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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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 시모음 1

휘수 Hwisu 2006. 9. 22. 13:35

1957년 전남 장층

중앙대 경제학과를 졸업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 "정동진역" 당선

시집 정동진역(1998), 모슬포 사랑, 푸른밤의 여로

2006 제 7회 현대시작품상수상

 

정동진 역(驛)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정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몽대항 폐선

 

저기 졸고 있는 개펄의 폐선 한 척이
앞에 서 있는 여자 한 명을, 아니
그 옆의 친구들까지를
그립게 했다가 외롭게 했다가 한다.
그렇게 밀고 당기는 속성이
그 폐선 위에도 살고 있는 것인지
갈매기가 몇 마리 뜨니 더욱 그런다.

 

난 예 풍경을 눈에 꼭 담고 상상한다.
폐선이란
낡아 저무는 모습이 아니라
저물어선 안 될 걸
환기시키는 어떤 힘이라는 것을.
그런 힘이 밀물처럼
주변을 끌어당겼다 놓았다 할 때
그게 진짜 아름다운 폐선이란 것을.
나도 언젠가는 저처럼
누굴 그립게 끌어당겼다 놓았다 하는
몽대항 폐선이 되리란 꿈을 꾼다.

 

시집 <푸른 밤의 여로> 2006년 문학과지성사


마량항 분홍 풍선


골목이 시작되고, 골목 옆구리
파도 출렁대는 곳에 환한 창이 있다.
그 창에선 초저녁부터 김칫국 냄새가 번지고
가끔 웃음소리도 들리곤 한다. 그런데 빠져나온
웃음소리 하나가 창을 부풀게 한다.
자꾸만 부푸는 게 마치 커다란 분홍 풍선이다.
쪼그리고 앉아 그 풍선 잡고 있으니 내가 질질 끌려간다.
끌려가 감나무에 걸려 대롱대다
바다에 빠져 죽을 것 같아 안간힘으로 버티어 본다.
그러자, 갑자기 내 어머니가 나타나고 쓸쓸한 우리 집 식탁이 보인다.
식탁 너머 내 이른 귀가를 기도해주던 상도교회 구역장님이 지나가고
복슬 강아지, 검은 고양이, 군고구마 아저씨도 지나가고……
지나가지 않아야 할 것들도 지나가고 있어
난 잡고 있던 풍선을 그만 놓아 버린다.

 

에구머니나, 분홍 풍선이란
잠자던 것들까지 깨워 띄우는 신기한 기구.
허름한 유리창에선 더욱 높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
찬 바람 불면 더욱 슬프게 펄럭이는 어선의 깃발

 

난 그 풍선을 잡고 먼 나라로 가고 싶다.
항구란 배만 타는 곳이 아니라 그런 풍선을 잡고
더 따뜻하고 아늑한 나라로 출발하는 곳임을,
풍선에 바람이 빠져버리면
예서부터 흔들리는 귀환이 시작되는 곳임을
배운다, 마량항 부둣가에 고동처럼 붙어서.

 

모슬포에서

 

오래도록 그리워할 이별 있다면
모슬포 같은 서글픈 이름으로 간직하리.
떠날 때 슬퍼지는 제주도의 작은 포구, 모슬포.
모-스-을하고 뱃고동처럼 길게 발음하면
자꾸만 몹쓸 여자란 말이 떠오르고
비 내리는 모슬포 가을밤도 생각이 나겠네.

그러나 다시 만나 사랑할 게 있다면
나는 여자를 만나는 대신
모슬포 풍경을 만나 오래도록 사랑하겠네.
사랑의 끝이란 아득한 낭떠러지를 가져오고
저렇게 숭숭 뚫린 구멍이 가슴에 생긴다는 걸
여기 방목하는 조랑말처럼 고개 끄덕이며 살겠네.
살면서 떠나간 여자를 그리워하는 건
마라도 같은 섬 하나 아프게 거느리게 된다는 걸
온몸 뒤집는 저 파도처럼 넓고 깊게 깨달으며
늙어가겠네. 창 밖의 비바람과 함께 할 사람 없어
더욱 서글퍼지는 이 모슬포의 작은 찻집, '경(景)'에서.

 


김영남시인은 1957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고 중앙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 좀 늦은감 있게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 [정동진 역]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시인입니다.

이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모슬포 사랑'의 해설을 쓴 이형권씨는 시는 '아름다운 경제'다라는 말로

그의 시를 설명했습니다.

 

경제학을 공부해서일까요? 이 시인의 시에 감성은 넘실거리지만 감정의 낭비가 별로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거운 고뇌가 없이 가볍고 산뜻하면서도 애절한 시를 아주 잘 쓴다는 말입니다.

그가 태어난 곳이 바다에 인접한 곳이라서 인지 그의 시에는 바다, 항구, 섬 등이 자주 나타납니다.

바닷가라는 이미지가 주는 끝, 이별, 고독, 애잔한 슬픔들이 이 시에도 참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속의 화자는 모슬포라는 빗소리 같기도 하고 고동소리 같기도 하고 뒷모습과 머리채가 고운,

그러나 화자를 떠나가 버린 어느 몹쓸 여자의 이름 같기도 한 항구에 있습니다.

바람 많은 제주도에서도 그중 바람이 심하다는 항구, 모슬포의 '경'이라는 똑 부러지는 여자의

이름 같기도 하지만 실은 경관이나 정경의 의미를 가진 찻집에 홀로 앉아 있습니다.

비바람이 치는 가을밤입니다.

 

이런 처지에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감상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은 드물겠지요.

하물며 시인인데 오죽하겠습니까. 시인은 떠나간 여자가 떠오릅니다. '모슬포'라는 항구의 이름이

떠나간 여자의 새 이름이 된 '몹쓸 여자'와 아주 비슷한 까닭입니다.

쉽게 잊을 수 없는 사랑이었나 봅니다.

시인은 그 여자를 몹쓸 여자라고 말합니다. 왜 몹쓸 여자일까요?

그건 그 여자가 정말 몹쓸 여자라서 보다 아마 시인을 떠난 때문이겠지요.

 

사실 사랑이 문제가 되는 한 떠난 여자는 다 몹쓸 여자가 아닐까요?

떠난 남자는 다 몹쓸 남자 아닐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시인이 '몹쓸 여자'라고 부르면 '보고 싶은 여자'라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그것은 모슬포의 쓸쓸한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고 몹쓸 여자를 떠오르면서 화자가 한없이

외로워하고 있는 때문이기도 합니다.

 

몹쓸 여자 때문에 가슴에 구멍이 나버린 시인은 몹쓸 여자가 있던 그 자리에 모슬포라는

항구의 정경을 담고자 합니다. 몹쓸 여자와의 사랑만큼 잊을 수 없는 모슬포정경을.

그리고 언젠가 다시 사랑한다면 여자가 아니라 모슬포같은 정경을 사랑하겠다고 말합니다.

몹쓸 여자를 다시 만나 사랑하면 다시 전 같은 사랑이 될까요?

아마 안되기 십중팔구지요. 그러나 떠난 사람의 뒷모습이 담긴 정경과의 사랑은 안전하지요.

더구나 모슬포는 지금은 서글픈 항구지만 날이 개이면 방목하는 말들이 뛰어다닐 건강한 곳이니까요.

안전할 뿐만 아니라 모슬포의 정경엔 비장의 힘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그 자체의 기쁨과 슬픔을 품고 지키는 넉넉함, 깊이와 품격에서 오는 치유의 힘입니다.

그래서 정경과의 사랑은 사랑이라기보다 치유를 얻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품고 지키고 견디고 낡아가며 성숙하는 항구, 구멍난 바위, 방목하는 말, 섬, 그리고 밤비 같은

자연물이 아름답게 배치된 장소인 모슬포는 사랑이 끝나는 곳이 아니라 또 다른,

혹은 보다 깊은 사랑을 위해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는 장소인 것입니다.

 

모슬포, 몹쓸여자, 뭐가 슬퍼, 까지 뒤섞인 애매모호한 이름의 항구,

그 안에 경이라는 경쾌한 이름의 찻집이 있습니다. 비가 그치고 첫새벽이 밝으면 방목하는 말들처럼

아픈 상처를 툭 툭 털고 일어서기에 좋은 이중적 장소입니다. 아름답고 고독한 기억의 섬,

끝의 섬이며 시작의 섬, 마라도 하나 품고 짓푸른 바다가 되는 꿈을 꾸기에 좋은 중간의 장소입니다.

과거의 장소인 동시에 미래를 향한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이별과 상처를 말하는 이 시의 분위기는 우울하기는커녕 신선하고 깨끗하고 기분 좋습니다.

그것이 김영남시의 매력입니다.

혹시 사랑을 잃었다면 한 번 화가 난 듯, 그리운 듯 '모슬포'하고 불러보시지요.

감미롭게 아파 오는 몹쓸 여자의 이름이 마라도처럼 빗속으로 사라져갈 때

당신도 혹시 더 깊은 사랑을 위해 지난 실패를 오히려 아름다운 추억으로 품은

한층 아름다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시작하는 것 같지 않으신지요.

 

LA 중앙일보, 2003년 9월 7일(해설: 임혜신)


그리하여 해리는 추억을 경작하게 되었다

 

이십 리 고창의 죽도 바닷길을 걸어나오면서 일행 중 누군
가가 '해리, 해리'하고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
이름이 내게는 어찌나 아름답고 아름답게 들리던지, 발이 개
펄에 빠지는 줄도 모르고 나는 그 해리가 어디에서 살았을까
얼굴이 둥글었을까 야위었을까를 계속 생각하는 것이었는데,
물때가 되어 바닷물은 발목을 잡아오고 나는 아직도 해리라
는 이름에 갇혀서 그가 해리를 버렸다는 것일까 아니면 해리
가 그에게서 떠나갔다는 것일까를 몹시 궁금해 하는 것으로
날이 저무는데, 어느덧 나의 마음도 저물어 나의 옛날 여자
들 중 제일 잊지 못할 소녀 한 명을 골라, 나도 너를 해리라
고 부르며 아름답게 이 밤길을 걷고 싶다라고 아주 근사한
상상을 하고 있는데, 일행 중 한 사람이 해리와 나 사이에 갑
자기 낯선 마을을 초대해 오는 것이었다. 저기 저 해리에서
저녁으로 조개죽을 먹고가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해리가 차려내는 저녁상, 그 속에서 옛날의
순이, 순이 엄마, 순이의 머리핀을 아주 밤늦도록 만나는 것
이었다.  

 

검정 고무줄에는

 

내복의 검정 고무줄을
잡아당겨 본 사람은 알 겁니다.
고무줄에는 고무줄 이상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이상의 무얼 끌어안은 손, 어머니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으로
무엇을 묶어 본 사람이면 또 알겁니다.
어머니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한다는 것을
그래야 사람도 단단히 붙들어 맬 수 있다는 것을
훌륭한 어머니일수록 그런 신축성을 오래오래 간직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 고무줄과 함께
어려운 시절을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어머니란 리어카 바퀴처럼 둥근 모습으로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 둥근 등을 굴려 우리들을 큰 세상으로 실어 낸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 지상 모든 고무줄을 비교해 본 사람이면 알 겁니다.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고무줄이 나의 어머니라는 것을


시집[모슬포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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