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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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호 시모음

휘수 Hwisu 2007. 4. 29. 11:49

1964년 경북영천 출생

대구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졸업

명지대학교 박사과정 재학 중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흑백사진

 

일곱 살 때 찍은 흑백사진
나는 아버지와 엄마 틈에 있었다
한쪽 팔은 엄마 무릎에 걸치고
다른 팔은 아버지 어깨에 기대고 있다
서로 걸친 어깨가
더 긴 이야기로 묶여진다는 것은
나중에 안 일이지만
드나들 간격이 따로 없었으므로
일가(一家)는 덩이째 깊어졌다
매미의 몸통처럼
숱한 얘기를 풀어낸 나는
양 날개 사이에서
얼마나 꼬무작거렸을까
혼자만 훌쩍, 키가 자랐다
몇 마디의 기억만 남기고
내 몸 슬쩍 빼나오니
쩌억쩍 금 가는 흑백사진
아버지와 엄마는 사진 속에서
내가 벗은 허물로 남아있었다

 

봄밤

 

봄밤엔
가등처럼 꽃피는 소리

뒤집어진 수화기
뜨물 같은 소리 흐르듯,

 

벌어진 꽃가지
저릿저릿 음액 흐르는 듯,

 

마악 터지는 벚꽃이
호르륵 호르륵
맨가지 핥아먹는 소리

 

짝짓기 끝낸 암컷이
수사마귀 삼키는 듯이,

 

삼켜진 수사마귀
깨물린 몸 마구 비트는 듯이,

  

장만옥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화양연화 속의 그녀
남자들은 잘록한 허리에 빠지지만
나는 ‘장만옥’이라는 이름에 홀린다


‘장’에 묻은 장칼의 비장함과
‘만’이 품은 중국식 야끼만두 냄새,
‘옥’의 한국식 촌스럼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그녀의 이름에 혹하는 건
그 적절한 ‘만’과 ‘옥’의 이미지에 있다


가령 ‘옥’이 강화된 ‘옥분’이나 ‘옥순’이거나
‘옥’의 이미지를 뻗어나간 ‘순옥’이나‘분옥’이가 아닌


단단한 차이나식 칼라의 ‘만’에 대해
그 滿 수위(水位)를 눈앞에 찰랑이게 하는


화양연화 속의 그녀 뒷모습
오래 훔쳐보는 것은
장만옥이라는 그 적절한 결함에 있다

 

불륜

 

승용차 밖의 남녀가 우리를 쳐다본다
뭐라고 수군거린다
승용차에 나란히 앉은
시인 女와 평론가 男인 우리에게
젖은 크리넥스 티슈 같은 눈길이 덮친다

 

그들의 입 모양으로 우리의 관계가 재구성된다
우릴 뭐라고 할 것 같아요
그가 묻는다
글쎄, 자리를 바꿀까요


차창 밖의 두 얼굴을
잘못 작동된 윈도우 브러쉬가 닦고 지나간다
우리는 그들의 눈짓으로
각자의 위치를 재편성한다


그가 운전석으로 자리를 바꿀 동안
내가 뒷좌석으로 옮겨간다
우리도 저 남녀의 행동을 지켜본다
그들의 행동이 본격적으로 수상하다


눈으로 서로 간섭하는
승용차의 안과 밖
차안과 피안의 체위, 체위를 바꾸는
두 세계가 유리창에 집약된다.

 

빨간 잠


그녀의 아름다움은 졸음에 있다


빳빳, 헛헛한 날개로 허공을 가린 저 졸음은
겹눈으로 보는 시각(視覺)의 오랜 습관이다


‘아름답다’ 라는 말의 벼랑 위,
붉은 가시 끝이 제 핏줄과 닮아서
잠자리는 잠자코 수혈 받고 있다


링거 바늘에 고정된
저 고요한 날개!
잠자리의 불편한 잠은
하마, 꺾이기 쉬운 목을 가졌다


어쩌면 아름다움은
알면서도 위태롭게 졸고 싶은 것,
등이 붉은, 아주 붉은 현기증이다


그녀에게도 오래 떠밀리는 세월이 필요했는지
저기 저 꿈속인양 졸고 있는
등이 붉은, 아주 붉은 그녀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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