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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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겨울호 '시선'신인상 당선작 / 강남주

휘수 Hwisu 2008. 1. 4. 14:41

2007년 겨울호 '시선'신인상 당선작 / 강남주

 

1963년생 수원 출생

장안대학 영어학과 졸업

'시인과 풀씨' 동인

 

금창고  

 

오래될수록 맛이 깊어진다는 소금을 한 가마니 들여온 순간
고자였던 버드나무집 소금장수 왕씨가 따라 들어왔습니다
늘 소금을 등에 지고 날랐던 그의 등은 곱사처럼 굽어 있었고
소금창고를 지키던 그 집 앞 버드나무
왕씨가 소금을 지고 소금 팔이에 나설 동안, 소금간으로 맛을 내어
끓인 왕씨네 국밥집 장국은 아내의 눈웃음처럼 사람들을 꼬였습니다
소금 사러 온 한 남자와 소금장수 아내가 눈이 맞아 사라진 날부터
창고에 쌓인 소금 한 가마 두 가마 낫에 찍혀 허물어졌습니다
닫혀있는 창고를 부수고 소금도둑이 들던 밤 달빛이 스며들었습니다
왕씨가 스르르 소금기둥이 되어 달을 품던 순간
소금이 제 몸뚱어리였던 왕씨는 소금무덤에 갇혔습니다

                                                                         

넉넉한 것들은 품는 버릇이 있다

 
벼르던 와일드플라워 파자마가 도착했다
꽃무리가 허리끈에서 발 끝자락까지 주렁주렁 이어진 와일드플라워 파자마에
함께 들려온 라벤다향

 

외제종이가 구석구석 파자마까지 스며있다
나는 단숨에 혁대를 풀러 파자마를 바른쪽 다리에 걸쳤다
햇빛에 비친 파자마가 다리를 감싸고 바닥까지 질질 끌렸다
허리춤은 늘어난 팬티처럼 헐렁헐렁 벗겨질 듯 헐거웠다

 

나는 사이트를 접속해서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는 파자마가
중간사이즈 라고 판매한 건 사기라고 말했다
허리를 두어 번 접고 밑자락도 두어 번 접으면 그럭저럭 입을 만 하다고
접속자중 누군가 그녀를 두둔했다 원래 파자마는 그런 맛에 입는 거라고 재차 역성을 들었다

 

 나는 둘둘 말아 옷장 구석에 파자마를 밀어 놓고 잊어버렸다

 

어느 날 옷장 속에 처박혀 있던 파자마가 생각났다

바른쪽다리를 베개에 걸치고 자다가, 솜이불을 두르르 말고 자다가,

라벤다 향내 에 킁킁거리다가 눈을 떴다

와일드 플라워 파자마가 내 몸뚱어리를 넉넉한 품으로 품고 있었다

  

가방

 

부친상에서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낯선 가죽가방이 들려져 있다
자크를 벌리자 갓 구워낸 빵들이 쏟아졌다
대관령 목장에서 명곡을 들으며 자란 젖소의 고소한 우유냄새
우유식빵, 요구르트가 고개를 밀고 가방에서 올라왔다
소가죽가방에 담아온 천수만의 바람으로 손끝이 서늘했다
가방에서 쏟아진 종이컵에 국화 찻잎을 띄워 마시는 동안
그녀의 검은 그림자가 가방 속에서 어른거렸다
돌아오는 신호등에 걸렸을 때 그녀에게
새로 장만한 명품가방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녀도 애써 입을 다문 채 핸들을 꺾었다
큰 소가죽가방이 가녀린 그녀의 어깨를 안고
매탄시장 길을 내려갈 때
뒤를 따라가는 늙은 소 한 마리가 보였다                           

                

황사에 빠지다

 

그녀의 휴대전화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들어 있다
사람 좋은 그녀의 일과는 사람들을 만나 밥 한 그릇 사주는 일
밥그릇을 길거리에 늘어놓는다면 아마도
수원에서 청량리쯤 이어지리라


내 전화에는 일년 전부터 한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다
그 사람으로 아파했던 날들
눈물이 흘러 앞이 보이지 않았다
맘 그릇을 길거리에 늘어놓는다면 아마도
수원에서 영등포쯤 되리라

 
그녀가 내 휴대전화에 사는 한 사람을 물어왔다
건너온 목소리에서 먼지가 부옇게 날린다
하필, 그 사람을 찾는다

일주일째, 나는 황사에 빠져있다

 

서로 맞물리다


 그릇 두 개가 꽉 물리고 말았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플라스틱과 사기그릇이

 식탁 위에서 종종 가볍게 툭툭 치며 티격태격 부딪치기도 하고 잔기침도 하고 가래를 끓이며

 그럭저럭 간격을 유지해 오다가 불가사리 같은 의혹에 아니

 어린 시절, 비가 온 웅덩이에 살짝 진흙을 덮어놓은 개구쟁이들의

 함정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한쪽 다리처럼
 두 그릇이 그만 미끄러운 세제에 서로 맞물려 버렸을 때
 나는 오래된 벽장 속에 꽁꽁 감춰둔 지혜의 상식 상자를 꺼내려 왼발을 깨끔질 한다
 자! 우선 큰 냄비에 냉수를 콸콸 쏟아 붓고 맞물린 두 그릇을 텀벙 담그는 거다
 이때 주의할 것은 플라스틱 안에 물려있는 사기그릇 안에는
 100도가 끓어 넘치는 물을 귀퉁이까지 부어 물세례를 주는 일이다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지 모를 맞물린 그릇들의 신경전을

 느긋하게 관찰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얼른

 사기그릇 귀퉁이를 잡아 옆으로 살짝 비틀어 올려본다
 쭉 몸을 틀며 플라스틱그릇에서 영혼처럼 빠져나오는 저 사기그릇
 이제 건조대위에서 두 사람이 습관처럼 시치미를 뚝 뗀 체 공기에 몸을 섞고 있는 중이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