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유현숙 시모음 본문
1958년 경남 거창 출생
<동양일보, 2001년>과 <문학 선,
2003년>으로 등단
온시 동인. 시산맥회원
<오거리>엔솔러지
발행-제3의 문학사(2003년 7월)
(경 신, 신해욱, 안익수, 이희원 시인과 함께 낸 5인
시집)
보이차를 마시며
좋은 다기로 빚어진다는 건 수많은 세월 흙의 성질을 변환하는 일이다. 제 속에 품고 있던 완강한 고집들이 도공의 손끝에서 다듬어지며 환골탈태換骨奪胎되는 일이다. 사람도 그렇듯 한평생 매운 바람에 깎이고서야 다탁 위 다소곳한 한 벌 찻잔으로 거듭나는 것일까. 건창에서 자연 발효시켰다는 수수십 년 된 보이차, 장뇌나무 아래서 살며 제 사나운 본성 다 버렸다. 맑고 깊은 장뇌향 우리며 오래묵은 다관에서 풍화된 시간을 편직編織해 내고 있다. 뜨물빛 백자 찻잔이 입술에 따숩다. 도리깨질된 묵은 생각들이 벗겨지며, 여과되며, 바늘 돋은 혀 밑 淸淸한 산바람으로 와 감긴다. 쑥대밭 같은 일상이 잠시 정지되고, 나는 이른 아침 생강꽃 노란 망울 펑펑 터지는 산길 중턱에 앉아, 봄 깨는 소리 듣는다. 찻물 속으로 불거지는 이 무량의 곶, 도원도 여기 어디쯤일까.
몇 잔의 찻물을 따르며 벌겋게 헌 하루를 위안 받는 다늦은 저녁 시간.
물의 감옥
진흙은
끊임없이 뻗어나가고 싶은 관성에
굵은 매듭을 친다
목 밑까지 차 오르는 감탕물에 몸을 묻고도
제 속의
뼈저린 수절인 듯
초록의 연잎, 물에 젖지 않는다
사바의 수채 속에 떨어진 한 알의 연씨
제 뿌리를 내리는 일에 치성을
다한다
수면 위를 내달리는 전생의 바람을 만나
내 안에 잠든 향기를 깨워
멀리 풀어보내고 싶다
얼마나 깊은 기도를
올리면
끅끅 헛구역질을 게우며 몸이 열릴까
긴 입덧 후 열락 같은 진통이 끝나면
아, 그 땐 그만
그대 중심 깊숙이
스며들어 몸 풀리라
쩍쩍 갈라지는 연밥을 열고 나와
이 진창의 감옥에 시간의
씨알로 묻히리라
수 백년이 지나도 싱싱한 가임의 시간으로
홀로
남아
굴비
-불꽃 3
물기 뚝뚝 흐르는 생조기에다 굵은 막소금 한 웅큼 뿌린 것인데
내 전신이 쓰라리다
나는 소금에 절여진 굴비 한 마리가
된다
깊어진 겨울
간조기 두름을 처마 끝에 내건다
바람 차고
내 몸 속속들이 얼어붙는다
전신에 박힌 소금 알갱이들
살 속을 파고들어
오장육부가 쓰다
뜬눈에 보이는 하늘빛도 쓰다
얼마나 더 얼고 써야 이 두름 풀고
저 하늘 건너 지천의
소금밭에 염장될까
거기 불꽃으로 누워 내 눈과 귀 텅 비어
컹컹 개 짖는 소리 들을까
절여 단단해진 눈자위에 오소소 소름 돋는다
명주수건
-명주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누에의 일생을 생각해 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빙빙 모가지를 돌리며 누에는 스스로 토해 낸
젖빛 실로
제 몸을 가둘 고치를 튼다
뱃속
마지막 남은 한 오라기의 실 마저 죄 뽑아내어
허공에다 촘촘히 무덤을 짓는다
영면은 또 하나의 탄생인 그 무덤의 속은
얼마나
따뜻하고 섬세한 탈바꿈일까
내 뱃속 허기도 거푸거푸 풀어내어 결 고운
죽음 한 채 짓고 싶다
서걱서걱 갉던 뽕잎 슬그머니
밀쳐두고 나도
몇 령의 잠에 따라 든다
진득한 탈피와 애절한 변신을 꿈꾼다
큰 집 과수원 언덕배기에 걸터앉은
잠사앞 마당의 화톳불
눈멀고 귀 잠든 생의 불씨를 투덕투덕 토하고 있다
제
살 태운 생의 피륙을 뜨겁게 짜고 있다
국화빵
지하철 출입구 한구석에
겨울 장승처럼
간이노점의 국화빵틀이 서 있다
과거의 모서리 몇 군데가 깨진
빵틀만큼
오래된 중년의 남자가
낡은 기억들을
몇 번씩 뒤집으며 노릇노릇 구워낸다
베어 물 것도 없이 한 입 크기의
백동전 만한
추억들이
두어 줄 좌판 위에 널려있고
뼈가 삭는 고민도 없이 뒤집었던
젊은 날의 가책들 위에
생전 잊혀지지 않을 상처같은
팥알갱이들이
밀가루 반죽 위에 듬뿍 얹혀진다
바람난 계집처럼 몸 뜨겁게 달은 화덕은
이제야 속죄의 문신을 새기듯
흩어진
부끄럼들을 버무려 또렷이 박아낸다
누군가의 장식이면서 상처이기도 한
국화꽃 문신을 꾹꾹 찍어낸다
골목 끝에서 빵틀처럼 낡은 세월
하나가
불어오고 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