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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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詩모음

2011 신춘문예 시 당선작들

휘수 Hwisu 2011. 1. 1. 23:24

2011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들 

 

경향신문  

 

아버지의 발화점 / 정창준 

 

바람은 언제나 가장 허름한 부위를 파고 들었고 그래서 우리의 세입은 더 부끄러웠다. 종일 담배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다 귀가한 아버지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여름 밤의 잠은 퉁퉁 불은 소면처럼 툭툭 끊어졌고 물묻은 몸은 울음의 부피만 서서히 불리고 있었다 

 

올해도 김장을 해야할까.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에요. 배추값이 오를 것 같은데. 대학이 다는 아니쟎아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생계는 문제 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갈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제길, 두통약은 도대체 어디 있는거야. 

 

남루함이 죄였다.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것, 아름답게 성형하지 못한 것이 죄였다. 이미 골목은 불안한 공기로 구석구석이 짓이겨져 있었다. 우리들의 창백한 목소리는 이미 결박 당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낮은 곳에 있던 자가 망루에 오늘 때는 낮은 곳마저 빼앗겼을 때다. 

 

우리의 집은 거미집보다 더 가늘고 위태로워요. 거미집도 때가 되면 바람에 헐리지 않니. 그래요. 거미 역시 동의한 적이없지요. 차라리 무거워도 달팽이처럼 이고 다닐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아니 집이란 것이 아예 없었으면. 우리의 아파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고층 아파트는 떨어질 때나 유용한거에요. 그나저나 누가 이처럼 쉽게 헐려 버릴 집을 지은 걸까 

 

알아요. 저 모든 것들은 우리를 소각(燒却)하고 밀어내기 위한 거라는 걸. 네 아버지는 아닐 거다. 네 아버지의 젖은 몸이 탈 수는 없을 테니. 네 아버지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횃불처럼 기름에 스스로를 적시며 살아오셨던거예요. 아, 휘발성(揮發性)의 아버지, 집을 지키기 위한 단 한 번 발화(發火) 

 

*조세희 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화법을 인용함 

 

[심사평] 

 

실종된 현실인식의 발견… 뭉클하다 

 

스무 분이 겨룬 이번 본심에서는 현실사회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시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보수 정부가 들어선 뒤 일상화한 사회경제적 위기의식이 예비시인들의 마음 밑바닥에 고이면서, 불안을 나누고 싶은, 나아가 희망을 찾고 싶은 연대의식, 소통 욕구가 발현된 것일 수도 있겠다. 

 

2011 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심사를 맡은 이시영 시인(왼쪽)과 황인숙 시인이 본심에 오른 작품을 보며 의견을 나누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최종심에 정창준(아버지의 발화점 외 4편), 김유미(삼거리식당 지나 명랑슈퍼 외 4편), 김영진(도끼발 외 4편), 류성훈(밤의 도플러 외 4편), 한주연(슬리퍼를 밟는 순간 외 4편) 이 다섯 분의 시가 올랐다. 

 

김유미의 시편들은 글 다루는 솜씨, 이야기를 꾸미는 솜씨가 돋보인다. 유머러스하기도 하다. 그런데 특별히 새롭지가 않고 고만고만하다. 고백은 김유미의 장점이 생기있게 모인 시다. 다른 시들과 고백은 백지 한 장 차이지만, 그 백지는 얼마나 두꺼운가? 한주연의 슬리퍼를 밟는 순간은 슬픈 얘기를 담담하게 그려 독자로 하여금 고즈넉이 귀기울이게 한다. 잔잔한 매력이 있는 자기만의 화법이다. 류성훈은 시적인 순간을 발견하는 능력이 빼어나다. 그런데 그 시적인 순간을 자기화하지 못한다. 늘 최종심에 오르지만 결국엔 내려놓게 되는 시들이 있다. 언뜻 아주 시적이나 공허하고 생명감이 없는 시들. 경험이 내재화돼 있지 않은, 육체가 없는 시들.  

 

김영진의 시들은 새만금이나 대학생들의 취직 문제, 세습되는 가난 등 오늘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소재도 주제의식도 상상력도, 다 좋다. 그런데 목적의식이랄지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작위적이고 과장된 표현이 끼어 있어 시가 덜그럭거린다.  

 

정창준을 당선자로 내세우게 돼 뿌듯하다. 응모한 다섯 편의 시 가운데 어느 작품 하나 모자람이 없지만, 제일 앞장에 놓은 아버지의 발화점을 당선시로 올린다. 정창준의 시들은 우선 신선하다. 우리 시단에서 꽤 오래 실종됐던 현실인식이나 생활감각을 가진 시를 보게 된 것도 반갑지만, 그 사회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발성이 새롭고 독창적이어서 더 반갑다. 정창준의 시들은 감동적이다. 뭉클하다. 심금을 울린다. 

 

심사위원 이시영, 황인숙 

 

매일신문  

 

1770 호 소녀 / 우광훈  

 

꿈꾸듯, 한 편의 오래된 우화(寓話)가 소녀의 동공 깊숙이 스며든다. 소녀는 과묵하고 비밀스런 눈빛으로 책장만을 넘겨댄다. 별이 뜨고, 소녀는 마을 어귀 파피루스 숲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광활하고 황량한 사막이 있는, 때론 우아하고 권위적인 무덤이 있는 이곳 오시리스 동물원으로 흘러든다. 바다표범도, 펭귄도, 사막여우도, 치타도, 판다도 없는 이곳에는 햇볕에 잘 그을린 허허로운 얼굴에 키 큰 금발의 코끼리가 있다. 

 

소녀는 향수어린 얼굴로 코끼리를 바라보다 석관 속에 놓인 접시저울을 조심스레 끄집어낸다. 타조깃털만큼이나 가벼운 그녀의 심장. 사육사의 경쾌한 신호음에 맞춰 코끼리가 저울 위로 올라선다. 똬리를 튼 비단뱀처럼 매끄럽게 내려앉는 그녀의 영혼. 순간 불꽃이 흩날리고, 파도가 울부짖고, 사자(死者)가 춤을 춘다. 기괴하고, 음울하며, 극도로 염세적인 그들만의 연극. 불멸을 향한 오래된 문명의 허망한 몸짓. 

 

나일강에 물그림자 드리우고, 피안(彼岸)에 다다른 소녀는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목욕을 한다. 늙은 고양이처럼, 별과 달이 질 때까지 

 

그녀의 푸른 목덜미 아래로 

모래 이빨 자국만이 선명하다. 

 

☆ 1770호 소녀= 1976년 맨체스터대에서 로잘리 데이비드 박사가 집도한 이집트 미라. 학자들은 방사능 분석을 통해 서기 105~405년 사이에 미라로 제작된 갈색 눈의 소녀로 추정하고 있다.  

 

[심사평] 언어의 구체성과 상상력의 탁월함 

 

마지막까지 남은 손상호의 시미즈 터널 외 3편, 박윤근의 말티즈와 아내 외 2편, 박승일의 비 내리는 법 외 2편, 우광훈의 1770호 소녀 외 2편 등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작품들이었다. 네 사람 모두 언어의 체계적인 훈련을 거친 만만치 않은 수준과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손상호의 시미즈 터널은 긴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동안 다양한 감각으로 그려낸 상상력이 돋보였다. 이 한 작품만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나무랄 데가 없다. 하지만 다른 작품이 너무 처져 있었다. 박윤근의 말티즈와 아내는 시를 형성할 줄 아는 능력과 선명한 환기력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구체성이 시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말티즈가 죽어도 그 딸랑거림을 그리워할 것이다.라든가, 아내는 土耳犬으로 남고 싶어 하는/저 바다 빛 그늘 진 눈동자를 보았을 것이다.와 같은 이미지들을 높게 보았다. 당선작으로도 무난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역시 외 2편이 말티즈…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다른 작품들의 경우 무리한 설정과 그에 따른 언어의 과부하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박승일의 비 내리는 법은 재기발랄한 말솜씨와 상상력, 거침없는 전개에도 불구하고 억지가 없는 세련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지붕에 걸린 구름의 뼈를 다 발라내고, 샛강의 입이 건너편 뚝방까지 죽 찢어져가는 이 작품 또한 충분히 당선의 영예를 안겨줄 만 했으나, 어쩌랴, 이 응모자에게도 작품 간의 심한 편차가 걸림돌이 되었다. 작품 공모에 여러 편을 응모할 경우 그 수준이 고르지 못하면 뽑는 이에게 불안감을 주게 마련이다. 

 

네 사람의 시 가운데, 우광훈의 1770호 소녀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함께 보내온 나머지 두 작품도 똑같이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선작에서 보듯이 이 작품은 스케일이 참 크다. 시인의 상상력은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깊은 사유를 거느린 채, 그것도 아주 느리게, 우주와 역사, 문명세계를 거닐며 현실과 삶의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 시인은 문장부호 하나까지도 세심하게 닦아 쓰는 말의 절차탁마가 보였고, 행간을 최대한 활용할 줄 아는 오랜 내공이 느껴졌다. 신뢰가 가는 시인이다. 묵묵히 장인의 길을 걷기 바란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도광의, 문인수 

 

한국일보  

 

새는 없다 / 박송이 

 

우리의 책장에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15 층 베란다 창을 뚫고 온 겨울 햇살 

이 창 안과 저 창 밖을 통과하는 새들의 발자국 

우리는 모든 얼굴에게 부끄러웠다 

 

난간에 기대지 말 것 

애당초 낭떠러지에 오르지 말 것 

 

바람이 불었고 

낙엽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갖지 못한 채 

알몸으로 동동 떨었다 

 

지구가 돌고 

 

어쩐지 우리는 우리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면서 

체위를 어지럽게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멀미를 조금씩 앓을 뿐 

 

지구본에 당장 한 점으로 

우리는 우리를 콕 찍는다 

이 점은 유일한 우리의 점 

 

우리가 읽은 구절에 누군가 똑같은 색깔로 밑줄을 그었다 

 

새들은 

위로 위로 

날아 

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들의 발자국에게 미안했다 

 

미끄럼틀을 타는 동안 

우리의 컬러링을 끝까지 듣는 동안 

알몸이 

둥글게 둥글게 

아침을 입는 동안 

 

우리의 놀이터에 

정작 우리만 있다 

 

[심사평] 새의 존재에 대한 통찰 돋보여 앞으로의 가능성에 낙점 

 

예심 없이 모든 투고 작품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숙독과 합평으로 심사가 진행됐다. 시국 탓인지 꽤 많은 작품에서 유행처럼 죽음을 서슴없이 다루는 것이 우려스러웠다. 또한 빈번한 외래어의 사용과 심지어 영어를 그대로 시에 사용하는 것은 21세기 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심사위원들은 죽음보다는 희망을 가진 작품에 기대를 걸며 '가족의 탄생'(팽샛별), '감독의자'(지석현), '새는 없다'(박송이)를 최종심에 올렸다. '가족의 탄생'은 영화를 보듯 선명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 눈에 시를 들어오게 하는 힘이 좋았다. 하지만 당선작이 되기에는 시가 가지고 있는 강한 산문성이 문제였다. 그런 산문성이 시가 가지는 독특한 맛을 잃게 해 아쉬웠다. 앞으로 가벼워지는 것에 대해 노력해주길 부탁한다. 

 

'감독의자'는 신선한 소재의 참신한 작품이었다. 산문시였으나 시의 흐름도 부드러웠다. 하지만 투고한 다른 작품이 그와 같은 무게를 보여주지 못했다. 앞에서 밝혔듯이 모국어로 쓰는 시에 영어를 그대로 쓰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당부한다. 

 

' 새는 없다'는 새의 존재와 상징성에 대한 통찰이 돋보였다. 다른 시들에 비해 긴 길이의 시인데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감에 좋은 점수를 얻었다. 투고자들이 흔히 가진 애매모호함을 극복하는 선명성도 좋았다. 하지만 감동으로 가기에는 힘의 결락이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새는 없다'는 좋은 작품이라는 것보다는 가장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로 대성을 바란다. 최종심까지 올라온 투고자들에게는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는 격려의 말을 전한다. 

 

신경림(시인) 정호승(시인) 정일근(시인ㆍ경남대 교수) 

 

 

동아일보  

 

오늘의 운세 / 권민경  

 

 

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 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 오르는 몽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심사평] 

 

예심을 통해 올라온 작품들 중에서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작품은 네 사람의 것이었다. 임춘자 씨의 주유소의 형식 등 6편은 안정된 표현력과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한연우 씨의 그늘의 위대한 고집 등 6편은 언어에 대한 수사적 능력에서 장점을 보여주었다. 류성훈 씨의 저녁의 진화 등 5편은 어법의 상대적인 참신함이 인정되었다. 권민경 씨의 대출된 책들의 세계 등 5편은 시적 언어의 능력과 상투성을 비껴가는 감각이 돋보였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작품들 사이의 편차가 적었던 임춘자 씨와 권민경 씨의 시들이었다. 임춘자 씨의 작품들이 가진 안정감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들은 평가할 만한 것이었으나, 설명적인 부분들이 감상적인 의미 안으로 시를 가두었다. 권민경 씨의 시는 묘사와 표현의 감각이 청신했다. 당선작이 된 오늘의 운세라는 작품의 경우, 개인적 운명과 삶의 시작을 둘러싼 시적 해석이 세밀하고 다채로운 이미지들을 통해 펼쳐지고 있었으며, 생의 아이러니를 포착하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심사위원들은 시간의 아이러니에 살아있는 이미지를 부여하는 능력을 중요한 가능성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이시영(시인), 이광호(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유빙(流氷) / 신철규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심사평] 인간의 비극적 관계를 미세하게 통찰하는 눈 돋보여 

 

신춘문예 투고 시는 한국 현대시의 미래를 밝히는 작품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을 찾긴 힘들었다. 최종심에 남은 작품은 임여기의 면접관, 정승기의 실종, 이재흔의 스파이더맨의 후예, 이도은의 아주 식물적인 꿈, 신철규의 유빙 등 5편이었다. 면접관은 면접관과 면접인 간의 관계 대립을 긴장되고 설득력 있게 고조시켜나갔으나 결구 부분이 너무 안이했다. 스파이더맨의 후예는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는 삶의 현장을 선명하게 나타냈으나 제각기 다른 일상의 벼랑 끝에서 한 번씩은 실족했던 사연들이 같은 표현이 산문적이고 진부했다. 실종 또한 현대인의 실종의식을 진지하게 추구한 작품이었으나 전체적으로 산문의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 아주 식물적인 꿈은 식물적인 꿈과 연결된 우리 삶의 구체적 양상이 불명확하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돼 결국 당선작은 유빙으로 결정되었다. 유빙에는 인간의 비극적 관계를 미세하게 통찰하는 개성적인 눈이 있다. 현대사회의 개체적 삶을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에 은유한 점은 높이 살만하다. 시 본래의 내재적 리듬감을 살려 유연한 속도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신인다운 내면적 사고의 흐름도 알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도 과장된 이미지나 허장성세가 없고 기성의 어떤 억지스러운 틀에 갇혀 있지 않아 자유분방하다. 한국시단의 대들보가 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문정희, 정호승

 

 

세계일보  

 

파밭 / 홍문숙 

 

비가 내리는 파밭은 침침하다 

제 한 몸 가려줄 잎들이 없으니 오후 내내 어둡다 

다만 

제 줄기 어딘가에 접혀있던 손톱자국 같은 권태가 

힘껏 부풀어 오르며 꼿꼿하게 서는 기척만이 있을 뿐, 

비가 내리는 파밭은 어리석다 

세상의 어떤 호들갑이 파밭에 들러 

오후의 비를 밝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파밭이 좋다 

봄이 갈 때까지 못 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주곤 했단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방구석의 우울일랑은 양말처럼 벗어놓고서 

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 

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  

 

[심사평] 경직돼 있지 않고 자연스럽고 신선 

 

예년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에 확 띄는 작품은 없었다. 오늘의 한국시가 갇혀 있는 프레임을 과감하게 깨트리는 작품을 찾을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저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소리를 중언부언하는 시는 눈에 띄게 줄었다. 아주 뛰어난 작품은 많지 않으면서도 당선작이 되어도 손색이 없을 작품은 적지 않아 선자들은 마음을 놓았다. 

 

특히 다음 네 분의 시가 처음부터 주목을 받았다. 홍문숙의 파밭 등은 시를 쓴다는 경직된 포즈가 안 보이면서, 자연스럽고 신선하게 읽혔다. 속도감도 있는 데다 요즘의 유행과도 한 발 떨어져 있는 것도 미덕이었다. 그러나 투고한 작품들의 편차가 심해 쉽게 신뢰감이 가지 않았다. 

 

종정순의 개나리는 왜 등은 기지도 있어 보이고, 밝고 환한 분위기의 시여서 심사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 시가 가진 청승과 궁상이 없는 것도 호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화문석 현대방앗간 같은 산문투의 시들은 시의 맛을 반감시킨다. 

 

유명순의 시 중에서는 내통이 가장 뛰어났다. 부부 간의 관계,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 자못 설득력이 있다. 한데 시들이 전체적으로 숨통을 조일 듯 답답한 것이 흠이다. 게다가 뫼비우스의 띠 같은 흔해빠진 이미지가 일부 그의 시를 상투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최인숙의 시들은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표현도 큰 무리가 없고 자연스러웠다. 한데 어쩐지 시창작교실의 냄새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시는 쓰는 것이지 쓰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위한 시가 가지는 감동은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이상 네 사람의 시를 놓고 많이 얘기한 끝에 결국 홍문숙의 파밭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심사위원은 합의했다.  

 

신경림(시인), 유종호(문학평론가) 

 

문화일보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 강은진 

 

문득, 썩지 않는 것이 있다  

74세 이만호 할머니의 짓무른 등이  

늦여름 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중에도  

푸르스름한 눈썹은 가지런히 웃는다  

그녀가 맹렬했을 때 유행했던 딥블루씨 컬러  

변색 없이 이상적으로 꺾인 저 각도는 견고하다

      

스스로 돌아눕지 못하는 날  

더 모호해질 내 눈썹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울까  

목에 박힌 관으로 바람의 리듬을 연습할까  

아니면 당장 도마뱀 꼬리같은 문신을 새길까  

    

누구에게나 꽃의 시절은 오고, 왔다가 가고  

저렇게 맨얼굴로 누워 눈만 움직이는 동안  

내 등은 무화과 속처럼 익어가겠지만  

그 때도 살짝 웃는 눈썹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얼굴이 검어질수록 더 발랄해지는 눈썹이었으면 좋겠다

    

나 지금 당신의 바다에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의 눈썹을 가져야 하리

눈물나도록 푸른 염료에 상큼하게 물들어야 하리

 

[심사평] 삶의 건강한 구체 다뤄… 한국 시단 큰 재목되길

 

 예년에 비해 투고된 작품량은 늘었으나 수준은 비슷했다. 윤지문의 '새와 흙', 강은진의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석상준의 '뚜껑', 김후인의 '결치(缺齒)' 등 네 편의 작품이 최종심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먼저 '뚜껑'은 '그냥 썩게 놔두는 것보단 나중에 상하더라도 누군가 퍼먹을 수/ 있도록 열어두는 게 인생이란 걸 알기 때문에'에서 알 수 있듯이 산문성이 지나치다는 점 때문에 제외되었다. '결치(缺齒)' 또한 빈 집이 늘어나는 시골 풍경을 결치의 이미지와 결부시킨 점은 높이 살 만 하지만 조금 낡은 감이 있다는 점에서 제외되었다. 
 

   나머지 남은 두 편 중에서 '새와 흙'은 기성시인의 시를 인용한 점이(인용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신인으로서는 바람직한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과, 또 다른 투고작 '새와 구름'에서 구체성이 부족하고 한껏 멋을 부린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결국 당선작은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으로 결정되었다. 이 시는 '눈썹 문신'을 하는 우리 삶의 독특한 한 현상을 발견한 시적 눈의 신선함에 일단 호감이 갔다. 특히 눈썹 문신을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에 빗된 점이 해학적이고 애절하다. 그러나 이 시에 존재하고 있는 '이만호 할머니'가 시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지 않음으로써 대표성을 잃고 있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이만호 할머니가 누구인지 암시가 있었으면 오히려 더 감동적이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자폐적 상상력이 판치는 한국시단에서 삶의 건강한 구체에서 꽃핀 이만한 작품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 이 시를 당선작으로 밀 수 있는 이유였다. 당선자가 앞으로 한국시단의 큰 재목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크다. 

 

심사위원 황동규, 정호승
 

영남일보 

    

아주 흔한 꽃 / 변희수 


갈 데까지 갔다는 말을

안녕이란 말 대신 쓰고 싶어질 때

쓰레기통 옆 구두 한 켤레

말랑한 기억의 밑창을 덧대고 있다

달릴수록 뒷걸음 치는 배경 박음질 해나가듯

나란히 하나의 길을 꿰고 갔을 텐데

서로 다른 기울기를 가진 한 짝

축을 둥글게 깎고 고르는 순간

길은 저마다 제 발에 꼭 맞는 문수로

열려 있었을 것이지만 떠날 때는

모두, 안개를 배경으로 걸었을 것이다

가파른 직선 혹은 곡선의 에움길을

밀어 넣을 때마다 팽팽하게 긴장하던 구둣볼

끈을 고쳐 매고도 매듭 없이

결의만 다지던 저녁이 온 것처럼

코끝을 돌려놓고 자도

늘 잘 못 든 길처럼 헛갈리는 아침

이정표 없는 허방에도 덜컹, 꽃피는 길 있었는지

밑창에 찍힌 발가락 모양이 꾹꾹 눌러놓은

압화처럼 선명하게 피어 있다

어느 고대국가의 지층에 새겨진 족적처럼

누구나, 뒤축이 닿는 순간 스스로의 삶을

탁본하게 되는 것이므로

몫의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놓고

서늘하게 빠져나간 맨발

얼룩도 꽃의 흔적을 닮을 수 있는지

헐렁한 구두 속의 여백이 꽉 찬다

 

 

[심사평]

 

예년에 비추어 특별히 뛰어나다 할 수 없는 올해의 응모작품들을 두고, 심사위원들이 숙고 끝에 마지막으로 간추려보았던 시편은 변희수, 황제윤, 권명호 제씨의 것이었다. 위의 세 분은 균제미가 고루 돋보이는 시적 성취들을 함께 선보이고 있었다.


권명호씨의 시는 생활의 이면들을 어느 정도 생생한 시화로 구체화시킬 줄 아는 응모자의 절제된 구상력을 엿보게 했다.


혈육의 애틋한 정을 일깨운 '아버지의 발등'과 같은 시가 일례일 것이다. 그러나 일상성을 뚫고 솟아오르는 이런 감동이 역설적으로 신인다운 상상력과 개성을 희석시키는 것이 아닐까 판단되었다.


황제윤씨의 시편에는 풍경을 해석하고 감싸 안는 시선의 깊이가 느껴졌다.
웅장하게 세워지는 대불보다 환하게 꽃피운 해당화의 생명력에 주목한 '꽃불'이나,눈발들의 시각화로 차창 밖의 풍경을 문면 가득 흘러넘치게 한 '운주사, 덜컹거리는' 등은 응모자의 패기와 시적 자질을 충분히 읽어내게 하였다.


변희수씨는 전체적으로 사물과 세계를 적절히 통제해 시적 긴장을 부여할 줄 아는 응모자로 여겨졌다.
범상한 소재들로 삶의 미묘한 국면들을 저울질하고, 그만한 짜임새의 시로 격상시킨 것은 그의 수련이 어느 정도의 성취를 아우를 만한 수준에 이르지 않았을까 기대하게 하였다.


그런 기시감이 황제윤씨의 앞자리에 그를 내세우게 한 까닭이다.


심사위원들은 변희수씨의 응모작 중에서 '아주 흔한 꽃'이 고단하게 걸어온 삶의 내력을 행간과 행간 사이로 더욱 섬세하고 선명하게 부조(浮彫)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심사위원 이하석, 김명인


부산일보

 

나무의 문 / 김후인

  

몇 층의 구름이 바람을 몰고 간다

그 몇 층 사이 긴 장마와

연기가 접혀 있을 것 같다

바람의 층 사이에 머무르는 種들이 많다

發芽라는 말 옆에 온갖 씨앗을 묻어 둔다

여름, 후드득 소리 나는 것들을 씨앗이라고 말해본다

 

나는 조용히 입 열고

씨앗을 뱉어낸 최초의 울음이었다

 

오래된 떡갈나무 창고 옆에

나뭇가지 같은 방 하나 들였다

나무에 걸린 바람을 들여놓고 싶었다

지붕이 비었을 때엔 빗소리가 크다

빈 아궁이에 솔가지 불을 밀어 넣으면

물이 날아올랐다

물기를 머금고 사는 것들이

방안을 채울 줄 알았다

아궁이 옆에서 뜨거운 울음의 족보를 본다

 

실어 온 씨앗으로 바람은 키 작은 뽕나무를 키웠다

초여름, 초록이 타고 푸른 연기가 날아오르고

까만 오디가 달렸다

 

문을 세웠더니 바깥이 들어와

빈 방이 되었다

바람의 어느 층이 키운 나무들은 흰 연기를 품고 있다

어제는 나무의 안쪽이 자라고 오늘

나무의 바깥이 자랐다

 

나무는 어디가 문일까

 

문을 열어 놓은 나무들 마다

초록의 연기가

다 빠져나가고 있다

  

 

[심사평]


세상은 갈수록 미궁이지만 시를 읽는 일은 여전히 즐겁다. 우리 앞에 놓인 한 아름의 희망들이 온 세상을 새롭게 밝힐 것이란 기대를 갖게 했다. 응모 편수는 예년과 비슷했으나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향상된 수준이었다. 고만고만하게 다듬어진 시들이 주류를 이루던 예년과는 달리 수작과 태작의 경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는 강습 등을 통해 만들어진 시가 아닌 자생적인 시 쓰기가 회복되고 있는 조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우리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박길숙의 '적도에서 온 남자' 외 2편과 김후인의 '나무의 문' 외 4편이었다. 박길숙의 시들은 발랄한 감각과 자유분방한 보폭이 흥미로웠다. 시의 큰 덕목인 새로움의 추구에는 부합하지만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다. 반면 김후인의 시들은 단단하고 치밀한 문맥, 팽팽한 거리두기가 믿음직스러웠다. 그동안 연마한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보내온 다섯 편 중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아도 좋을 만큼 수준도 골랐다. 빈틈을 보이지 않는 견고한 윤곽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시의 힘은 숨 쉴 여백을 만들며 출렁거릴 때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오랜 숙의 끝에 우리는 박길숙의 시들이 좀 더 숙성되는 과정을 거치기를 바라며 김후인의 '나무의 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가장 작고 낮게 발언하면서도 가장 높고 멀리 퍼져가는 시의 위대한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리라 믿는다.

 

심사위원  정진규 시인

 

강원일보


덩굴장미 / 김영삼
 
저 불은 끌 수 없다

차가운 불


소나기 지나가자 주춤하던 불길 거세게 되살아나 담장을 또 활활 태운다 잔주름 늘어나는 벽돌담만 녹이면 단숨에 세상을 삼킬 수 있다는 건가 막무가내로 담장을 오르는 불살, 한 번도 불붙어 본 적 없는, 마를 대로 마른 장작 같은 몸뚱이 확! 불 질러 놓고 재 한줌 남기지 않고 스러져도 좋을 무덤, 큼직한 불꽃이 서로 팔들을 엮고 저들의 등을 밟고 올라선 불꽃들이 또 하나의 일가를 이룬 곳으로 나는 걸어 들어간다 나에게 불을 다오, 저들의 영토에 손을 내미는 순간,


나는 차가운 화상을 입는다

불똥은 땅에 떨어져 꽃으로 자꾸 피어나는데


나는 졸지에 불을 잃다

 

 

[심사평]

 

금년도 응모 작품들은 예년에 비해 작품 수는 많았으나 특출한 작품이 없어서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며 상투적인 언어의 시들과 신춘문예라는 옷을 입고 등장한 작품이 많았다. 그런 작품들은 자칫 진실성이 결여되어 가식적이고 허영적인 글이 되기 쉽다.


이번 심사에서는 오늘 이 시대의 삶을 반영하는 시, 새로운 언어감각의 시, 그리고 신인다운 특성과 참신성을 높이 평가했다.


본심에 올라온 열다섯 분의 작품 중 오영애씨의 `흰 꽃이 지다'는 언어감각은 뛰어났지만 주제의식의 깊이가 약한 것이 흠이었다. 정솔씨의 `공룡능선'은 비유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서 설득력이 약했다.


당선작인 김영삼씨의 `덩굴장미' 외 `初冬'은 뛰어난 언어감각과 신선한 비유가 좋았다.


예를 들면 `덩굴장미'를 `차가운 불'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또한 “자신이 차가운 화상을 입는다”라는 비유는 매우 신선하고 감각적이었다. 주제의식 역시 보편성을 내면화하고 있으며 특히 “나는 졸지에 불을 잃다”라는 표현은 생명의 상징성을 아이러니한 표현 기법으로 승화시킨 뛰어난 작품이었다.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이승훈,이영춘

 

국제신문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 김지혜

  
들판의 지표면이 자라는 철


유목의 봄, 민들레가 피었다
민들레의 다른 말은 유목
들판을 옮겨 다니다 툭, 터진 꽃씨는
허공을 떠돌다 바람 잠잠한 곳에 천막을 친다
아주 가벼운 것들의 이름이 뭉쳐있는 어느 代
날아오르는 초록을 단단히 잡고 있는 한 채의 게르
꿈이 잠을 다독거린다.


떠도는 혈통들은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어느 종족의 소통 방식 같은 천막과 작은 구릉의 여우소리를 데려와 아이를 달래는 밤
끓는 수태차의 온기는 어느 후각을 대접하고 있다.


들판의 화로(火爐)다.
노란 한 철을 천천히 태워 흰 꽃대를 만들고 한 몸에서 몇 개의
계절을 섞을 수 있는 경지
지난 가을 날아간 불씨들이
들판 여기저기에서 살아나고 있다.


천막의 종족들은 가끔 빗줄기를 말려 국수를 말아 먹기도 한다.
바닥에 귀 기울이면 땅 속 깊숙이 모래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초원의 목마름이란 자기 소리를 감추는 속성이 있어 깊은 말굽 소리를 받아 낸 자리마다 바람이 귀를 접고 쉰다.


이른 가을 천막을 걷어 어느 허공의 들판으로 날아갈 봄.  

 

[심사평]

 

삶을 응시하는 깊이와 고단한 삶 밝게보는 능력 탁월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의 심사는 예심 없이 271명이 보낸 전체 응모작을 심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중에서 1차 심사를 통과한 작품은 총 27편이었다. 논의에 논의를 거쳐 최종심까지 오른 작품은 '벗어놓은 외출' '둥근 강' '폐기물집하장 가는 길' '비밀의 화원'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등 5편이었다. 이 중에서 '비밀의 화원'과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를 놓고 심사위원들의 최종논의가 있었다.

'비밀의 화원'은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시로서 작가의 현실인식이 돋보이는 시였다. 이주노동자를 형상화하는 데에 있어서 그들의 수난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그들의 아픔에 다가가는 솜씨가 뛰어난 시였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가 오히려 이주노동자의 삶을 자기 아픔으로 여기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화자가 관찰자의 태도로 물러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는 민들레의 씨앗이라는 미시적인 사물들에서 유목민들의 삶을 거시적으로 이끌어내는 발상이 참신한 시다. 민들레의 꽃말에서 유목을, 민들레 홀씨가 부푼 모양에서 유목민의 텐트인 게르를 연상하고, 이를 수태차, 말발굽 등으로 이어나가는 이미지가 자연스럽다. 이를 통해 유목민의 고단한 삶을 봄의 이미지를 살려 밝게 형상화하는 능력이 탁월한 점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편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역량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응모작의 전반적인 수준에 있어 김지혜가 고르다는 점을 높이 사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를 당선작으로 하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바란다.

 

본심 심사위원 정희성 강영환(이상 시인) 허정(문학평론가)

 

서울신문

 

 

새장 / 강정애

 

나무 밑 떨어진 이파리들은 모두

누군가 한 번 쯤 신었던 흔적이 있다

낡은 그늘과 구겨진 울음소리가 들어있는 이

파리들

나무 한 그루를 데우기 위해

붉은 온도를 가졌던 모습이다

 

저녁의 노을이 모여드는 한 그루 단풍나무

새장

 

새들이 단풍나무에 가득 들어있는 저녁무렵

공중의 거처가 소란스럽다

후렴은 땅에 버리는 불안한 노래가 빵빵하게

들어 있는

한 그루 새장이 걸려 있다

먼 곳을 날아와 제 무게를 버리는 새들

촘촘한 나뭇가지가 잡고 있는 직선의 평수 안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후드득, 떨어지는 새들의 발자국들

 

모든 소리를 다 비운 새들이 날아가는

 

열려져 있으면서 또한 무성하게 닫혀 있는 새장

허공의 바람자물통이 달려 있는 저 집의

왁자한 방들

잎의 계절이 다지고 먼 곳에서 도착한 바람이

그늘마저 둘둘 말아가면

새들이 앉았던 자리마다 새의 혀들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늘이 사라진 자리에는 새의 혓바닥들만 부스럭거릴 것이다

 

모두 그늘을 접는 계절

간혹, 지붕 없는 새의 빈 집과

느슨한 바람들만 붙어 붙어 흔들리다 간다

한 그루 단풍나무가 제 가슴팍에 부리를 묻고 있는 저녁

후드득, 바닥에 떨어지는 나무의 귀

누군가 새들의 신발을 주워 책갈피에 넣는다

 

[심사평]

 

살아있는 생각과 언어의 결
 

응모작들이 기성 시단의 어떤 흐름에 깊이 감염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말과 말 사이의 공간이 너무 커서 완전한 독해가 어려운 시들이 적지 않았고, 유행하는 소재를 검증 없이 끌어다 쓰는 안이한 시도 여럿 있었다. 감동을 생산하려는 의지보다 시를 잘 만들려는 욕망이 비대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시의 리얼리티에 대한 배려가 전반적으로 부족해 보였다. 
 

당선작을 결정하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신성희씨의 ‘신발들이 날아간다’는 가장 읽을 만한 시였다. ‘벌판에 버려진 신발이 하나 있다 /그 외발을 벌판의 창문이라고 혼자서 불러보았다’는 첫머리부터 시선을 사로잡았다. 현란하고 강렬한 이미지들이 시 읽는 재미를 배가시켰다. 다만 지나치게 궤도를 이탈한 몇몇 불안한 표현에 꼬투리를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참 아깝다. 머지않아 좋은 시인으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강정애씨는 시적 대상을 객관화하면서도 충분히 자기 말을 할 줄 아는 시인이다. 당선작 ‘새장’은 생각과 언어의 결이 살아 있는 시다. 자칫하면 상투성의 늪으로 빠질 수 있는 나무나 새와 같은 소재를 붙잡고 묘한 긴장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무엇보다 감정을 자제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대상을 자기 안으로 바짝 잡아당겨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방증이다. 앞으로 서정의 지평을 크게 넓히는 시인으로 성장하리라 믿는다.

 

시 부문 본심 심사위원 백무산·안도현

예심 심시위원 유성호·손택수

 

 

전북일보 

 

오래된 골목 / 장정희 

 

작은 아버지 바지가 걸린 바지랑대 사이로 푸석한 골목이 보였다.

구암댁 할아버지 이끼 낀 돌담을 짚으며 모퉁이를 돌아가고

양철대문이 덜컹, 삽살개가 기다림의 목덜미를 물었다.

입대한 큰아들 주검으로 돌아오던 그날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작은 아버지는 좀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발가락이 오그라든 대문은 문패를 버리고 밤새

신작로 쪽으로 귀를 던져 놓고 있었다.

낮은 지붕을 내려온 거미가 먼저 발을 내딛는 골목,

목줄을 잡아 맬 수 없는 굴뚝으로 연기는 담쟁이넝쿨같이 기어 나왔다.

뼈마디 드러난 상처를 덮듯 배추는 또 자라나고

햇살은 어두운 골목에 도둑고양이의 눈빛을 씨앗처럼 심어주었다.

다섯 살 박이 손자가 작은 아버지 팔을 잡아당기며 대문을 나서고.

나는 빨랫줄 문 집게처럼 뻣뻣한 골목의 시간을 만지고.

바람이 골목에 발을 담글 때마다, 나는

한 남자의 내면을 수없이 들여다보았다.

 

[심사평]참신한 묘사적 표현, 시에 생기 불어 넣어

 

좋은 시는 남들과 다른 언어를 건지려는 노력에서 나온다. 그렇게 태어난 시는 이기적이면서 품이 넓다. 그런데 비유가 생경한 시, 비문이 노출된 시, 인위적으로 제작하는 데 급급한 시들이 적지 않았다. 다들 조바심을 내는 듯했다.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친 시들이 그만큼 아쉬웠다는 말이다.

 

네 분의 시가 마지막까지 남았다.

 

정지웅 씨의 '매미'는 매미 울음이 공중에 구멍을 뚫는다는 재치 있는 발상의 시다. 발상이 그저 발상으로 끝난 아쉬움이 크다. 소재를 끝까지 밀고 가는 힘을 키워야 할 것이다.

 

이명옥 씨의 '사과 연대기'는 어투가 매우 발랄하고 상상의 진폭이 크다. 시에서 감각을 어떻게 끌어올려야 하는지 아는 사람 같다. 하지만 시를 만지는 손끝이 너무 쉽게 드러나 보이는 게 흠이다.

 

최병국 씨의 '구름을 걷는 달팽이' 외 몇 편은 상당히 현란한 상상력과 언어 구사 능력을 보여준다.

문장과 문장 사이 의미의 연결이 불투명한 약점을 시급히 보완하면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는 장정희 씨의 '오래된 골목'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했다.

언뜻 보면 평이해 보이지만 자신의 사유를 잘 간추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있는 시다. 군데군데 참신한 묘사적 표현이 시에 생기를 더하면서 '오래된 골목'의 전경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앞으로 더 좋은 시를 보여주는 시인으로 성장하시기를 바란다. 축하를 드린다.

 

황동규(시인·서울대 명예교수),안도현(시인·우석대 문창과 교수)


불교신문 

   

분천동 본가입납(本家入納) / 이 명

 

태어나 최초로 걸었다는 산길을 돌아  

푹신한 나뭇잎을 밟으며

청주 한 병 들고 능선을 밟아 내려갔니더  

누님이 벌초를 해놓은 20년 묵은 산소는  

어둡고 짙은 주변의 빛깔과는 달리 어찌나 밝은지

무덤이 아니었니더  

봉긋하게 솟아오른 아담한 봉오리  

그랬니더, 그것은 어매의 젖이었니더  

진초록 적삼을 살짝 풀어 헤친 자리에 속살이 드러나고  

빛이 쏟아져 나왔지요  

나는 그만 아기가 되어 한참동안 보듬고 쓰다듬고  

얼굴을 파묻었을 때는 맥박소리가 들려오고  

숨이 턱 막혔었니더  

내가 오는 줄 알고  

미리 나뭇잎으로 길을 덮어두고  

아삭아삭한 소리까지 그 속에 갈무리해 두었디더  

나는 낙엽을 밟으며 산등을 넘고  

어매는 그 소리에 옷고름을 풀었겠지요  

적삼 속에서 영일만 바다가 아장아장 걸어 나오고  

해안선이 출렁거리고  

몽실몽실한 백사장이 예전과 같았니더  

이 젖의 힘으로 여태껏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환하게 한 세상 살고 있고 

하늘 가득 씨앗들이 날아오르고  

파릇파릇 아기 부처들이 자라나고 있었니더

  

[심사평] 잘 익은 말의 빛깔

 

아침의 언어는 언제나 눈부시다. 신춘문예의 벽을 넘기 위해 오래고 먼 모국어의 장강을 거슬러 올라온 신인조들이 저마다의 빛깔과 소리와 뜻을 절정으로 뽑아낸 시, 시조는 더욱 그렇다. 시조가 우리의 전통시인 터에 굳이 자유시와 나뉘일 까닭이 있을까마는 지금까지의 현상은 분리해서 공모를 했었는데 불교신문의 경우는 시라는 큰 틀 속에 묶은 것이다.  

총 310인의 응모자에 편수로 1000편이 넘는 작품들을 읽으며 느낀 것은 대체로 시의 수준이 고르게 높아가고 있으며 시 경작을 하는 후보층이 두텁다는 것이었다. 다만 시행지가 주는 종교적 선입견 때문인지 불교적 소재나 주제의 작품들이 두드러지게 많았다는 점이다. 그것이 감점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의식적인 필요는 없어야 할 일이다.  

어렵게 가려낸 결과 ‘분천동본가입납’ ‘순천만의 저녁’ ‘소금꽃’ ‘돌탑을 쌓으며’ ‘대숲이 있는 항아리’를 최종심에 올려놓고 저울의 눈금재기를 해서 ‘분천동본가입납’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시도 예술의 한 양식인 이상 시대적 패러다임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몇 해 특히 신인들이 좇아가는 시의 흐름은 우리 시의 정체성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당선작 ‘분천동본가입납’은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듯 어머니의 산소에 가서 “어메의 젖”과 만나는 “풀벌레들이 환하게 한 세상을 살고 잇는” 정경들이 크게 꾸미지도 않으면서 깊고 은은한 가락으로 펼쳐진다. 다시 아기가 되는 화자와 어메와의 해후가 “…니더”의 화법으로 전해주는 잘 익은 말의 빛깔이 오래 묵은 향기로 피어난다. 함께 보내온 ‘추사가 보내온 저녁’이 작품을 끌어올리는 밑밭침이 되었음을 덧붙인다. 더욱 큰 성과있으시기를 빈다.


이근배(시인)

 

동양일보


끈 / 정영희

  

쇠죽 쑤는 저녁이었다

집집마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쌀 앉히는 소리로 마을이 저물면

밤이 이슥하도록 두런두런 눈이 내렸다

국화송이 같은 눈송이를 툭툭 털어내며

혈족들 하나둘 모여 들고

풀 먹인 밤을 와시락와시락 눈이 내려

창호지 밖은 불을 켜지 않아도 환했다

시릉 위에 얹혀 있던 해묵은 이야기로

할머니 장죽에 불을 붙이시면

오촌 당숙은 18대조 할아버지 이야기로

눈 내리는 장백산맥을 한 달음에 뛰어 넘고

엄마와 숙모는 치맛자락도 펄럭이지 않고

광으로 부엌으로 걸음이 분주했다

작은 아버지는 밤을 치시고

흰두루마기 입으신 아버지

먹을 갈아 지방을 쓰셨는데

타닥타닥 발간 화롯불 온기 속으로

한번도 보지 못한 고조 할배 다녀 가시고

슬하에 자식없던 증조 할매

눈물바람으로 다녀 가시고

나이 열여섯에 절손된 집안에 양자로 오신 할아버지

그 저녁에 떨어진 벌건 불화로에

다리 절룩이며 다녀 가시고

눈이 까만 아이들이 잠을 설치는 밤

뒤란 대숲에는 정적이 한자나 쌓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눈을 맞으며

오늘도 눈 푸른 열 여섯살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들이

쿵쿵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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