 있네
겨우 가져오는 것은
어머니의 눈물과
하룻밤의 이야기
고향은 내 어머니처럼 가져올 수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