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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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시모음

휘수 Hwisu 2008. 4. 2. 19:04

1946년 강원도 양양

1976년 <심상>에 시 '겨울 추상화'를 발표
시집 <동해별곡> <내일로 가는 소> <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변명

어떤 날 새벽 자다 깼는데
문득 나는 집도 가족도 없는 사람처럼 쓸쓸했다
아내는 안경을 쓴 채 잠들었고
아이들도 자기들 방에서 송아지처럼 자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생각이 왔는지 모르지만
그게 식구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나에게 창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고
나는 또 나 자신을 위로해야 했으므로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아, 내가 문을 열어놓고 자는 동안
바람 때문에 추웠었던 모양이다 라며
멀쩡한 문을 열었다 닫고는
다시 누웠다

현대시 2004 5월호

 

다리를 위한 변명

 

먼 길을 다니다보면 자동차의 발이 천형 같다
말은 안하지만 그들도 몸을 버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쓰레기 봉지를 찢고 나온 닭발이나
바지 밖에서 잠든 노숙자의 다리나
다리는 쉬고 싶다

저 가느다란 것들에게 세상이 얹혀 다니다니

외다리 집게는 몸이 다리이고
시장바닥을 배밀이 수레로 밀고가는 사람은 찬송가가 다리이다
한 번도 집밖에 나간 적이 없는데 몸통을 잃은 나무를 보거나
아프리카는 짐승들이 사납고 먹을 것도 별로 없다는데
지뢰 때문에 다리가 날아가버린 우간다 아이들이
웃고 있는 사진을 보면
내 무릎 밑이 다 서늘해진다

다리는 먹이를 위하여 걷거나 뛰거나 하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언젠가 바닷가 모래톱에서 물떼새 한 마리가
외다리로 종종걸음 치는 걸
긴 해안선이 온몸으로 따라가 주는 걸 보았는데
그것은 마치 지구가 새 한 마리를 업고 가는 것 같았다


 

열린시학 2008 봄호

 

봄날 옛집에 가서

 

봄날 옛집에 갔지요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

머위 이파리만한 생을 펼쳐들고

제대하는 군인처럼 갔지요

어머니는 파 속 같은 그늘에서

아직 빨래를 개시고

야야 돈 아껴 쓰거라 하셨는데

나는 말벌처럼 윙윙거리며

술이 점점 맛있다고 했지요

반갑다고 온몸을 흔드는

나무들의 손을 잡고

젊어서는 바빠 못 오고

이제는 너무 멀어서 못 온다니까

아무리 멀어도 자기는 봄만 되면 온다고

원추리꽃이 소년처럼 웃었지요

 

유심 2004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