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조정 시모음 3 본문
조정 시인
1956년 전남 영암 출생
1998년 국민일보 「신앙시 공모」최우수상
2000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시 <이발소 그림처럼> 당선
서울 서초동 사랑의 교회 신문 「우리」 편집장
이발소 그림처럼 /조정
무위사 / 조정
갈빗집에서 꽃 피는 소리를 듣다 / 조정
붉은 골목 / 조정
바다가 나를 구겨서 쥔다 / 조정
월동 / 조정
철쭉제 / 조정
칠량으로 지는 해 / 조정
지네 / 조정
누에막 살던 연순이네 / 조정
옹관 / 조정
애기 옹관 / 조정
빈집 / 조정
이발소 그림처럼 /조정
풀은 한 번도 초록빛인 적이 없다
새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해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치자꽃은 한 번도 치자나무에 꽃 핀 적이 없다
뒤통수에 수은이 드문드문 벗겨진
거울을 피해
나무들이 숨을 멈춘 채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지친 식탁이 내 늑골 안으로 몸을 구부렸다
밤이 지나가고
문 밖에 아침이 검은 추를 끌며 지나가고
빈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 보면
회색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잠에 들어 두 편의 꿈을 꾸었다
풀은 흐리고
새는 고요하고
해는 타오르지 않고
티베트 상인에게서 사온 테이블보를 들추고
식탁 아래 몸을 구부렸다
자꾸만 어디다 무엇을 흘리고 오는데
목록을 만들 수조차 없었다
허둥지둥 자동차를 타고 되짚어 가는 꿈은 유용하다
탱자나무 가시에 심장을 얹어두고
돌아온 날도
나는 엎드려 자며 하루를 보냈다
삶이 나를
이발소 그림처럼 지루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무위사 / 조정
절 마당에 발 디딜 데가 안 보여
마애 부처가 돌 속에서 나오다가 멈춘다
아이고오 똥도 씨언하게 못 누고 가네
노래하는 새를 찾아 벽화각 돌던 여자가 뛰쳐나가고
죽은 그림에서 산 새를 찾던 여자는 여자대로
동백은 제 꽃을 툭툭 밀어 떨어뜨린다
나도 똥, 눌까 말까
사람들이 해우소 문고리를 잡았다 놓았다
많은 괄약근이 한꺼번에 나무관세음하는 초파일
갈빗집에서 꽃 피는 소리를 듣다 / 조정
아뿔싸
여든 여덟 살 잡수신 이로 고기는 쉽게 못 잡수시는 아버님
간 데 없으시다
서빙하는 젊은 여자였다
낙과가 태반인 우리 집 감나무 거름으로 쓸 갈비뼈다귀 한 봉다리 가져 와서
아버님 눈에 제 눈을 썩, 맞추는데
감 열면 저도 주세요오
교태가 자르르르 흘러
맺히지도 않은 올 여름 감꼭지가 모조리 단단해지는데
아찔한 이마를 드니
아버님 간 데 없으시고
관골에 꽃물이 든
내 아들
예쁘게 예쁘게 내 앞에 앉아 계셨다
냉면 사발을 추켜들고 남은 국물을 마시는
코끝이 싸하다
나는 냉면 국물에 겨자를 너무 많이 푸는 편이다
붉은 골목 / 조정
길을 잘못 들기는 흔한 일이어서
별 수 없이 다음 골목으로 꺾어들어도 길은 이어지기 마련인데
그 골목에서
늙은 개가 내 차의 브레이크를 밟은 건 아니었고
번호 붙은 유리문들이
홍등 아래 딸 하나씩 담고 사열 중이었다
나는 남대문 시장 지하에 앉아
아무도 내가 파는 물건을 사가지 않는 헐벗은 밤을 생으로 삼켜가며
오장육부를 조금씩 헐어 빚을 갚을 때였는데
길을 잘못 드는 사내도 없는 대낮 골목에 차를 세우고
생수 한 병을 사고
편의점 의자에 앉아 버렸다
와이드 판탈롱 밑 이십 센티 통굽 샌들에 저마다 잘못 접어든 길을 끌고
딸들이 흔들흔들 걸어 나와
내 간과 쓸개와 가래가 잡히기 시작한 허파를
뚝뚝 떼어 먹었다
기도한 지 오래 되어 약도 되지 않는 나는 미안할 뿐이었다
A-6호 유리를 닦고 난 여자가
A-7호, A-8호 앞으로 물이 흐르는 양동이를 옮겨가는 동안
생수를 마시며
남자 없이 아이를 배고 싶었다
백 명도 더 되는 딸들을 담아갈 내 자궁을 살펴보았다
날마다 골방에 들어가
낳고 낳아야 할 딸들을 담고 나오는 골목이 붉었다
바다가 나를 구겨서 쥔다 / 조정
눈이 수평선을 지우고
바다가마우지 떼를 지우고 온다
소나무 숲을 지나 송림 슈퍼에서 뜨거운 커피를 산다
알루미늄캔 속에 출렁이는 바다
낡은 목도리를 두른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끊어진 길을 위해
낡은 자전거를 불태운다
딛고 올라가기에 인생만큼 부실한 사다리도 없다
많은 침묵을 풀어 물위에 내려놓은 사람들이 바다를 빠져나간다
굳이 떠나야만 했던 길을 되짚어 가는 동안
눈은 한정 없이 쏟아지고
출항을 포기한 집들은 문을 깊게 닫고 잠이 들 것이다
빈 탈의실이 문도 없이 떨고 서 있다
푸른 비치파라솔을 그려 넣은 옆구리에 한 사내가 오줌을 눈다
내가 그만 바다와 저 비굴한 기다림과
이 추위 속에서 길을 잃을 것만 같다
빈 캔을 주머니에 넣고
운동화를 벗어 털면
병든 시계바늘이 쏟아진다
엇갈린 바늘처럼 비명을 지르는 시계가 내 발바닥에 고인다
제 때 제 곳으로 가지 못하는 발을 위해 나는 발목을 불태워 버린다
거대한 냉기가 모래를 헤치고 엎드려
손을 내민다
조금 더 내리고 말 눈이 아니다
바다가마우지가 바다를 통째로 삼키고 올라온다
올라오지 않는다
바다가 큰손으로 나를 구겨서 쥔다
월동 / 조정
햇빛은 눈을 빤히 뜨고 사람을 보는 버릇이 있다
셔츠에 좀이 슬어 잔구멍이 났지만
가슴을 파먹고 옮겨가는 벌레들을 막을 수 없다
숫돌을 꺼내 심장을 간다
무딘 채로 버틸 수 있다면 끝내 버텨보는 것인데
벼르고 별러도 뱃머리를 댈 곳이 없는
길이 그물에 걸린다
겁먹은 바람이 우편함에서
납기가 지난 사망 통지서를 집어다 준다
납기를 대지 못한 생은 몇 퍼센트의 연체료를 가산하는지
잘 벼린 정맥으로
북극성 귀퉁이에 풀어진 나사를 조인다
추위에 새들마저 길을 잃으면 큰일이다
냉랭하게 마음을 사리고 잠든 뱀이 소스라친다
수화기의 끈을 풀어놓고
새들이 내려앉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올해는 果樹도 쉬는 해다
해가 찢어진 그물을 당기며 하혈을 한다
해초 무침에서까지 나프탈렌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폐선의 머리를 쪼개 불을 피운 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면
가슴이 아픈 물고기를 모조리 붙잡아 식탁에 올릴 수 있다
낡은 절을 만나면 그 가슴에 들어가 못을 줍고
찬물을 떠서 마신다
바위에 노랑 각시 붓꽃 뿌리가 얼룩져 있다
꽃은 죽어서도 눈을 빤히 뜨고 사람을 홀리는 버릇이 있다
<창조문예> 2004년 12월호
철쭉제 / 조정
봄이 천천히
늦게 도착하는 의사처럼 길을 늦추어 오더니
치사량 넘는 꽃을 주사했다
근육질 단단한 능선을 따라
몰아치는
다홍바다陳*
끊으며 다그치며
꽃은 꽃에 연하여 끝이 없고
산은 산에 연하여 줄기차다
새들이 깊은 하늘로 거침없이 몸을 던져 닿고 있는
한 소식
받아 칠만 하다
서시 (2006년 봄호)
* 陳 : 베풀 진, 늘어놓을 진.
칠량으로 지는 해 / 조정
목선을 마당 앞까지 밀어놓고 칠량만은 잠이 들었다
빈틈없이 꽃피어 배롱나무가 이생을 환하게 벗어난 후였다
묵은 장처럼 찰랑한 햇살 속에
물레는 돌고
흙덩이를 말아 올리며 사내는 돌아보지 않았다
잔 흙은 떨어져
사내의 발등에 떨어지기도 하고 안 떨어지기도 하는데
나는 거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버린 사내도 없기는 한가지였다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니 덫에 든 쥐도 움직이지 않았다
늙은 갯벌이 슬그머니 바다를 당겨 덮는
기척에 등 뒤가 서늘하였다
저 큰 물레를 누가 돌리고 있었나
배가 부를 대로 부른
옹기 한 잎
물레에서 툭 떨어져 바다를 넘어갔다
격월간 [시와창작] 2006년 5,6월호 -
지네 / 조정
건드리면 아악
울 것처럼 몸이 붉은 지네가
기둥 밑으로 기어와 죽어 있었다
뭘 봐 씨팔 년아
독한 말에 걷어차여 발을 떼지 못한 채
염천교 구두 골목 지나 벽제 가는 버스 뒤로 내리 꽂히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세브란스 빌딩 앞 가로수 아래
빗물은 컵라면에 차오르고 소주병 매끄런 어깨를 쓰다듬었다
건물 틈틈이 기대어 그들은 비를 긋거나 볕을 피하는데
그는 늘 가로수 아래 있었다
불어서 녹는 신문지 같은
그를 무릎에 안고
길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눈 밑이 번들거리기만 했다
먼지처럼 고요해진 그를 개미 떼가 떠메어 갔으나
잠이 들면 그는 미약처럼
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붉게 취한 그가 목을 물어뜯었다
가임기 지난 월경이 요를 적셨다
<시와사상> 2007 여름호
누에막 살던 연순이네 / 조정
못을 쳐
지네 스무 마리씩 묶어서 거는
사내가 기우뚱 올라 선 사다리 사이로
누에 철이 소낙비처럼 지나가는 중이었으니
닭 뼈를 던져두면 비자나무 그늘로 슴슴슴슴 지네가 모여들었다
청상의 코를 물어뜯어 제 여자를 삼은
사내는 동각 뜰에서 칠흑처럼 짓이겨져 죽지 않고
동네 곁을 살아내며
내 친구 연순이를 낳고 그 애 동생 순복이를 낳고 그 아래 길남이를 낳고
내가 놀러 가면 얼굴이 깨어지게 웃어 주었다
닭죽 솥을 열고
복 복자 써진 사발에 그득 떠주기도 했다
병 있는 집 음식을 얻어먹어 나는 매를 맞았고
사내는 녹슨 못에 지네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떴다
무덤가에 끄윽끅 장끼가 울었다
코에 흉이 진 아낙이
사기그릇을 한 솥 삶아 소쿠리에 건지는 동안
몸빼 밑에 드러난 복사뼈가 고왔다
문장 웹진 2006년 1월호
옹관 / 조정
밭에서 네가 나왔다
시루 바리 납작병 깨어진 녹유병을 거느리고
네가 가까이 잠들어 있어
겨울 대숲이 허리가 휘게 울고 나는 자다가 깨어서 울었다
가슴을 대고 우는 방바닥이 두근거렸다
고랑을 긁어 마늘씨를 놓았다
화살촉이 여럿 나왔다
무 배추 뿌리에 녹슨 동전이 딸려 나왔다
너를 먹고 자란 김치 얹어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며
물에 잠겨
셋이거나 넷으로 보이는 손을 들여다보았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귀가 우는 소린 줄 알았다
마음이 무단히 귀 우는 소리를 따라 떠돌 때
나비 날아가는 그림자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흙도 붉게 가슴을 파헤치고 누운 밭머리에서 일어나
너는 없었다
밭이 빈 항아리를 낳았다
귀 우는 소리였고 나비 날아가는 그림자였고 찔레꽃 향기였다
너를 허리에 묶고 나는 간다
마른 바다만 쌓여 사무치는 항아리 속으로
너를 돌려주러 간다
살을 찢어서 흘러내리는 너를 보리라
애기 옹관 / 조정
그릇인 나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여자가 없어서
나는 그릇이 아니었다
젖은 가슴을 불 속에 두고 애기를 받아 안은
나는 어미였을까
어린 새는 죽어서도 내 그물을 끊으며 날아갔다
애끓고 소란하여
천 년이 하루 같았다
머리맡에 풀이 욱거나 봄이 보습 날을 물고 지나갔다
꽃대 튼튼한 용설란이 흔드는 산산조각 흰 요령 소리를 듣는다
봇물 터지듯
파헤쳐지는 비탈밭에 정수리가 깨어진 채 나앉아
나는 외롭고 마음 평평한 사금파리 되었다
옹기장이가 나를 반죽하여 다시 무엇을 만들 수 없다
시집 <이발소 그림처럼> 2007년 실천문학사
옹관 - 신석기시대에 시신을 수납 또는 인골을 수장하는데 사용하였던 관으로 독널이라고도 한다. 경상남도 진주시 상촌리에서 출토되었다
빈집 / 조정
죽은 시계가 벽에 붙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등 굽은 부엌문 안에서
시커멓게 다리를 벌리고 쏘아보는 아궁이에게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던가
뒤란 마타리꽃 얼굴이 눈에 부실 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얼룩 뱀이 등을 빛내며 장독 그늘로 스며들어갔다
마음이 먼지처럼 줄어
빈 손바닥으로 마루를 쓸어 주었다
시작되기 전에 넘치고 멈추지 못해 지나친 기다림이었다
속이 비치는 여름옷 위로 칠점박이 무당벌레들이 날아앉아
살을 더듬어 왔다
등燈 같은 어린 것들이
얼굴 깨어진 사진틀을 지나 목구멍까지 늘어진 거미줄을 타고 가물가물
주저앉은 방구들 틈
없는 무릉을 메고 떠도는 쥐며느리 떼를 비추어 주었다
개가죽나무처럼 어두워져서 나는 기우뚱 저승으로 몸을 기울인채였다
계간 <시선> 2006년 여름호
출처 :좋은 시를 찾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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