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이것아, 어째 그런 기술을 써먹었느냐 / 백승종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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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아, 어째 그런 기술을 써먹었느냐 / 백승종

휘수 Hwisu 2006. 4. 28. 00:13
갓 쓴 양반들의 性 담론 ①|첫날밤] `이것아, 어째 그런 기술을 써먹었느냐”
요본에 감창까지 다한 신부 소박…조선 선비의 야한 이야기 무궁무진
백승종_푸른역사연구소장

 

 

성관계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던 조선시대. 그 시절의 양반은 <고금소총>이라는 골계집을 통해 성적 관심과 불만을 털어놓았다. 시집간 딸이 첫날밤을 제대로 보내지 못해 걱정한 이야기라든지, 딸의 혼전 성경험에 대한 부모의 걱정, 아내의 부정에 대한 우려 등. 조선의 생활상을 담은 여러 문헌을 분석한 푸른역사연구소 백승종 소장이 펜을 들었다.
겉으로는 근엄한 조선 양반의 성 이야기를 글로 담는다. 그 첫회-.

점잖게 갓을 눌러 쓴 채 꼭두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사랑방에 정좌하고 있었을 것만 같은 조선시대의 양반들. 주야장천, 사시사철 늙어 죽을 때까지 그들은 ‘사서삼경’에 이(理)와 기(氣), 사단칠정(四端七情)이 어떻다는 둥 성현의 말씀만 되풀이 읽게 돼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양반들은 자신을 스스로 독서인이라는 뜻에서 선비(士)라고 불렀다. 양반들이 평생 되풀이 읽었다는 책들은 무미건조하다. 감정이 극도로 절제된 책들만 상대해 그렇겠지만 양반들이 남긴 문집도 품위와 격조는 높지만 딱딱하기 그지없다. 양반들은 간단한 안부 편지 한 장을 쓰더라도 <시경>과 <서경>을 인용했고, 사소한 일에도 격식을 갖추기에 부심했다.

양반들의 생활의식 속에는 ‘남녀칠세부동석’으로 대변되는 엄한 내외법(內外法)이 단단히 자리했다. 바깥양반은 사랑채에, 안주인은 안채에 따로 기거했다. 설사 부인과 동침할 경우에도 몰래 안채로 들어갔다 날이 밝기 전에 다시 사랑채로 나와 의젓하게 앉아 있어야만 했다.

이것이 예법에 맞은 생활이었다. 19세기 후반 명문가 여성들이 진술한 양반가의 생활상을 읽어보면 가정이라는 협소한 공간 안에서 남성과 여성은 격리돼 있었다. 조선사회는 공적 영역에서 남녀간의 성관계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의 양반들에게도 이른바 골계(滑稽)라는 것이 있었다. ‘골(滑)’은 ‘어지럽게 한다’는 뜻이고, ‘계(稽)’는 ‘같다’는 의미다. 따라서 골계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진위를 분간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풀이된다.

유명한 골계집으로는 강희맹의 <촌담해이>, 서거정의 <태평한화골계전>, 송세림의 <어면순>, 성여학의 <속어면순> 등이 있다. 이런 책들은 <고금소총>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이기도 했다. ‘고금소총’이란 예와 오늘을 통틀어 웃기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 책에 대해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골계는 양반들이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지은 육담(肉談)에 불과했고 한낱 우스갯소리일 뿐이라고. 양반의 엄격한 생활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이라는 주장이다. 다른 학자들은 이른바 육담에서도 풍자로 세상을 바꾸려는 선비의 높은 기상이 보인다고 한다. 모두 일리 있는 주장이다.

 

 

저 고운 딸년이 그 맛도 못 보면

 

 


▶사진: 단원 김홍도 '선비의 초상'

 

그럼에도 필자의 느낌으로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어 뵌다. <고금소총>에 담긴 양반의 골계·육담·소화에는 양반들의 성 담론이 숨어있다. 체면을 무척 중시하던 시대, 점잖은 그들로서는 차마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던 심각한 논의를 골계에 담았다.

화자 또는 작자인 양반이 청중 또는 독자인 다수의 다른 양반들 앞에서 일방적으로 자기의 느낌과 주장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쌍방이 주고받은, 그래서 수정과 덧붙임이 가능한 담론이었다. 그것이 원맨쇼가 아닌 토크쇼였다는 점은 우선 골계의 내용에 드러나 있다.

골계의 상당수는 어느 사랑방에서 벌어진 토론의 종합 또는 꽤 널리 알려진 소문에 대한 의견의 취합으로 간주할 수 있다. 반드시 그렇지 않더라도 양반들 공동의 관심사, 무거운 고민, 쓴 경험과 성공담이 골계라는 이름으로 가볍게 포장된 것으로 보인다.

어느 경우든 양반의 성 담론은 반드시 깃털처럼 가벼운 언사로 정리돼야 했다. 번득이는 재치와 너스레라야 했다. 이것은 공자?맹자의 진중한 말씀도, 예학도 이학도 아닌 내용이어서 심각함을 드러냈다가는 도리어 외면당하거나 패가망신하기 십상이었다.

강희맹?서거정 같은 큰 학자들이 어찌 그만한 지혜가 없었겠는가? 그들은 무거운 이야기, 심각한 고민, 절절한 인생사일수록 가볍게, 그야말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흘릴 줄 알았다. 행여 누가 꼬투리를 잡으려고 해도 그것은 그저 심심풀이 붓방아였다고 변명할 만한 건더기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닌게아니라 표연말 같은 정통파 성리학자는 골계를 썼다는 이유로 서거정을 비난했다. 하지만 그 일로 서거정의 명예가 실추되지는 않았다. 그만큼 그의 골계는 문체상으로 완벽했다. 차마 공론화하기 어려운 성 담론을 어렵게 꺼내면서 양반들은 가볍고 익살스러운 글쓰기 전략을 추구했다. 이제 그 전략을 역으로 치고 들어가 담론의 실체를 밝힐 때다.

전라도 어느 곳에 경진사라는 양반이 있었다. 마침 그의 딸이 나이가 꽉 차 이웃 고을 임생원 아들을 신랑감으로 맞이해 예정된 날짜에 화촉을 밝혔다. 그런데 신랑에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하필 배꼽 아래 종기가 생겨 그 중요한 일을 전혀 치르지 못하고 신부집에서 허송세월한 뒤 하릴없이 부모님께로 돌아갔다.

16세기 중반에 쓰인 이 이야기는 대강 그렇게 시작된다. 만일 당신의 딸이 첫날밤을 치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딸을 불러 첫날밤 경험을 직접 물을 것인가? 또는 당신의 아내에게 묻게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딸의 눈치만 볼 것인가? 또는 신랑에게 대놓고 물어볼 것인가?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질 때 골계는 비로소 담론으로 이해되기 시작할 것이다.

경진사의 결정은 당신의 예상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는 딸을 불러 직접 질문을 던졌다.


“임서방이 그 일을 알더냐?”


조선의 양반이 딸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아버지가 그런 질문을 절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조선 후기에도 경진사의 그런 질문은 삭제되지 않은 채 계속 필사됐고 많은 양반에게 읽혔다는 점이 중요하다. 골계는 반드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할 필요가 없다.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더라도 ‘실은 우리도 그렇게 하고 싶은 심정’이라는 동의를 끌어낼 수 있을 때 담론은 더욱 성공적이다.

 

좀더 부풀려 말하면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중요한 논의가 골계의 탈을 쓰고 등장할 때 청자나 독자는 그것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딸은 울면서 아무런 말도 못했다. 그러자 경진사는 걱정이 돼 다음 수순을 밟는다. 이미 결혼한 지 오래여서 알 것을 다 아는 큰딸을 불러 사정을 알아보라고 명령한 것이다.


큰딸로부터 답이 왔다. 작은딸이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망쳤어. 신랑은 사내 구실을 못하는 병신이야!”


혼전 성경험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은딸은 신랑과의 동침이 성적 쾌락을 가져다줄 것으로 은근히 기대했던 것 같다. 그 기대가 수포로 돌아가자 신랑에게 그 까닭을 물을 수도 없어 신부는 무조건 부모를 원망했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혼처를 정해 버렸기 때문에 부모야말로 이 사태에 책임이 있다고 봤던 것이다. 사실 조선사회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결혼식을 올리는 당일까지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혼인은 양가의 부모, 특히 아버지들의 의사대로 결정되었다. 이른바 ‘주혼(主婚)’이 결정할 일이었지 당사자가 나설 일은 아니었다.

첫날밤을 기대했던 경진사의 딸은 혹시 혼전 성경험이 있었을까? 그러나 양반집 규수가 어떻게 혼전 경험을 할 수 있었겠는가? 신라시대나 고려시대라면 혹 모를까, 조선시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상이다.

조선사회에서는 여성의 정절을 무척 중시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억지로 손목을 잡혔대서 그 손목을 자르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양반들은 자기네 딸들의 혼전 경험을 전혀 상상도 못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얼굴과 몸매가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다. 그의 나이 18세가 되자 부모는 서둘러 혼처를 정해 뒀다. 시집가기 전 어느 날 밤, 처녀는 무슨 급한 일이 있어 뒷집에 들렀다. 마침 그 집에는 총각이 있었는데, 그는 처녀를 보자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충고했다.

처녀에게 요본과 감창이 미흡하다 지적

 

▶남성은 서당 훈장에게 성교육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제 곧 시집가게 되었다지? 미리 꼭 배워야 할 일이 있지. 미리 배워두지 않으면 소박을 맞을 거야.”


‘소박’이라는 소리에 처녀는 그 일을 반드시 배우기로 했다. 처녀를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간 총각은 성교를 가르쳤다.

총각은 성행위에서 여성이 선사할 ‘6희’를 논했다. 총각은 이름만 총각이었을 뿐, 이미 성에 도통한 성 전도사였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 총각은 단 한 차례도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입을 빌려 양반들은 ‘6희’에 여성의 행불행이 달렸다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를 양반들이 수백 년 동안 주고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양반들이 자기네 역할을 이야기에 등장하는 교활한 총각으로 설정해 놓고 가상의 공간에서 순진한 처녀를 유혹해 마음껏 음행을 즐긴 것이다.

총각이 말한 6희는 남성의 입장에서 본 성적 만족의 조건이었다. 착(窄, 좁고)?온(溫, 따뜻하고)?치(齒, 꼭 물 것이며)?요본(搖本, 몸뚱이를 흔들다가)?감창(甘唱, 즐거운 비명을 지르다)?속필(速畢, 빨리 끝낼 것)이라고 했다. 총각은 처녀에게 요본과 감창이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처녀는 밤마다 총각을 만나 그 기술을 연마한다.

그러다 시집간 첫날밤, 신부는 요본에 감창까지 모든 능력을 발휘한다. 신랑은 신부가 처녀가 아님을 눈치챘고, 신부는 울며 친정으로 쫓겨 온다. 딸을 붙들고 어머니가 다그쳐 묻는다.

 

딸은 뒷집 총각 이야기를 실토한다. 어머니는 “이것아. 어째 그런 기술을 써먹었느냐”며 화를 낸다.

 

친정어머니를 빙자해 양반들은 자기네 속내를 토로한다. 신부는 만에 하나 성적 경험이 있을지라도 아닌 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성교육이 없지 않았다. 그 핵심은 성적 만족을 얻는 방법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아들만이 가문을 빛낼 수 있고 부모의 노후를 보장했기 때문에 결혼 적령기의 딸들은 어머니에게서 귀숙일(아들 잉태하는 날)을 배웠다.

일례로 봄에는 갑(甲)과 을(乙)이 든 날을 귀숙일이라고 가르쳤다. 그래도 안심이 안 돼 귀숙일을 적은 달력을 시집가는 딸의 손에 몰래 쥐여주는 친정어머니도 많았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내용은 임신 최적기?판단하는 방법이었다. 월경이 끝날 무렵 무명조각을 여성의 성기에 부착해 뒀다 그 빛깔이 금색이면 씨를 내릴 최상의 시기로 봤다.

그때부터 나흘 안에 교합하는데, 홀수 날 씨가 내리면 아들, 짝수 날은 딸이라고 점쳤다. 득남에 관한 이런 상식은 남성들도 모두 배웠다. 남성은 서당에서 <논어>를 뗄 무렵 훈장에게 성생활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습득했다.

보정(保精)이라는 이름으로 건강을 지키면서 아들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집안에서도 장가가기 직전 어른들로부터 ‘상투 탈막이’라는 글을 배웠다. 역시 정력을 유지하며 똑똑하고 힘찬 사내아이를 얻기 위한 비법이 요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혼전에 남성을 알았던 여성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양반들은 상당한 혐의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양반의 부녀를 성적으로 의심하는 듯한 말을 직접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이겠지만 양반들은 자기네 체면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여성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스님을 화자로 설정해 놓고 부정한 여성들의 고백을 받아내는 방식이었다.

어느 절에 음흉한 스님이 있었다. 그는 아랫마을 사는 박씨·김씨·이씨와 아주 친했다. 언젠가 한번은 두부를 만들어 세 집 부인들더러 가져가라고 했다. 절에 온 부인들에게 스님은 말한다.


“절의 음식을 가져가려면 먼저 부처님 앞에 나아가 잘못을 고백해야지, 아니면 큰 벌을 받습니다.”

스님을 화자로 등장시킨 이유?

부인들은 계속 망설였다. 그러자 스님의 명으로 불상 뒤에 미리 숨어 있던 사미승이 부처님 흉내를 낸다.


“너희가 간음한 사실을 다 알고 있다. 어서 사실대로 말하라.”

부인들은 사시나무 떨듯 했다. 박씨의 아내가 고백한다.


“저는 시집오기 전 집에 드나들던 총각과 숲에 가서 정을 통했어요.”

김씨의 아내가 말을 잇는다.


“한 동네 사는 남자가 첫날밤을 보내는 예법을 가르쳐주겠다고 저를 유혹했어요. 그러다 아이까지 갖게 되었어요. 아이를 부모님이 파묻으시고 김씨에게 저를 시집보냈어요.”

조선시대 남성들은 규방에 갇혀 지내던 처녀를 만날 길이 거의 없었다. 생각다 못해 그들을 만날 기회를 찾아낸 것이 심부름이고, 말을 붙인다는 것이 예법의 강습이었다. 예외적인 경우에만 가능했을 일탈인 셈이다.

양반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낯모를 처녀와의 성적 만남을 상상하고 즐거워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네 딸들에게 음심을 품을지도 모르는 친척과 친구들을 경계했을 것이다. 끝으로, 이씨 아내도 자백한다.

“저희 집에는 남편 친구 한 사람이 자주 오는데, 그와 눈이 맞아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어요. 남편은 전혀 모르지만 이게 어디 제 잘못인가요?”


갈수록 태산이다. 갓 쓴 양반들의 심사를 알 만도 하다. 친구 집에 갔다 그 아내가 예쁘면 음심을 품기 일쑤, 제 아내에 대해서도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부처님은 과연 자비로우시다.

“죄를 솔직히 고백한 그대들을 모두 용서하노라.”

 

사미승이 낸 소리였다. 스님은 곧 불상 앞에 꿇어앉아 부처의 영험함을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남편들에게 고백할 때라고 말했다. 부인들은 애원했다. 제발 그 말만은…. 스님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며 부인들을 골방으로 안내하여 차례로 즐기더니 많은 시주를 약속받았다.

스님은 누구인가? 따지고 보면 이야기에 참여한 양반들 자신이다. 스님이 이런 이야기를 직접 들려줬을 턱이 없고, 양반의 부인들이 그런 과거사를 스님 앞에서 고백했을 리도 없다. 양반들이 멋대로 그렇게 짐작한 것이다.

이야기에 개연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여성의 정조를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는 양반들의 담론일 뿐이다. 여성은 바로 그처럼 과장된 감시 속에 처해 있어 때로는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은장도를 뽑아 자해했던 것은 아닐지.

 

 

아들의 혼전 경험은 무죄

 

사진: 단원 김홍도<운우도첩>

 

양반들을 대표해 오늘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경진사는 숨김의 미덕을 잘 알았을 법하다. 설사 딸의 혼전 성경험이나 혼전 임신 같은 일이 있었더라도 알아서 뭉갤 만한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

목하 그의 당면과제는 새신랑 임서방이 과연 성불능이냐 하는 문제였다. 경진사 부부는 거듭 대책을 숙의하던 끝에 바깥사돈 임생원에게 항의편지를 보낸다. 구실은 아주 유교적이다.

 

‘신랑이 사내구실을 못해 외손자 볼 희망이 없다. 그래서 원통하다’는 것이었다. 임생원도 기대 이상이다. 임생원은 즉각 반박성 편지를 보내온다.

‘사돈이 언제 우리 아들 양물을 봤다고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오? 요전날 다리 밑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우연히 봤소만 참 큽디다. 왼손으로 가리면 오른쪽이 남고, 오른손으로 가리면 왼쪽이 남습디다. 어디 그뿐이오. 우리 이웃 김호군네 막덕이란 계집종을 진즉 첩으로 둬 벌써 2남매를 낳았소. 내 아들놈이 고자라니, 섭섭하오. 장가가던 날 손이 들어서는 쪽으로 출행했기에 그런 거라오.’

조선시대 지배층의 일원인 임생원은 천연덕스럽게 아들의 혼전 경험을 떠벌린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사회에서 미혼 남성은 성적으로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동일 계층인 사족의 부녀와 접촉하는 것은 엄금되었으나 신분이 낮은 계층의 여성을 희롱하거나 취첩(取妾)하는 것은 관용되었다. 게다가 창기(娼妓)와 같은 특수여성이 있어 성적 욕망을 해소할 길이 열려 있었다.

서양에서도 남성의 성은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특히 18세기에는 그 정도가 심한 편이었다. 특이한 것은 미혼의 아들이 성적 욕망을 키우도록 어머니가 가르쳤다는 점이다.

 

어머니 또는 가까운 친지 가운데 교양 있는 여성들이 이제 갓 청년기에 접어든 남성을 성적으로 도발하기도 했다. 겉으로는 아이 취급을 하면서 실제로는 청년의 정욕을 자극했다.

그가 빤히 바라보는 앞에서 일부러 나체가 되어 여성의 가장 은밀한 부위를 보고 즐기게 했다. 그런 방식으로 여성의 몸에 익숙하게 만든 다음, 청년이 마음에 들어 할 만한 하녀를 소개해 성욕을 해소하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갓 쓴 양반들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경진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내에게 편지의 내용을 알렸다. 아내는 더욱 현실적이었고 매우 신중했다.


“아무 증거도 없이 사돈의 말을 어떻게 믿는다는 말이오? 바깥사돈은 분명히 아들 체면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노부부는 수심에 잠겼다. 그때 맏사위 우서방이 등장한다.


“이거 큰일났네. 둘째사위 임서방이 아무래도 고자가 분명해!”

며칠 뒤 새신랑 임서방이 다시 처가에 들렀다. 우서방은 임서방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때려눕힌 다음 양물을 손수 점검한다.

“장인, 장모님! 신부는 복이 터졌습니다. 임서방 물건이 참 큽니다!”


큰 동서가 작은 동서의 양물을 직접 검사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는 갓 결혼한 작은딸의 성적 만족이 그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 또는 경진사 일가 전체의 행불행을 좌우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명분이 있었기에 친정부모, 시집간 언니, 형부, 바깥사돈까지 모두 동원돼 그 문제를 푸는 데 골몰한다.

밤이 되었다. 경진사는 신방에 불을 밝힌 다음 신랑 신부를 들여보내고 몰래 뒤꼍으로 가서 창문에 구멍을 뚫어놓고 밤이 깊기를 기다렸다. 그새 임서방의 종기는 다 나았다. 아버지 임생원의 꾸중도 적지 않았다. 방사(房事)는 강하다 못해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그날은 둘째딸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상 첫날밤이어야 했다. 그런데도 벌써 무아지경이라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10대 후반의 과감한 신부

 

어쨌거나 경진사는 허겁지겁 안방으로 뛰어든다.


“여보, 마누라! 신랑이 그 일을 해, 참 잘해! 시렁 위에 얹은 고리짝을 내려오오. 얼른 홍시를 갖다줘야지.”

이야기 속에서 임서방이 종기를 이유로 성교를 피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음직도 하다. 조선시대의 건강서적인 <수양총서>에 보면 종기가 다 아물지 않았을 때는 성적 교접이 금지되어 있다. 혈기가 흐트러져 종기가 터진다고 봤?것이다. 이처럼 건강상의 이유로, 남녀간의 성생활에는 금기가 많았다.

성적 경험이 없는 남녀에게 첫날밤이란 실은 매우 초조한 시간 또는 악몽일 수 있다.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무아지경까지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양반들이 생각하는 첫날밤은 매우 달콤한 것이었다. 첫날밤 신부가 오르가슴을 느꼈다는 것은 물론 지어낸 이야기다.

양반들은 이미 성경험이 많은 중년 남성의 시각에서 첫날밤의 특별한 장면을 연출하고, 함께 즐겼던 셈이다. 양반들은 첫날밤 신부가 얼마나 긴장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테지만, 굳이 완벽한 결합이 가능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필자는 이것을 현실에 구애받지 않고 사랑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양반들의 열망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양반들도 알고 있었다. 첫날밤이 반드시 달콤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그렇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나? 양반들이 보기에는 신랑의 책임이었다.

머리가 좀 부족한 총각이 장가를 가게 됐다. 첫날밤 칠흑같이 어두운 방에서 신랑은 신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멍청한 그는 가슴을 등으로 알고 두 젖가슴을 혹으로 생각해 놀랐다. 엉덩이 밑을 손끝으로 탐색하던 신랑은 구멍을 찾지 못했다. 신랑은 화가 나서 신방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신부 집에서 어떻게 된 일인지를 딸에게 물었다. 신부는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우습구나, 어리석은 낭군 도망친 꼴 / 참 맛은 당연히 앞쪽에서 구하련만 / 헛되이 잔등만 더듬다 땀만 흘렸네.’


신부 집에서는 그 시를 신랑의 아버지에게 보냈다. 이것은 꼭 경진사가 바깥사돈 임생원에게 편지를 보낸 꼴이다. 양반들의 문제 해결 방식이 통상 그랬다는 이야기. 그 다음도 역시 비슷하다.

방금 예로 든 경우와 달리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신랑이 너무 어리면 그렇다. 양반들은 조혼이 가지고 있는 이런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조혼 풍습이 시작된 것은 원나라가 해마다 많은 공녀를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만, 20세기 초반까지도 관행으로 존재했다.

1911년 국세조사를 보면 결혼한 남녀 각 1,000명 가운데 15세 미만에 결혼한 이가 남자는 217명, 여자는 638명이었다. 나의 짐작과 달리 조혼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욱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어떤 양반이 열 살이 좀 넘은 어린 아들을 장가보냈다. 신부는 그보다 대여섯 살 더 먹었다.

 

신랑이 본가로 오는 날, 신부를 태운 가마가 안마당으로 들어왔다. 어린 신랑이 기겁해 소리를 질렀다.


“저 여자가 왜 우리 집에 왔어? 지난번 저 여자 집에서 잘 때 내게 팔베개를 해주고 두 다리로 나를 막 끌어안더라. 그것을 밤새 주무르고 내 배 위로 올라와 씩씩거렸다고. 그런데 왜 우리 집에 왔어? 날 또 못살게 굴려고 온 거지? 난 싫어!”

 

10대 후반인 신부가 정말 그렇게 과감하게 나왔을까? 그랬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양반들의 뇌리에는 그런 상상이 존재했다. 새색시는 성에 관한 지식이 있고 성욕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꼬마 신랑은 그런 이해에 도달할 날이 아직 멀었다.

여성 행복의 근원은 성적 쾌락?

이 이야기는 혹시 양반들이 조혼에서 얻은 경험담일 수 있다. 자기보다 몇 살 더 먹은 신부에게서 느낀 일종의 공포감 또는 남편 구실을 해야 한다고 느꼈을 때의 중압감을 다소 과장되게 반영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또는 그보다 원초적인 두려움의 표현일 수 있다. 여성의 행복은 다른 무엇보다 성적 만족에 있다는 남성들의 믿음 말이다. 양반들에게 여성은 다른 무엇이기에 앞서 성적 존재로 비쳐졌다는 뜻 아닐까?

 

인격·재능·학식, 이른바 고상한 정신적·도덕적 역할은 남성의 몫이고, 성적 만족 같은 육체적이고 저열한 역할은 여성의 몫이라는 편견은 사실 여러 문명권에 존재했다.

아마도 그런 양반들의 믿음이 이런 이야기를 낳지 않았을까? 옛날에 어떤 노처녀가 있었다. 노처녀는 다시 중매가 들어오면 무조건 시집을 가기로 작정했다. 조선사회는 노처녀 문제를 국가적 과제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30세 이상 된 성년 남녀가 결혼하지 못하면 자연의 음양이 조화를 잃어 큰 재난이 초래된다고 믿었다. 가뭄·홍수·돌림병의 원인은 노총각과 노처녀의 원한이 하늘에 닿은 것으로 간주했다. 성종 때는 25세 이상 노처녀를 조사해 결혼비용으로 쌀과 콩을 지급했다.

하루는 문제의 노처녀에게 중매쟁이가 찾아왔다.


“들어 보구려. 한 총각은 문장이 대단한 선비라오. 그 다음 총각은 씩씩한 무인이라오.”

처녀의 낯빛이 별로 밝지 않았다. 중매쟁이가 말을 잇는다.


“다음 총각은 부잣집 아들이라오. 맨 마지막은 정력 하나는 대단한 청년이오.”

처녀는 한참 생각하다 노래를 불렀다.


“공부 많이 해 문장 잘 짓는 선비야 뜻만 넓어 아내 고생시킬 게고… 누가 뭐래도 돌 담은 주머니 머리 위까지 돌리는 억센 총각이 내 마음에 꼭 드오.”

여성이라고 해서 성적 쾌락에 무심할 턱도 없지만, 모든 여성이 쾌락제일주의자일 리도 없다. 그럼에도 양반들은 그들의 담론에서 여성의 성적 관심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경진사의 작은딸, 박씨·김씨·이씨의 아내, 우물가에서 첫날밤을 고백한 신부, 그리고 노처녀의 경우도 그러했다. 이것을 인간의 성적 본능에 대한 양반들의 이해라고 보면 참으로 인정 넘치는 따뜻한 인간관이라고 해야 옳다.

그러나 그것이 만일 여성의 성적 방종에 대한 양반들의 두려움·경계·의심의 표현이었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성적 편견 내지 여성의 성에 대한 탄압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조선의 양반들은 인간적 이해와 성적 편견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그들의 성 담론을 지속했다고 보면 어떨까? 좀더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필자 백승종은...
독일 튀빙겐대학교대학원 한국학 박사.
서강대 교수를 역임하다 자유로운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스스로 물러나
현재 푸른역사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다.

저서로 <그 나라의 역사와 말>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가 있으며 <서울신문>에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이라는 칼럼을 연재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