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강수 시모음 본문
제주출생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계간문예 다층 편집위원
대림대학
강사
낡은 집
걷다가 폐가(廢家)를
만나면, 문득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마을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집일수록, 나는
그 집이 왜 홀로 서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무너진 돌담 위로 달빛 내리고
그 달빛이 슬며시 문풍지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나도 몰래 따라 들어가
그 집의 속살을 만져보고 싶어진다
이제는 잊혀진 체온
벌레 울음소리에 포위되어
무너진 영혼처럼 서 있는 집을 보면
나도 한 번 무너져 보고 싶어진다
속에 깊고 그윽한 어둠을 감추고
내 살을 파먹는 구더기들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싶어진다
그러면 비로소, 집 한 채가 완성되리라
쓸모 없어 버려진 집처럼
벤치에 놓여 있는 노인을 보면
불현듯, 그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호접몽(胡蝶夢)
보인다
끊임없는 존재의 지지직거림
아버지는 지붕에서 안테나를 돌리고
나는 끊임없이 지지직거리고 있다
가끔씩 엇비치는 지지직거림 사이로 나비들이 보인다
나는 나비였을까
아버지는 끊임없이 내 몸의 안테나를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TV에 나비가 잡히지 않는다
안테나에 나비들이 앉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나비였을까
아버지는 왜 내 몸 속의 TV에 자꾸만 나비를 불러내려 하는 것일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다
잘 보이느냐,
아니, 안 보여요
안테나에는 여전히 나비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나는 계속 지지직거린다
무서운 아버지의 힘
내가 보고 싶지 않은 TV 채널을 강제로 보게 만드는 힘
나를 또 다른 아버지로 만드는 힘
얘야, 보이느냐
화면 가득 휘날리는 저 나비떼,
분분한 존재의 뒤틀림
내가 아버지의 꿈을 꾸는 것인가
아버지가 나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지지직거림 사이로 자꾸만 나비가 몰려든다
잔디의 검법(劍法)
아스팔트 틈에
자리잡은 잔디 줄기 하나
길가에서부터 길 안쪽으로 칼자국을 내고 있다
아무도 몰래
아스팔트를
잘라 나가는
저 여린 칼날의 끈질긴 힘
칼날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초고수의
검법(劍法)
나도 그 검법에 손가락을 베인 적이 있다
베인 것을 한 참 지난 뒤에야 알았다
이른
새벽,
푸른 칼날에 묻어 있는 이슬 방울들을 보았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별빛들이
칼날을 투명하게
벼리고 있었다
나만 모르고 있었다
하늘에서 땅 속에서 땅 위에서
잔디 이파리
속에서
내 몸 속에서
달팽이 걸음처럼 일어나고 있는 쿠데타
저 잔디……
아스팔트
보수반 사람들이 몇 번을 잘라내도
멀찍이 물러섰다가 다시 꼬물꼬물 기어 나와
아스팔트 속으로 파고
드는,
칼의 영혼.
아무것도 자르지 못하면서도
모든 것을 자르고
있다
자장면의 힘
1.
이제는 사라져 버린
중화반점
앞니 빠진 주방장이 면발을 뽑아내던 중화반점
천장에는 파리 끈끈이가 살랑거리고
이소룡의 맹룡과강을 잘도 흉내내던
짱께네 집
우리는 파리처럼 그놈의 그늘 속으로 모여들었지
이제는 기억 속에만 있는 중화반점
우리는 고요히 복종하는 법을
배웠지
자장면 한 그릇…단무지…양파… 그 속에 들어있는 짱께의 은총
동네 꼬마들을 휘어잡던 자장면의 힘
우리는 너무 일찍 복종의
힘을 알아 버렸지
2.
아파트 계단과 사무실 문밖에
가끔 놓여지는 짱께 그릇들
살아가다 보면 가끔 그때 그 자장면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내가 걸쳐온 옷, 지금까지 그렇게 껴입었던
자존심의
옷들을 홀가분하게 벗어버리고
그 자장면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일회용 그릇에 담겨 있더라도,
일회용 젓가락으로
먹을 수밖에 없더라도
먹고 나면 다 버려질 운명의 것들일지라도
먹는 순간만큼은 황홀한, 사람아
내 가슴 밖으로 내밀어진
자장면 그릇과 나무 젓가락
때로는 눈물나게 누군가에게 복종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사람아,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사람아
어쩌면 나는
그·때·그·순·간·의·자·장·면을 먹기 위해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3.
지금 자장면을 같이 먹는 사람아
비위가 약한 내가
침 묻은 네 젓가락이 면을 비벼도 아무렇지 않고
단무지에 묻은 티끌에도 개념치 않고
씨익 웃으며
함께 먹을 수 있는 기적을 가져다 준 사람아,
이제는 사라져 버린 중화반점
그 때
그 사람들도 다 사라져 버린 중화반점
먹고 먹어도 또 먹고 싶었던 자장면아
나, 아직도
여기
있다
상처
손을 베였다.
책을 잘못 건드렸다.
종이 한 장이 날을 세우고 있다가
내 영혼을 스윽 베어 버렸다
모가지가 뜨끔했다
종이에 묻은 핏방울이 지워지지
않았고
글자 몇 개가 붉게 물들었다
내 몸이 다녀간 흔적을 책의 영혼은 가지고 있다
내 영혼이 책을 만나기 이전에
내 몸이 먼저 책을 만났다.
그 책 속에 매복해 있던 글자들이
칼을 들고 내 눈동자를 노려보고 있을 때,
종이 한
장이, 기껏해야 종이 한 장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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