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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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시모음

휘수 Hwisu 2006. 11. 3. 00:16

 

내 영혼이 죽은 채로 술병 속에
썩고 있을 때
잠들어 이대로 죽고 싶다
울고 있을 때
그대 무심히 초겨울 바람 속을 걸어와
별이 되었다

오늘은 서울에 찾아와 하늘을 보니
하늘에는 자욱한 문명의 먼지
내 별이 교신하는 소리 들리지 않고
나는 다만 마음에 점 하나만 찍어두노니
어느날 하늘 맑은 땅이 있어
문득 하늘을 보면
그 점도 별이 되어 빛날 것이다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을
한 겹씩 파내려 가면
먼 중생대 어디쯤
화석으로 남아있는
내 전생을 만날 수 있을까
그 때도 나는
한 줌의 고사리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무는 바다쪽으로 흔들리면서
눈물보다 투명한 서정시를
꿈꾸고 있었을까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
멀리 있어 그리운 이름일수록
더욱 선명한 화석이 된다

 

4月                     


4월에는
부끄러움 때문에 시를 쓸 수가 없다
정치가들처럼
욕망 때문에
인생에 똥칠이나 하면서 살지 않으면 천만다행
이미 젊은날 접질러진 내 날개는
하늘로 가서 구름으로 흐른다
문을 열면
온 세상이 시로 가득하거늘
아침에 일어나
오늘도 해가 떠 있음을 알고
저녁에 잠들어
꿈 속에 그대를 만나면 그뿐

 

회상수첩(回想手帖)

 

그해 겨울에는 일기를 쓰지 않았어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언제나
바람이 허파 속에서
부러진 날개를 푸득거리고 있었어
생손앓이 사랑 끝에 도시는 폐쇄되고
톱질 당한 다리 절름거리며
무채색 하늘을 건너가는 가로수들
거리에는 음악소리 저물어 가고

내 목숨 마른 풀잎 하나로
허공을 떠돌았지
기다리던 함박눈은 내리지 않았어
어느새 인적이 끊어진 지하도 가판대
석간신문들은 거만한 목소리로
낭만시대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지

끝내 실종된 친구들은 돌아오지 않았어
시간의 늑골을 분지르며
질주하는 전동차
도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흔들리며
겨울의 중심부로 유배되고 있었지
아무도 침몰하는 세상을
욕하지 않았어
다만 흐린 밀감빛 등불 아래
어느 서정시인의 시집을 펼쳐들고
한 여자가 소리 죽여 울고 있었지
문득 고백하고 싶었어
만약 이 세상에 진실로
봄이 온다면
날마다 그녀가 차리는 아침 식탁
내 영혼
푸른 채소 한 잎으로 놓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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