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유교적으로 늙어가는 악마에게 1 본문
"주의하라, 악마는 늙었다. 때문에 악마를 이해하려면 너도 늙지 않으면 안된다"
- 막스 베버
서너 달에 한 번 정도 헌책방에 들러 책꽂이를 주욱 훑어본 뒤 한 20여 권 내외의 책들을 구입하곤 합니다. 월요일 무렵 오후에 시간이 나서 근무 시간에 잠시 서점에 들러 스무 권 정도의 책을 구입했는데, 그 중 하나가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이었습니다.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학문의 길을 걸어보겠단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는데, 막스 베버의 저 문장은 마치 화살처럼 가슴에 와서 박히더군요.
막스 베버의 책은 어렸을 때부터 읽어봐야지, 한 번은 거쳐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만 하면서도 거의 읽어 본 적이 없다가 최근에서야 읽고 있습니다. 맑스와 막스.... 그러고 보면 어떤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읽었으리라 추측하는 책을 이제야 읽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기도 합니다. 질문 중에 가장 어려운 질문들은 대개 "어떻게"가 아니라 "왜"라고 시작됩니다.
어떻게가 방법론이라면, 왜는 목적론에 해당한다고 해야겠지요. 그래서 시인은 왜 사냐건? 웃지요. 라고 이야기하는 걸겝니다. 건방진 이야기가 되겠으나 저는 전업 작가들을 별로 존경하지 않습니다. 글쓰기의 삶, 문학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매우 비루한 것이란 생각을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의 생각이었음을 전제로 하여 말하자면 "노동하지 않는 손으로 쓰여지는 글이란 것이 세상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하는 다소 과격한 생각을 품었더랬죠.
그러나 형이상학이란 것, 이데올로기란 것이 권력으로서 물리적 실체를 가진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하면서 아마도 제 생애의 첫 형이상학적 고민이란 것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지식인 혹은 먹물 혐오증은 여전합니다. 우스운 건 제가 작년이던가, 올해초 어떤 이들에게 "너도 지식인이면서"란 말을 들었다는 겁니다. 들켜버린걸까요. 지식인에 대한 혐오는 기대를 반영하고 있는 거겠죠.
저는 종종 제가 무협지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산림에 묻힌 절대고수를 찾아 스승으로 모시고, 청소 3년, 밥짓기 3년, 빨래 3년을 거쳐야 비로소 무공 초식들을 알려주기 시작하는.... 아마도 그건 절대적 믿음의 대상을 찾고 싶다는 주술에 가까운 바람이었는지도 모르죠. 하여간 형이상학을 눈 아래로 깔아보는 시선은 사라졌음에도 버릇은 남아서 여전히 그런 책을 뒤적이고 있는 제 손을 보노라면 웃음이 나곤 합니다. 한때 저도 망치든 손이었는데, 이제 펜대나 굴리고, 키보드 터치감을 따질 만큼 쁘띠가 된 거겠죠.
막스 베버의 책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19년 뮌헨 대학에서 행한 강연 원고를 엮은 것입니다. 강연이란 것이 늘 그렇지만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다보니, 그리고 베버 자신도 원숙해졌다고 해야할까. 다른 책을 읽는 것보다는 확실히 쉬운 편이긴 하죠. 나중에 차차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좋겠지만... 사상가로서 제 첫 사랑은 마르크스였고, 여전히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예전같지 않다는 걸 발견하면서 스스로 흠칫흠칫 놀라곤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하는 말은 일종의 전향서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동안 참으로 오만하고, 완고하였으며 나 자신이 하나의 시선만을 온전히 유지하고자 버려둔 것들이 많았구나 하는 깨우침이라고 해두죠. 베버는 학문이 세계의 합리화 과정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했습니다. 베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분들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제게 있어 베버는 매우 비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학문적이든, 사상적이든 유토피아를 상정하는 일은 행복하고 매력적인 일이긴 합니다. 자신이 오를 고지를 알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라고 해두죠. 게다가 그는 종교사회학자이기도 했기 때문이겠지만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학문의 중심에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합리화 과정이란 주술적 세계의 해체에서 비롯되는 것... 그렇기에 과거엔 하나로 통합되어 있던 진선미(眞善美)가 각기 다른 것으로 분화됩니다. 즉, 아름다운 것은 참, 선한 것은 참, 참은 아름답고 선한 것이었던 시대. 아마도 그것이 서구인들이 그토록 찬미해 마지 않던, 동양으로 치자면 요순시대에 갈음하는 고전주의 시대를 뜻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제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 거짓일 수도 있고, 선한 것이 거짓일 수도 있고, 진리가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고, 진리가 선한 것이 아닐 수도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불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말법의 시대를, 기독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말세를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문학을 꿈꾸었을 때, 제 가장 큰 고민은 세상이 뭔지 모르는데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품었더랬습니다. 선생님은 제게 절망이 진실하다면 거짓 희망을 전하는 것보다 진실한 절망을 전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가르치셨더랬는데, 그 말에 일말의 희망을 품었으나 제 절망은 과연 진실한가 묻노라니 그도 어렵더군요. 인간이 느끼는 감정 중 가장 깊은 것이 슬픔이라고 하더군요. 과연 나의 슬픔은 진실한가. 그렇게 묻고 나니 더이상 할 말이 없더이다.
학문을 하기엔 자의식이 너무 졸렬하고, 문학을 하기엔 뻔뻔함이 부족(그런 점에서 저는 백남준을 존경합니다. 예술은 사기라고 했던)한, 아니면 광기 혹은 결핍이 부족한 탓에 이도저도 못되고 있는 건 아닌지... 길에 들어섰는데, 늘 헤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전업작가와 지식인들을 멸시하는 버릇이 여전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믿는 건 오로지 그 싸가지없음뿐이니까요. 작년이던가, 제작년부턴가... 제 스스로 늙기로 결심하였으나 늙는 것도 쉽지 않네요.
<2005/11/03>
출처,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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