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최장균 시모음 본문
1960년 경기도 일산 출생
1988년
<현대시학>에 <벼랑에서> 외 1편을 발표하며 작품
경기도 파주시 고하읍에서 젖소 20여 마리를 키우며
1만5천여 평의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있다
시집 <백년자작나무 숲에 살자 > 창비 2004년
제37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앉아 있는 나무
저 그루터기로 보아 베어내기 아까웠던
한때 참 잘 자랐던 나무인 걸 한눈에 알아봤어요
한아름도 넘는 밑동이 곧게 자랐을 거란
믿음 같은 거
누군가 그 나무 베어낼 때 몹시도 슬퍼했던 흔적 같은 거
단번에 베어내지 못하고
몇 번이고 쉬어간 톱자국이 그걸
말하고 있어요
제 몸에서 걸어나온 나무의 아픈 흔적 같은 거
어쩌면 누군가도 그 나무 속으로
저와 같은 흔적 남기며 걸어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루터기나무의 가족으로 보이는
작은 나무들의 나뭇가지가 찢겨 있어요
쓰러지는 그루터기나무 받아
안고
내어주지 않으려다 찢어진 마음들 같은 거
작은 나무기둥 사이로 큰 슬픔이 빠져나간 듯 길이 나 있구요
하늘도 누수하듯 거길
들여다보고 있어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허공에다 파놓았던 그 나무의 푸른 웅덩이 사라진 뒤
환한 햇빛의 웅덩이가 새로 생겨나
있는 거예요
아무래도 그루터기나무는 어데 멀리 간 것이 아니라
숲이 내준 환한 슬픔의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해요
나도 이렇게
그루터기나무와 함께 앉아보는 슬픔으로요
오동나무
더 큰 나무를 만들기 위하여
나무를 자르면 허공이 움찔했다
나무가 떠받치고 있던 허공이 사납게 찢어졌다
잘 지냈던 허공과
떨어지지 않으려
몇번이고 나뒹굴다 결국은 아주 누워버렸다
밑동에서부터 둥글게 허공이 도려지는 순간이었다
허공이 떠난 빈자리에
새순이 불끈 솟아올랐다
돌아온 허공이 봉긋 부풀어오르고
나무는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이제
저 땅에서 걸어나온
시간만큼
나무는 자랄 것이지만, 방금
한 여자애가 태어나면서 쏟는 울음소리로
한껏 푸르러질 것이지만, 그럴 것을 믿는
그 집, 오동나무 집
개구리 울음소리
개구리 울음소리에다
나는 발을 빠뜨렸다
어느 봄밤
물꼬 보려 논둑길 들어서자
뚝 그친 개구리 울음소리에다
나는 발을 빠뜨려
고요의 못을 팠다
한발 한발
개구리 울음소리 지워나갈수록
깊어지는 고요의 못에다
내 생의 발걸음소리 빠뜨렸던 것
나는 등뒤에서 되살아나는
개구리 울음소리 듣고는
불현 듯 가던 길 잠시 멈춰 뒤돌아보니
내 고요의 못이 왁자하니 메워지는
소리 듣는다
비로소 내가 지워지는 저 개구리 울음소리
나는 그 논배미에서
벌써 걸어나와 집에 누웠는데도
개구리 울음소리는 줄기차게 따라와
내게 빠져 운다
내 삶의 못에
빠져 운다
비 듣는 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빗소리
참으로 많은 생을 불러 세우는구나
제 생을 밀어내다 축 늘어져서는
그만 소리하지 않는
저 마른 목의 풀이며 꽃들이 나를
숲이고 들이고 추적추적 세워놓고 있구나
어둠마저 퉁퉁 불어터지도록 세울 것처럼
빗소리 걸어가고 걸어오는 밤
밤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내 문 앞까지 머물러서는
빗소리를 세워두는 구나
비야, 나도 네 빗소리에 들어
내 마른 삶을 고백하는 소리라고 하면 어떨까 몰라
푸른 멍이 드는 낙숫물 소리로나
내 생을 연주한다고 하면 어떨까 몰라
빗소리에 가만 귀를 세워두고
잠에 들지 못하는 생들이 안부 묻는 밤
비야. 혼자인 비야
너와 나 이렇게 마주하여
생을 단련 받는 소리라고 노래하면 되지 않겠나
그칠 줄 모르는 빗소리 마냥 들어주면 되지 않겠나
버섯
입담 좋던 한 나무가
어느날 갑자기 말을 멈추어버렸네
주저리주저리 이고 가던
말의 물동이를 내려 놓았던 것이네
훈장처럼 달고 있던 바람도 가고 세월도 가버린,
이제 향기를 잃어버린 말이 굳게 닫히네
더이상 구름의 말을 찧지못하네
으릉으릉 시커멓게 썩어가는
비명처럼 내지르는 나무 속 천둥소리 몸엣말
자꾸 솟아나는 그 말마저 새어나지 못하게
제 혓바닥을 무수히 뽑아내고 있는 것이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