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정군칠 시모음 본문
가문동 편지
낮게 엎드린 집들을 지나 품을 옹송그린 포구에
닻을 내린 배들이 젖은 몸을 말린다
누런 바다가 물결져 올 때마다
헐거워진 몸은 부딪쳐 휘청거리지만
오래된 편지봉투처럼 뜯겨진 배들은
어디론가 귀를 열어둔다
저렇게 우리는,
너무 멀지 않은 간격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살을 맞대고 사는 동안
배의 밑창으로 스며든 붉은 녹처럼
더께진 아픔들이 왜 없었겠나
빛이 다 빠져나간 바다 위에서
생이 더욱 빛나는 집어등처럼
마르며 다시 젖는 슬픔 또한 왜 없었겠나
우리는 어디가 아프기 때문일까
꽃이 되었다가 혹은 짐승의 비명으로 와서는
가슴 언저리를 쓰다듬는 간절함만으로
우리는 또 철벅철벅 물소리를 낼 수 있을까
사람으로 다닌 길 위의 흔적들이 흠집이 되는 날
저 밀려나간 방파제가 바다와 내통하듯
나는 등대 아래 한 척의 배가 된다
이제사 너에게 귀를 연다
애월길
달의 뒤꿈치를 끌어당기는 먹구름이
가끔 길을 끊어 놓는다
길섶의 쑥부쟁이 내음 더욱 짙어지고
해안은 열이레 가을달로 마모되어 간다
구엄지나 중엄, 중엄 지나 신엄의 오르막길
사람이 곧잘 떨어져 죽은 흔적이 남아 있는 벼랑에
문수가 서로 다른 신발들이
드문드문 방지석으로 서 있다
달이 벼랑에 이르자
방지석 사이 뿌리를 두고 피어난 한 무더기 억새
자줏빛 더욱 짙어진다
마을의 불빛들 모두 꺼지고,
벼랑 위의 멍을 지나 고내로 떠가는 달
느슨하게 몸을 풀던 아스팔트의 역청제가 굳어지는 사이
또다시 고내 지나 애월로 나서는 수만 년 달의 길
고개 너머 그 길을 좇는다
방어의 잠
꿈틀대는 방어의 살을 발라내자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뼈들
파도의 행간처럼
아득히 먼 길을 본다
물 굽이 굽이를 넘어온
저 척추를 받친 빗금들이
지느러미를 움직이던 힘이었을까
살이 토막날수록 온기를 빼앗기며
더욱 선명해지는 갑골문자
적조에 시달리던 바다를 품어 알을 슬던 내장이
번쩍이는 칼날 아래
갈매기의 근육진 그림자를 토해낸다
입덧하는 여자처럼
난도질 당한 속을 게워낸다
방어放語
달의 난간
―涯月
파도는 부드러운 혀를 가졌으나 이 거친 절벽을 만들었습니다
열이레 가을달로 해안은 마모되어 갑니다 지워지다 이어지고 이어졌다 끊어지는 신엄의 오르막길, 바다와 가장 가까운 벼랑에 이르자 누군가 벗어놓은 운동화 한 켤레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생의 난간에 이르면 달빛 한 줌의 가벼운 스침에도 긁힌 자국은 선연할 터인데 내 안의 빗금 같은 한 무더기 억새, 바싹 다가온 입술이 마릅니다
生涯의 끝에 이르러 멈추었을 걸음 망설임의 흔적인 듯 바위틈에 간신히 붙은 뿌리, 뿌리와는 달리 땅 쪽으로 뻗은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온몸으로 지나간 길, 마음 한번 비틀어 曲을 만들고 마음 다시 비틀어 折을 만들었으나 길 밖을 딛었을 자의 흔적은 허공뿐입니다
자주 바람 불어 달이 잠시 흔들렸으나 죽음마저 품어버린 바다는 고요합니다
철쭉
엉덩이 불 댄 어린 노루들이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는다
가도 가도 불덩이다
숨죽여 있던 불씨들이
노루발바닥에 묻어
사방으로 튄다
수수백년 잠복해 있던 방화범
산불감시요원도 어쩔 수 없었겠다
산불이 났다
철쭉은 붉고 나는 새까맣다
孤內
얼마나 외로웠으면 고내리 가는 길은
등뼈 다 드러나도록 검게 타들어간 채
안으로만 길을 내었을까
화를 낸다는 것은
자기 안의 화를 다른 이에게 넘기는 일
외로운 자들은
제 안의 화를 제 안에 태운다
빈 방
삼태성 막 돋는
저녁 무렵
왜가리 날아와
금붕어 한 마리 물고갑니다
연못에
빈방 하나 생겼습니다
나비 상여
외따로 난 산길
나비 날개를 어깨에 멘 개미들이 간다
죽어서 맴돌기를 멈춘 나비
오색무늬 제 몸이 만장이 된다
바람의 지문
늦은 밤
고향집 헐릴 때 모셔와 벽에 세워놓은 문 두 짝
창구멍마다 나를 들여다 보는 눈들이 있다
아파트 젖빛 유리문에 어리는 띠살문
창호지를 새로 바른 날이면
골목의 나뭇가지 이끌고 마실 나오던 달빛에
수틀 안 누이의 목련도 활짝 몸을 열곤 했다
좀이 슬기 시작한 창살에서 어린 날의 허기가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알게 모르게 내려앉은 먼지를 닦아낸다고
문고리에 새겨진 지문들이 지워질까
먼지처럼 후, 불어 날아갈 얼룩이라면
아버지 가끔 저 문짝을 걷어차지 않았으리
그럴 때마다 초가지붕의 처마처럼 어머니,
품을 옹송그리진 않았으리
간혹, 탯줄처럼 긴 골목을 휘둘러 온 바람이
이가 잘 맞지 않은 문틈으로 들어왔다 말없이 나가고
아버지 저 문턱을 건너신 후 다시 오지 않으시고
어머니 또한 문턱 넘어 새로 지은 버선을 신으신 지 오래
하나 하나 헤아릴 때
그 문을 들락거리는 바람의 지문이
내 얼굴의 굵은 주름살로 자리 잡는다
무릎 꿇은 나무
모슬포 바닷가, 검은 모래밭
서쪽으로 몸 기운 소나무들이 있다
매서운 바람과 센 물살에서도 속수무책인 나무들
오금 저리는 앉은뱅이의 생을 견딘다
저 록키산맥의 수목한계선
생존을 위해 무릎 꿇은 나무들도
혹한이 스며든 관절의 마디들을 다스린다
곧 튕겨져 나갈 것처럼 한쪽으로 당겨진 나이테의 시간들이
공명이 가장 깊은 바이올린으로 다시 태어난다
곧게 자라지 못하는 나무들의 뼈,
그 휜 뼈의 깊은 품이
세상의 죄스러운 것들을 더욱 죄스럽게 한다
베릿내의 숨비기꽃
물총새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
베릿내에는
고향 뜨며 거둘 새 없던 숨비기꽃 겨우 몇 포기
바다마을을 지킨다.
이 척박한 바위틈에 어머니의 숨비 소리꽃으로 타올라 있다.
제기랄.
지금은 어머니 산소 다녀 오는 길
어깨 늘어진 숨비기꽃도 함께 다녀 오는 길
봉분의 흙 한줌 가져와 꽃부리 덮어주면
어느새 내 등에 얹혀오는 따뜻한 손이 있다.
사라호 태풍이 일던 아침 물이 불어나고
내를 거슬러 오르던 은어떼들로
갈대들의 사타구니는 오싹오싹 긴장을 하고
마을을 에워싼 숨비기꽃은 바람을
잘도 막아 주었다.
다시 태풍이 불었다.
그 이름없는 태풍에는 희한하게도 물이 줄어 들었다.
은어떼는 흙탕물에 방향을 잃고
갈대들은 몸 추수릴 새도 없이 흙더미에 묻히고
숨비기꽃은 이파리 찢기며 나팔을 불어댔지만
자갈을 퍼 올리는 중장비의 굉음에 묻히고 말았다.
바삐 도망치는 게 한마리
게 한마리처럼 집을 빠져 나오는 사람들을 보며
그게 칭원하여 바다는 거품을 물었다.
아득도 하여라
강산은 일 년만에도 변하여 그 일년이 스무번을 넘겼고
누이의 젖살 같은 베릿내에는
방황의 냇둑을 굽이 안고 돌아
숨비꽃의 낭자한 상처를 아물리고 있다.
새의 조준
무늬석인가
숲길에서 돌멩이 하나 집어 들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새똥이다
단단한 발길들 흔적이 없고
묽은 새똥만이 안타까이
돌의 몸을 일으킨다
나무 그늘에서 나는 가려운 머리를 긁었을 뿐인데
나를 겨냥한 새 한 마리
해녀콩
태아의 발길질에
멀미나는 세상이 있었다지
저승길 멀다 해도
바닷속 그 길 만할까
들숨이 있는 한 살아있는 목숨이라
홑적삼에 달랑 바지 한 잎
날아가다 멈추었다는 비양도, 팔랑못 가
바다 향해 섬칫섬칫 줄기 뻗은 해녀콩
줄기 끝 콩꼬투리 야물게 매달려 있다
바다는 날콩의 비린내를 노을빛으로 받아낸다
바닷속 드나듦이 사는 길이라
속엣것 지우려
한 됫박 날콩을 먹었다지
불턱에 모여 앉은 젊은 해녀들
상군 해녀의 허리에 찬 납덩이같은,
탯줄처럼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하지
그런 날 바다의 낯은 놀빛 더욱 붉어지고
수평선에 묻다
푸른 이끼 돋은 돌담 아래
水仙이 귀를 세운 날
솔동산 가파른 고갯길에 헉, 숨이 막힌다
서귀동 512번지 仲燮 없는데
절여진 온기를 어루만지며 서서히 늙어가는 집
툇마루에 소금기 짠하다
한 평 남짓 셋방살이 서른여섯 중섭이가 우두커니 앉아
있더라 찬찬히 바라보면 수평선은 바다의 죽음이어서 섬
도, 바다도, 허공도, 삼백예순날 허기진 마디들도 적막하
고 또 적막하더라
이 섬과 저 섬이 너무 가깝다
이 생과 저 생이 너무 가깝다
늪, 견뎌내다
밤을 달려 너를 만나고 온 아침
죽은 나방의 흔적을 지운다
밤길 끝이 보이지 않고 차창에 매달린 바람은 날 선 칼끝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너를 향한 한 가닥 그리움 어둠의 내장을 가르는 전조등이 너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속도계의 바늘을 향해 나방이 달겨들었다 가차없이,
凹凸 부분의 길을 지날 때 밑도 끝도 없이 굽이지던 삶이 출렁거렸다. 길의 권태가 끝나는 곳마다 가드레일은 계율처럼 웅크려 터무니 없는 흥정을 요구해 왔다 때론 바튼 숨결을 헐떡이며 끌려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가늠해야 할 방향이 무너져 내렸다 직선을 고집하는 불빛을 좇아 아득한 어둠 속에서 뛰어들던 나방 세상의 암暗유리를 들이받고 싶다는 생각, 생각은 항상 착시현상 속에서 조각났다
몽유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올 때 으깨어진 몸통이 쓸려나간 자리에 달라붙어 있는 몇 개의 까만 점 혹, 죽어가며 슬어놓은 나방의 알은 아닐까 고치 속처럼 안전지대에 들어앉은 알들이 내 몸 속에서 꿈틀거린다 무섭게 견뎌내고 있다
바다의 물집
환한 빛을 따라 나섰네
지금은 달이 문질러 놓은 바다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
여에 부딪치는 포말들을
바다의 물집이라 생각했네
부푸는 바다처럼 내 안의 물집도 부풀고
누군가 오래 서성이는 해변의 밤
온통 흰 꽃 핀 화엄의 바다 한켠
애기 업은 돌을 보았네
그 형상 더욱 또렷하였네
제 몸 밀어내고 다른 몸을 품고서야 바다는
해변에 닿는다지
버릴 것 다 버린 바다의 화엄이
저 돌로 굳은 것일까
걸러내야 할 것들이 내게도 참 많았네
목이 쉬도록 섬을 돌았네
단지 섬을 돌았을 뿐인데 목이 쉬었네
파도의 청징淸澄한 칭얼거림이 자꾸만 들려왔네
깍지 낀 손 풀어 그 울음 잠재우고 싶었으나
달빛은 바다 위에서만 출렁거리고
나는 서늘한 어둠의 한켠에 오래
오래 머물지 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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