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은행나무에 관한 시모음 본문
은행나무 아래서 / 김해화
비 개이더니
은행잎 새로 돋습니다
시절 좋아진다는데
오늘도 흐지부지한 인력시장
우리는 맨날 요 모양이냐고
몇 사람 갈곳 없어
되돌아와 은행나무에 등 기댑니다
지난가을 은행잎 쏟아지고
내 모가지 떨어졌습니다
수북히 쌓인 은행잎
서둘러 쓸어 치운 나라
한뎃잠으로 뒹굴던 모가지들도
깨끗하게 치워졌습니다
좋은 시절 은행잎 새로 돋습니다
내 모가지 떨어진 자리
누군가 새로 모가지 달겠습니다
은행나무 / 곽재구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맑은 바람결에 너는 짐짓
네 빛나는 눈썹 두어 개를 떨구기도 하고
누군가 깊게 사랑해 온 사람들을 위해
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
신비로워라 잎사귀마다 적힌
누군가의 옛추억들 읽어 가고 있노라면
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마저 금빛 추억의 물이 들게 한다
아무도 이 거리에서 다시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
벗은 가지 위 위태하게 곡예를 하는 도롱이집 몇 개
때로는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가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가지 끝에 걸고
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선다 해도
수천만 황인족의 얼굴 같은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희망 또한 불타는 형상으로 우리 가슴에 적힐 것이다.
은행나무 사랑 / 김금용
물밑 혼돈이 짙어질수록 황금빛으로
깊게 타오르는 당신을 바라봅니다
말을 아끼는 당신의 시선과
담 너머 마주 보고 선 또 하나
반 쪽 사랑을 향해
제 안에서 닳아진 엽록소 푸른 멍으로
명치 아래 숨겨둔 고통의 핵 하나
밤새도록 끌어올리는 당신의 노동을
오래도록 멈춰 서서 지켜봅니다
차갑게 굳어 가는 어둠의 중심, 그 한가운데
아직 촛불 한 가닥 남아
손사래 치며 사라지는 계절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기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밤길 밝혀주는 별이 된다는 것을,
몇 점 희망 간직하는 사람들
꿈속으로 불 밝히며 스며든다는 것을,
비어가는 늦가을 숲에 여전히 자리 지키고 선
당신의 숨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까무룩하게 기울어져가는 11월의 소리를,
은행나무에 관한 추억 / 이성목
그의 집 창가에 은행나무 한 그루 서있었는데
가지 하나가 담을 넘어서고 있었는데
마치 그건 긴 고양이 울음 같았는데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돼
나무가 잎을 피워내는 동안 우리도
무엇에 자꾸 부풀어가고 있었는데
전율이란 그런 것이었지
허공과 허공, 허공에, 나무가
잎을 건네며 무엇을 말하려하는 동안 우리도
무엇을 자꾸 말하고 있었는데
은행나무 안에는 짐승이 살고 있어서
뿌리가 뿌리를 흙투성이로 덮치는 순간 열매를 맺는다는
그런 말, 입에 구린내를 풍기며 했을 것인데
그는 누구였을까 은행나무 가지에 익다 만
울음소리 주렁주렁 맺혔다가 떨어지던, 그런
황망히 바라보던, 그런
왈칵 쏟아지던,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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