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구멍에 관한 시모음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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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에 관한 시모음 3

휘수 Hwisu 2007. 5. 29. 09:15

구멍에 관한 시 모음 3 
 

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쟁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티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노연화

 

   김장을 하다가 문득
   엄니 생각이 났다.
   고갱이 노란 배추 속살을 씹으며
   내가 먹고 자란 엄니의 몸이
   그 찰졌던 밥의 육체가 생각났다.
       
   가을볕에 등이 젖어 따스해질 무렵
   아버지가 입다 내놓은
   구멍 숭숭 뚫린 삭은 런닝구 입고
   니 아부지 뼈 빠지게 벌은 돈으로 산 건데
   난 집에만 있으니 어떠냐 하시던
  
   격식을 갖추어야 할 사람과는
   쌈을 같이 먹지 마라.
   나는 우중충해도 니는 하얘야 한다
   내 몸이 으스러져도 니는 고와야한다던
   엄니, 배추 속고갱이 같은 말씀들.

 

   지금 나는 아무데서고 쌈을 잘 먹는다.
   입 터지도록 밀어 넣고 아구아구 먹는다.
   구멍 난 런닝구 입던 엄니가 되어간다.
   내 아이들의 밥이 되어간다.
   쌈이 되어간다.

 

   詩와창작(2005년 봄호)

 

소리의 그늘 속으로 / 이화은

 

중이
죽은 대추나무 방망이 두들기는 소리와
딱따구리가
오동나무 쪼아내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지난 봄 한철이 쩡쩡했다는데
중이 목탁 치는 일이나
딱따구리가 나무에 구멍 파는 일이나
다 제 본업일 터
그러고 보면
중이나 딱따구리나
생업에 충실했던 노동의 한마당이었겠다
절집의 곳간이야 내 알 바 아니지만
울엄니처럼
가슴 한복판에 뻥! 구멍을 안고도
주렁주렁
오동나무의 자식농사는
올해도 대풍이니
큰소리 지나간 자리에 깃들 큰 고요는
또 얼마나 깊을까
슬그머니 가을귀를 미리 당겨
소리의 그늘 속으로 미리 한발을
밀어넣네

 

아름다운 매춘에 대하여 / 박남희

 

  벌레의 꿈틀거림에 관한 기억을 난 알고 있어 내 몸을 갉아 먹고 내 몸의 뚫린 구멍 속으로 하늘을 보는 벌레, 그래 나는 분명히 벌레먹은 이파리였어 그런데 너는 누구니? 벌레 먹은 나를 쳐다보다가 내 존재의 밑에서 나를 떠받치고 있으면서 나에게 살아있느냐고, 살아있느냐고 수없이 나를 흔들어대는 너는,

  그날 이후 햇빛은 나에게 선물을 주었어 벌레의 이빨에 갉아먹힌 만큼의 상처와 누군가에게 흔들린 만큼의 시련을 얹어 내 살갗 속에, 녹색의 길 속에 다독이며 별빛의 하늘에 이르는 눈빛을 선사해 주었어

  그래 이제 벌레에 대해서 말해주지, 벌레의 끊임없는 꿈틀거림에 관해서, 그 순수한 생의 몸부림에 관해서, 벌레와 함께 해온
 내 아름다운 매춘에 대해서, 이미 벌레에게 바친 이 한 몸 나를 갉아먹어도 나는 그가 좋아 난 지금도 밤마다 내사랑 벌레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 내 몸의 뚫린 구멍 속으로 바라보이는 하늘에 대해, 한 순간 반짝이다 사라지는 아름다운 소멸에 대해, 벌레먹은 채로도 아름다운 내 몸에 대해,

  그런데 지금도 자꾸만 내 몸을 흔들어대는 너는 누구니?

 

능소화 / 김선우

 

  꽃 피우기 좋은 계절 앙다물어 보내놓고 당신이나 나나 참 왜 이리 더디 늙는지 독하기로는 당신이 나보다 더한 셈 꽃시절 지날 동안 당신은 깊이 깊이 대궁 속으로만 찾아들어 나팔관 지나고 자궁을 거슬러 당신이 태어나지 않을 운명을 찾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머니를 죽이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다 그러다 염천을 딱! 만난 것인데 이글거리는 밀랍 같은, 끓는 용암 같은, 염천을 능멸하며 붉은 웃음 퍼올려 몸 풀고 꽃술 달고 쟁쟁한 열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능소(凌宵)야, 능소(凌宵)야, 모루에 올려진 시뻘건 쇳덩어리 찌챙찌챙 두드려 소리를 깨우고 갓 깨워놓은 소리가 하늘을 태울라 찌챙찌챙 담그고 두드려 울음을 잡는 장이처럼이야 쇠의 호흡 따라 뭉친 소리 풀어주고 성근 소리 묶어주며 깨워놓은 소리 다듬어내는 장이처럼 이야 아니되어도 능소(凌宵)야, 능소(凌宵)야, 염천을 능멸하며 제 몸의 소리 스스로 깨뜨려 고수레― 던져올리는 사잣밥처럼 뭉텅뭉텅 햇살 베어 선연한 주홍빛 속내로만 오는 꽃대궁 속 나팔관을 지나고 자궁을 가로질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는 당신 타는 울음 들어낼 귀가 딱 한순간은 어두운 내게도 오는 법, 덩굴 마디마다 못을 치며 당신이 염천 아래 자꾸만 아기 울음소리로 번져갈 때 나는 듣고 있었던 거라 향기마저 봉인하여 끌어안고 꽃받침 째 툭, 툭, 떨어져 내리는 붉디붉은 징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라


꽃병 / 마경덕

 

  온몸이 입이다

  한 입에 우겨넣은 붉은 목 한 다발. 부르르 꽃잎이 떨린다. 잘린 발목에서 쏟아지는 비린 수액, 입안 그득 핏물이 고인다. 소리 없이 생피를 들이키는 저 집요함. 허기진 구멍으로 한아름 허무를 받아먹는.

 식욕과 배설뿐인 캄캄한 구멍은 입이고 항문이다.


 시한부 목숨들. 나, 나 얼마나 살 수 있지? 물컹물컹 썩어 가는 발목을 담그고 일제히 폭소를 터트린다.
 아름답다 저 구멍.

 

느티나무 할아범 / 박동진

 

동네 고샅, 늙은 느티나무 베어지던 날
이장 선거에 떨어진 영감 골이 났다
"늙어 힘없으면 발 품 파는 심부름도 못한다디야,
이런 우라질 세상"

 

서른 아홉에 상처한 영감 
죽은 갓난아이, 기차에 뛰어 든 젊은 놈
돌림병에 죽은 벙어리, 저승길 편히 가도록
동네 궂은 일 마다 않던 영감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죽기 전에 이장 한번 하겠다는데
귀농한 젊은이가 이장이 되었다 

 

젊은 이장, 교통에 방해된다며
고샅길 수백 년 먹은 느티나무를
단숨에 전기톱으로 베어냈다.
몸통에 구멍 뚫린 느티나무 할아범
수백 년 묵은 뿌리가 잘려나갔다

 

낮술에 벌개진 영감
구멍가게에서 막걸리 서너 병 안주 없이 마시고
"나무 그늘에 땀 식히지 않은 놈 있었느냐" 호령이시다
오일장 보고 돌아올 때 다리쉼 할
느티나무 그늘이 걱정이다

 

뻘밭 / 함민복         
       
      부드러움 속엔 집들이 참 많기도 하지
      집들이 다 구멍이네
      구멍에서 태어난 물들
      모여 만든 집들도 다 구멍이네
      딱딱한 모시조개 구멍 옆 게 구멍 낙지 구멍
      갯지렁이 구멍 그 옆에도 또 구멍구멍구멍
      딱딱한 놈들도 부드러운 놈들도
      제 몸보다 높은 곳에 집들 지은 놈 하나 없네

 

       시집, 말랑말랑한 힘(2005년 문학세계사)

  

피리 / 김경주

 

 모를 심어가듯 구멍마다 숨을 심는다 갈라진 논길을 더듬는 단비같은 입술로 대궁 속, 소리의 가뭄을 교란시킨다 헛김만 가득한 어둠 속에 한 모 한 모 맑은 숨의 뿌리만을 묶어 심고 안창 깊은 곳, 오래 다진 울음들을 퇴비로 깔아준다 소리의 피를 빨던 거머리들이 녹아나기 시작하고 서서히 속내 오므리고 쓰러졌던 모종, 소리의 탯줄들이 풀리는 것이다 더운 바람만 요란했던 내부, 소리의 자궁 어디쯤에서 생쌀만한 슬픔들은 익어 가는 것일까 퍽퍽 뜨거운 눈물을 뱉어내며 태어나는 알몸의 벼들, 바람의 입술을 스치고 고랑 밖으로 쏟아질 때까지 쏟아질 때까지

 

빵구집 / 김영탁

 

빵구집이 있네

무엇이든지 구멍 나면 때워주는 그 집

홀아비 박씨 단 하나 못 때우는 게 있다면,

그 흔한 처녀는 그만두고

벙어리 과부 하나 못 때우는

그 빵구집

 

시집, 새소리에 몸이 절로 먼산보고 인사하네(2005년 황금알)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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