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제2회(2008년) 월간 <우리詩> 신인작품 당선작 / 이경희 본문
독해 외 4편
우리 집 개는 슬쩍 슬쩍,
내 곁을 지나다닐 때마다
나를 핥는다
입으로 맛을 보거나 하지 않으면
뭔가는 시원치 않다는 듯
바코드를 읽어 내려는 센서처럼 재빨리
혀를 댔다가는 지나간다
부지런히 제 볼일 보러 가다가도
아차, 잊은 듯 돌아와 핥는다
내가 밖에서 돌아와 섰을 때나
식구들 편하게 섞여 티브이나 무언가에 키들거릴 때
그 속에 적당히 숨어 있는 나를
개는 잊지 않고 맛보고 간다
오늘은 간이 좀 어떤가
하루 동안의 내 노동의 발등 근처를 할짝,
어느 때는 영 신통치 않다며
제 발바닥으로 꾸욱 밟고도 지나간다
태업한 성분의 어중간한 핑계만으로는
찔끔 내 발을 물러나게 하기도 하는 그,
도대체 집요한 모종의 탐색에도
나머지 무엇이 몹시 모자라, 모자라다며
개는 핥는다, 내 궁금한 발이나 손을
그 때마다 순간적으로 나는
껍질이 찝질하고 얄팍한 어리둥절한 먹이다
밥밥 디라라
참을 수 없이
뱃속이 추운 날,
공복이 퍼렇게 언 입술로
와들거리며 나를 올려다보는데
그런 날은
찾아 나서고 말겠다, 띠띠
기필코 만나러 가겠다, 띠띠
주술에 걸린 위장이 어딘가로 스돈돈돈 타전을 하고
손을 잡고 우리는 나란히 외출을 하지
정통으로 무엇을 통일하고 싶었을까, 문득 통일
순대국, 밥집 하나 찾아냈어
내가, 내 위장이, 내 식욕이,
모르스 부호 같은 내,
교란 중인 추위가
서로 다른 위장들이 걸어 다니다가
위장끼리 눈이 맞고 위장끼리 사랑을 하는
참을 수 없는 위장의 노래들을 어쩔 수가 없어서
서둘러 들어서서 밥을 시켰는데?
뱃속 저 밑바닥에서 오래 전부터의 한기가
발끈 눈을 떴어
오랜 무병의 여자가 기어이
제 정체 알아차리고 까무라치듯
저기 주방 저 쪽에
열렬한 체온을 가진 아주 뜨거운 그것,
감춰진 신물에 이끌려 찾아 왔노라고
격하게 대기하고 있는 것 같은?
이제 드디어 내림굿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와
뱃속으로 월담해 들어오는 달빛, 혹은 탐욕 같은 것
들어와 봐, 너를 보여 줘
단청처럼 지랄스런 색동옷을 입혀 줘
미친 꽃 하나가 아, 하고 입을 벌렸어
그리고
드디어
이윽고
너
그리웠어, 그리웠어, 마구 뒤섞인 재료들이
어쩌면 외설적으로도 엉켜 있지
섣불리 마구 헤집어도
무방비로 제 몸을 헤쳐줄 것 같이
하찮고 값싸고 그러나 뜨거운
들쥐처럼 나는 빨갛게 빛나
열렬함은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걸까
먹,는,다, 는 건
얼마나 화려한지
가랭이를 벌리고 핀 꽃 같지 않아?
그때 어떤 철학 하나가 진땀을 삐질거리며 돌아갔지
그러면 알게 돼
밥을 물고 울음을 삐죽이는 건
모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참회 때문이라는 걸
나머, 진
너, 무
무 참, 해
가 볍 거, 나
그리고는 문득,
후두둑
사랑이 끝난 후의 담배 한 모금이라는
샹송이 생각났어
바라보다
까무룩한 잠의 뒤켠에서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다 돌아갔다
그 사이사이로 문득
비행기 소리 지나가고
귀 아득한 곳
잠도 아닌 이승도 아닌
저기 어디쯤에서는
편지 한 장 날아오지 않는다
이대로 잠들어 눈 뜨면 혹시
이 세상 사라진 행길가 아닐까,
똑깍 똑깍
무심히 일어나 발톱을 깎는 오후
나는
누군가 꾸고 있는 꿈속
이제 막 퇴장한 배우같이
문득 낯설게 창밖을 본다
수인선 닭발
잘린 발들이 접시 위에서
오글오글 모여 궁리를 하고 있다
잘 자다 일어난 아침,
길 떠날 행장에서 어처구니없이 빠지게 된
도둑맞은 군화 같은 닭들의 발목
어느 볕 좋은 마당을 거닐다가 도난당한
장물인 줄도 모르고
매콤하니 쫀득한 닭발을 열심히 뜯다가 문득
그 많은 닭들은,
날다가도 이제 어디 가서
내려앉지도 못 하겠구나
신발 신으려다 말고 휘청 날개나 퍼득거리겠구나
매운 발들만 모여서 빨갛게 웅성대는 걸 보니
어쩐지 자박자박 발자국 소리 들릴 것도 같고
어디로 가시는가,
몸통이 없는 닭발만 걸어 다니는
아무래도 수인선 닭발집에 발 없는 닭들은 차표라도 끊어서
기차 태워 보내 주어야 할까 부다,
어디까지 갈 건지
무릎 꿇고
눈 맞추고
글썽,
찬찬히 물어 본 다음에
하굣길
코스모스 꽃망울을 떠뜨리며 돌아왔지
영화동 농아학교 앞을 지날 때
근처 전파사 라디오에서는 김삿갓 방랑기를 했어
농아들의 수다스런 이야기 사이사이로
차갑게 뛰어오르던 가을꽃
슬픔도 기쁨도 아닌 것 같은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육성회비조였어
자치기를 하다가 거꾸로 본 세상에는
무엇이 있을까
비가 와서 고인 작은 물구덩이에
세상은 전부 거꾸로 서 있었어
만화가게랑
타다 세워둔 세발자전거
모두들 묵묵하게 곤두박질 쳐 있었어
발밑이 허물어져
집으로 가는 길은 멀고
돌아 돌아가면 그 산길 위에 어느 새
붉은 해
뚝
뚝
지고 있었어
이경희 시인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이번 신인상 응모자 가운데 길미경, 김흥순, 이경희의 작품이 최종 논의 대상이 되었다. 세 분의 작품은 모두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어서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으나 이경희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심사위원 모두 동의하였다.
길미경의 작품은 소재를 구체적인 생활 주변에서 취하고, 이에 대한 화자의 느낌을 서술하는 시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읽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쉽게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진술이 평이하고 단순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경험이 진실하다고 해서 모두 아름다운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경험을 시화 할 때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이를 구현하고 적절한 리듬에 실어 진술하는 시적인 방법에 대한 숙고가 더 필요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김흥순은 모두 15편을 투고하였는데 그 중 14편이 단시이다. 대부분 자연에서 소재를 취하여 화자의 정서를 표현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전통적인 서정시의 어법에 충실하면서 짜임새 있게 시를 쓴다는 인상을 받았다. 서정시의 본질이 세계와 나와의 동일성을 지향하는 데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발상은 흠잡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받은 인상은 구태의연하다는 것이다. 신인다운 새로운 시적 감수성과 진술방식이 아쉬웠다.
이경희의 작품은 소재를 사물과 주변 생활경험에서 취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독특한 점이 눈에 띤다. 이경희의 작품은 세계와 나의 관계를 연속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세계관과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의 화자는 대상과 화해하려는 시도를 하기 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리저리 살피면서, 때로는 요설적으로 대상을 해체하고, 그 과정을 통해 대상을 새로 구축하여 낯선 사물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독해」에서 화자는 사람과 개와의 관계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하고 사람과 개의 관계가 역전되는 마무리를 통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통념을 배반한다. 「밥밥 디라라」에서는 밥을 먹는 일상적 행위를 통해 정상적인 소통관계가 단절되어 사랑이 불가능하게 된 시대적 징후를 활달한 구어체와 언어적 유희, 시행의 변화를 통하여 다양하게 표현한다.
때로는 그 과정이 지나치게 장황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이에 있었던 관념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인식을 독특한 언어적 감수성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경희의 작품에서 지나친 중언부언과 자조적인 어조는 결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대상에 대한 건조하고 복합적인 인식은 자칫 시적인 진정성과 서정성의 결여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심사위원을 망설이게 하였다. 그러나 「바라보다」에서 일상적인 경험에서 진정한 자아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내고, 「수인선 닭발」에서 술안주로 올려지는 ‘닭발’에 대한 연민의식과 「하교길」에서 구체적인 사물을 통하여 삶의 이면을 서정적 언어로 구현하고 있는 점 등이 이러한 결점을 충분히 상쇄하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심사위원은 이경희의 작품에서 보이는 언어적 감수성, 시적인 진술능력이 시인으로서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는 의견에 동의하였다. 시는 평생의 업이라는 각오로 더욱 정진하여 훌륭한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임 보, 임동윤, 홍해리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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