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김상미 시모음 본문
1957년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그녀와
프로이트 요법>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 데뷔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세계사) 1993
"검은, 소나기떼" (세계사) 1997
"잡히지 않는 나비" (천년의 시작)
2003
2003년 10월 9일 '오렌지' 외 4편으로
<박인환 문학상>
수상
시인 축구 {글발} 회원
오렌지
시든, 시드는 오렌지를 먹는다
코끝을 찡 울리는 시든, 시드는 향기
그러나 두려워 마라
시든, 시드는 모든 것들이여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이여
켰던 불 끄고 가려는 안간힘이여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는 법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나는 내 사랑의 이빨로
네 속에 남은 한 줌의 삶
흔쾌히 베어 먹는다
시인 앨범
3
시를 우습게 보는 시인도 싫고, 시가 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시인도 싫고, 취미(장난)삼아 시를 쓴다는 시인도 싫고, 남의 시에 대해 핏대 올리는 시인도 싫고, 발표지면에 따라 시 계급을 매기며
으쓱해하는 시인도 싫다.
남의 시를 훔쳐와 제것처럼 쓰는 시인도 싫고, 조금씩 마주보고 싶지 않은 시인이 생기는 것도
싫고, 文化林의 나뭇가지 위에서 원숭이처럼 재주 피우는 시인도 싫고, 밥먹듯 약속을 어기는 시인도 싫고, 말끝마다 한숨이 걸려 있는 시인도
싫다.
성질은 못돼 먹어도 시만 잘 쓰면 된다는 시인도 싫고, 시는 못 쓰는 데 마음씨는 기차게 좋은 시인도 싫고,
학연, 지연을 후광처럼 업고 다니며 나풀대는 시인도 싫고, 앉았다 하면 거짓말만 해대는 시인도 싫고, 독버섯을 그냥 버섯이라고 우기는 시인도
싫고,
싫어…
2004년 마지막 달, 시인들만 모이는 송년회장에서
가장 못난 시인이 되어 시야 침을
뱉든 말든
술잔만 내리 꺾다 바람 쌩쌩한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
싫다, 싫다한 시인들 차례로 게워내고 나니
니체란
사나이, 내 뒤통수를 탁 치며, 그래서 내가 경고했잖아.
같은 동류끼리는 미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고!
벌써 그 말을 잊은
건 아니겠지? 까르르 웃어 제치더군
바람 쌩쌩 부는 골목길에서
비밀
애인을 가슴에서 꺼내
벽에 걸어두니 참으로 조용하다.
벽에 걸린 벽의 침묵이 세속과 다른 냄새를 애인에게 발
산하여 애인은 지금 한창 침묵중이다.
침묵이란 본래 심장 가까이 두는 물건이라 맛만 들이면
세상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깊은 맛을 발산한다.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침묵 속에 침전해 있던 애인이 어
느날 덜컹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불과 얼음의 우화
따위
는 저 멀리 던져버리고, 방안은 금세 격동으로 치닫는다.
저마다 제 몸에서 흘러나온 침묵의 해류에 휘감겨 십자
가에 매달리듯 서로에게 매달리게 된다.
마치 그 속에서 정화되어 다시 솟는 분출만이
달리는
기차를 멈추게 할 수 있다는 듯!
개죽음
개죽음은
개의 죽음이 아니다
개죽음은 개같이 죽는 것이다
어느날 모든 일이 척척 잘 풀려
혼자서 느긋이 술집에 앉아
모처럼 흐뭇한 휴식 취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뒷머리에
타타탕!
이유없이 어처구니없이 죽어 넘어지는 것
그게 개죽음이다.
아무도 당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 시대의 불운
개죽음은 도처에서 장소 불문하고
우리들에게 끼여든다
그것 피할 안전지대는
더이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모두 제로이다
아, 고도(Godot)!
따뜻한 양지맡에 앉아
햇빛 쬐고 계신 할머니
비어 있는 허공만
계속해서 비어 있는 허공만
갖고 노셨나
지나가다 문득 시선 마주쳐도
아, 그 눈!
정말 그 눈 속엔 아무도
아무것도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