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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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익 시모음

휘수 Hwisu 2007. 5. 31. 10:23

경남 함안 출생

서울대 사범대 영문과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고별>, <편지>가 당선
시집 <우울한 샹송>1969, <야간열차(夜間列車)>1978
       <슬픔의 핵(核)>1983, <단순한 기쁨>1986
       <그리고 너를 위하여>1988
       <꽃나무 아래의 키스> (천년의시작 2007)

현대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현대시 동인

 

불꽃의 시간

 

관현악이 일제히 숨을
멈추자
바이올린 독주자는 발끝을 들어올린 채
끊어질 듯한 음계를 오르내린다.

 

그의 심장과
폐, 내장이 먼저 불붙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그의 온몸이 송두리째 화염으로 타올라
무대 위에는 유일신처럼 독주자만 있을 뿐,
나머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없다.


격렬한 조명 앞에 하얗게 노출된
그는, 순교자처럼 비장하다.
한 발자국 물러설 수 없는 발걸음을 디뎌
완벽하게 죽음의 벼랑 끝을 밟고
지나가야 한다.

 

펄럭이는 불꽃
그늘이
침묵하는 청중들의 가슴 위로
철렁, 내려앉는다.

 

시집 <꽃나무 아래의 키스>2007년 천년의시작    

 

이따위, 라고 말하는 것들에게도

 

물이 스미지 않을 적엔 스스럼없이
쉽게 떨어졌지만
그 몸에 물기가 점점 번져들자 종이 두 장은
마주 달라붙어, 서로를 견인하게 되었다.

 

축축해진 두 몸이 혼신으로 밀착하여
한 쪽을 떼어내자면 또 다른 한 쪽이
사생결단,
먼저 자신을 찢어놓으라는 것이다.

 

이따위 종이쪽지에도 이별은
고통 없이는 없나 보다.

 

시집 <꽃나무 아래의 키스>2007년 천년의시작 
 

틈 

 

문틈 사이로
처음엔 너무나 아귀가 잘 맞아서
좋은 궁합이었던 문틈 사이로
어느새
틈이 벌어졌다. 화해가 먹혀들지 않는다.

 

둘 사이를 힘껏 끌어다 붙여도
절대, 다시는,
재결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부리는 심술
별거(別居)의 틈새가 사납다.

 

영원히 함께! 약속으로
입맞춤할 수 있는 일 아무 것도 없다.
눈부시게 천년 누대(千年累代)를 떠받쳐온 종탑도
수백만 년 견뎌온 저 산 암벽덩어리도
결국은
균열 가고, 틈이 벌어지는 것이니

 

서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젊은 날 피로써 사무쳤던 붉은 인연이여!
맞이하자, 기꺼이,
저 치밀하고도 집요하게 시간이 밀어내고 있는
우리 사이 슬픈 틈새를.

 

시집 <꽃나무 아래의 키스>2007년 천년의시작

 
길일(吉日)


보도블록 위에
지렁이 한 마리 꼼짝없이
죽어 있다.


그곳이 닿아야 할 제 생의 마지막 지점이라는 듯.

물기 빠진, 수축된 환절(環節)이 햇빛 속에 드러나
누워 있음이 문득 지워진 어제처럼
편안하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흙의 집 떨치고 나와
온몸을 밀어 여기까지 온 장엄한 고행이
이 길에서 비로소 해탈을 이루었는가,
금빛 왕궁을 버리고 출가했던 그
고타마 싯다르타같이.

 

몸 주위로 밀려드는 개미떼 조문 행렬 까마득히,

 

하루가 간다.


시집 <꽃나무 아래의 키스>2007년 천년의시작

출처,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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