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우리는 사랑일까 / 알랭 드 보통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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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알랭 드 보통 1

휘수 Hwisu 2007. 8. 30. 13:13

우리는 사랑일까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지음 /공경희 역  은행나무  2006-01-03
 

세탁 주기


그녀는 이유를 분석할 수 없었지만, 에릭의 집 어두운 부엌에 앉아 있노라니 불현듯 극적으로 자신감이 사라져버렸다. 몇 분 전만 해도 어른의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고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이제 모든 게 급속도로 해체되어 자책감과 혐오만 남았다. 그녀의 자신감은 늘 확인을 받아야만 자라는, 불안전한 구조였다―원하는 걸 얻거나, 누군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 자신과 타인에 대한 믿음을 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바람이 빠지는 타이어와 같아서 늘 다시 채워줘야 했고, 그게 불가능해지면 이전의 낙관이 오만한 허위로 보는 상태로 급속히 빠져들었다. 이런 일, 비, 그녀의 진정한 처지, 그녀에게 임한 신의 손길. 그걸 함부로 굴리는 게 아니었는데.


 "저녁으로 피자를 주문할까요?" 에릭이 옆방에서 소리쳤다.
"음식을 만들거나 외출하기는 건 성가신데."
그 남자는 소파에 누워서, 한쪽 손을 바지에 넣고 긁적거렸다.
"꼭 그러야 해요?" "그러다니 뭘요?" "그거요."
"가려운데 긁으면 안 되나요?" "시원하시겠네요."
"아니면 중국 음식을 먹고 싶어요? 물론 카레도 먹을 수 있어요. 어떡할래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겠지만, 그녀는 문득 에릭에게 "나 좀 안아줘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피자나 카레, 국수는 그만두고 [매우 이성적이지  않지만] '슬퍼서'라거나 하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 없이 그냥 울고 싶었다. 허약해진 기분이 엄습해서, 세상의 요구에 적절한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무너질 수 있는 공간을 바랐다. 다시 마음을 수습할 때까지 누군가의 품에 조용히 안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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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체계

 

 그날 밤 앨리스의 이상형 애인이 그녀의 낭만적 열망을 그대로 투영하지는 않음을 알리는 첫 번째 신호가 나타났다. 그렇다고 환상을 품을 가치가 없는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투사하는 영상과는 달랐다.
  그런데 앨리스와 에릭이 함께 보내는 시간에 불협화음에서 비롯되는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면, 이런 갈등의 핵심은 무엇인가?
  평면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서 사람들 사이의 불균형을 읽으려면, 부수적인 세부 사항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성격을 찬찬히 살펴봐야 할 터이다.
  세세한 부분은 놀랍도록 일관된, 혹은 모순된 가치 체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으니까.

 

 1. 실내 장식

 

  랠리스를 만나기 한 달 전, 에릭은 건축가에게 의뢰해서 아파트를 일본풍 미니멀리즘 스타일로 개조했다. ...

  에릭이 동양에 대해 말할 때 늘 입에 올리는 단어가 가벼움, 질서, 정연함, 깔끔함, 여백들이었다....

"세상은 너무나 번잡하고 복잡해요. 내가 동양의 미학을 좋아하는 것은 그 여백, 그리고 일종의 합리성 때문 같아요. 어지러운 사무실에서 집에 돌아오면 오아시스에 있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아파트를 그렇게 꾸몄어요.

  실내 장식에 대한 에릭의 관심은 아주 작은 소품까지 미쳤다....
  부속품화를 추구하는 이 욕망[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해서]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온전히 장악하고 제어하고 싶은 것이리라....


...가구를 배열한 방식은 집주인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이나 행동을 보고 듣지 않아도 그 성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어린이를 치료하면서, 언어를 완전히 익히지 못한 아이들에게 '언어 치료'를 해야 하는 문제에 부딪혔다. 클라인, 안나 프로이트, 위니캇 같은 이론가들은 어린이들이 언어 외의 수단을 통해 내면 세계를 표현할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이들은 주로 장난감이나 다른 사물을 이용해서 마음을 나타냈다....

  그 남자는 삶을 기능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인생도 아파트처럼 잘 배열되기를 바랐다―사교, 생활, 재정 문제, 연애와 섹스가 모두 조화롭고 합리적이기를 원했다.


  그 남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잘 정돈된 상태인 것 같지만, 사실 남보다도 더 무질서를 두려워하고 의식한다고 볼 수 있었다. 정신 없는 사무실 분위기에 익숙한 사람치고 거미집, 빨랫감이 든 바구니 따위에 지나치게 민감했다. 앨리스가 그 남자의 집 바닥에 신문을 버려두면, 그 남자는 발끈해서 사납게 핀잔을 놓았다. ...

 

  에릭은  부르조아의 체통 속에 씁쓸한 균열을 감춘 가정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변호사였지만, 어린 에릭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불명예스럽게 해고당했다. 아버지는 연달아 사업을 벌여 잇따라 망했고, 아일랜드에 땅을 사는 바람에 집안을 빚구덩이에 빠뜨렸다. 어머니는 엄격하지만 자제심이 강하고 재주가 비상한 여성으로 집안의 모양새를 유지하려고 애썼고, 친정에서 물려받은 얼마 안 되는 유산으로 아들들을 사립 기숙학교에 보냈다. 에릭의 아버지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폭력을 휘두르곤 했지만, 어머니는 노팅힐 거리의 점잖은 이웃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아들들에게도 그 사실을 숨겼다.


  에릭은  불확실한 장소, 사람, 직업을 최대한 자신의 뜻대로 제어하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안정과 특권이 따르는 작업이라는 데 끌려서 의사가 되었지만, 급료체계에 안달이 났다. 오랜 재정 파탄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은행계에 들어갔고, 결국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도박사요 위험을 무릅쓰는 기질이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인생의 중요한 요소들이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상황에서만 덤벼들었다.


  앨리스의 침실은 크기만 빼면 간소한 데가 전혀 없었다. 별별 물건이 빼곡히 들어찼고, 울긋불긋 촌스러운 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


서랍에는 지난 몇 년간 받은 우편물과 지난 5년간 생각을 쏟아 부은 일기장 15권이 들어 있었다. 맞은 편 벽에 놓인 위풍당당한 옷장은 패션의 변천을 증명하는 옷들로 꽉 찼다.
  에릭은 여기서 처음 잔 날 쓰레기장이라는 별명을 붙이고는, 정말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싫어해서 자주 그렇게 불렀다. 그 남자는 특히 앨리스의 침대 위에 놓인 쿠션들과 털북숭이 동물 인형들을 싫어했다. 그중에서도 '로마 사랑'이라고 쓰인 분홍색 하트 모양 털북숭이 쿠션을 제일 질색했다. 그 남자는 이 방에서 잘 때마다 그 쿠션을 맞은편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지거나, 앨리스의 손에 닿지 않는 책장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못됐어. 왜 내 쿠션을 가만두지 않는 거죠?"
이 특이한 장난이 되풀이되자, 앨리스가 한마디 했다.
"내가 지금까지 몬 것 중에서 가장 마음에 안 들고 훙하고 역겹고 끔찍한 물건이니까. 저런 놈이랑 한 침대에 있고 싶지 않아요."
"그럼 당신이 선택해야겠네요. 나하고 로마 쿠션을 선택할래요? 아님 혼자 있을래요?"
  앨리스도 그 쿠션이 매력적이라든가 어떤 심미적인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앨리스는 그것을 소중히 여겨서 10년 동안 간직해왔다. 그녀는 실내 장식에 대해 기능보다는 감정을 중요시했기에, 물건의 가치도 얼마나 제 기능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기억이 담겨 있느냐로 판단했다.


  하트 모양 쿠션은 부모가 이혼하기 전 마지막으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아버지에게서 받은 선물이었다. 그때의 이탈리아 여행을 앨리스는 정겨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더 좋은 소재로 비속하지 않게 만든, 훨씬 우아한 쿠션도 많이 있지만, 이 쿠션에는 특별한 내력과 애정이 담겨 있었다.여러 해 전의 마지막 가족 여행 때 맛본 특별한 행복감이 고스란히 깃든 물건이었다.   90

 

2. 감상주의

 

  최근 앨리스의 집에서 가까운 음식점에서 저녁 식사를 했는데, 에릭이 주된 요리로 토끼 고기를 먹으려 하는 바람에 입씨름이 벌어졌다.

 

  "이봐요, 앨리스, 토끼 피를 좀 보았다고 이렇게 흥분하는 이야기를 모르겠어요. 당신도 다른 사람처럼 고기를 먹잖아요. 유독 토끼만 가지고 그러는 건 오로지 토끼나 소나 양보다 귀엽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 당신이 쇠고기나 양고기를 씹으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건 본 적이 없어요. 윤리 의식이 대단하구먼! 다윈도 깨달았어야 하는데.  가장 예쁜 게 생존한다."


  에릭은 내내 이 문제를 가지고 앨리스를 놀렸고, 이튿날에도 태연히 물었다.
 "자, 채식가님, 오늘은 토끼집이나 지으러 나가실까요?" 앨리스가 위선적이라고는 해도[왜 토끼 걱정은 하면서 못난이 늙은 양 걱정은 안 할까?], 그녀의 감상적 태도에 에릭은 의심을 살 만큼 너무 끈덕지게 지분거렸다. 에릭이 감상적이지 않은 것은 논리적인  이유[양은 되는데 왜 토끼는 안 돼?]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잔한 상황이 그 남자의 내면을 흔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남자는 아픈 사람이나 무기력한 사람, 다리가 하나뿐인 장애인, 절룩이는 오리, 불행한 연인들, 우는 아이, 관절염을 앓는 할머니를 보고 눈물짓는 사람을 보면 거의 망설임없이 빈정거렸다. 그 남자의 그런 태도가 암시하는 것은, 그러한 존쟈들이 대표하는, 소름끼치는 허약함에 대해 그 남자가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허약함의 화신이기 때문에, 어린아이에 대한 앨리스와 에릭의 태도는 두드러지게 되었다......
  에릭은 아이들이 머뭇머뭇 웅얼거리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반면, 앨리스는 아이의 실수를 기꺼이 받아주고 아이들이 제대로 끝내지 못한 말도 알아 알아서 이해했다. 에릭은 여러 면에서 어른스러웠지만, 아이들이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완전무결함―을 타인에게 기대한다는 점에서는 이상하게 어린아이 같았다. 그 남자는 자기 능력으로 타인의 약점을 보완해주지 못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식을 잘못을 용서하는 부모와 같은 태도를 취할 줄 몰랐다.  93


4. 감정적인 벌거벗음

 

  감정적인 벌거벗음은 남에게 자신의 약함과 모자란 부분을 드러내는 데서 시작된다. 거기에 의존하면, 우리는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 외의 다른 방법으로 어떤 인상을 심어줄 능력을 빼앗기게 된다. 더는 거짓말하거나 허세 부리지 못하고, 뽐내거나 미사여구 뒤로 숨지 못한다―몽테뉴는 감정적으로 벌거벗게 되는, 죽음을 맞는 순간에는 단순한 프랑스어[자신의 모국어]로 말해야 한다고 했다.


  내 필요를 고백할 때는 감정적으로 벌거숭이가 된다--당신이 없으면 헤매게 될 거라고, 독립적인 사람처럼 보이려 애썼지만 꼭 그렇지도 않으며, 인생의 방향이나 의미도 모르는 형편없이 유약한 인간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내가 울면서 이야기할 때, 남들이 그 사실을 알면 끝장이지만, 나는 당신이 비밀을 지켜줄 거라고 믿는다. 파티에서 유혹적인 시선을 던지는 게임을 그만두고 내가 관심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나는 조심스럽게 빚어온, 단단한 허상을 벗어버린다. 나는 무방비 상태가 되어, 서커스 묘기에 나선 사람처럼 판에 묶인 채 상대를 벗어버린다. 그는 내 피부에 스칠 듯 비수를 던진다. 내가 자의로 그에게 내준 비수를. 나는 당신 앞에서 초라하고 자신을 믿지 못하고 동요하며 자신감을 잃고 자신을 증오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필요한 경우] 그 반대 모습이 되리란 걸 당신에게 설득할 수가 없다. 새벽 3시에 겁에 질린 얼굴을 당신에게 보일 때면 난 약한 사람이 된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뽐내던 허세도, 낙관적인 철학도 없이 존재 앞에서 불안하다. 나는 엄청난 모험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평소 자신감 넘치는 미인이 아니더라도, 당신이 내 두려움과 공포를 줄줄 꿰고 난 뒤에도, 당신은 날 사랑할 것인가.     97

 
5. 너그러움


  그 남자는 돈에 관한 한 인심이 후했다--반지는 결코 싸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남자의 처신은 감정적으로 너그럽지 않았다. 그것은 앨리스의 5파운드짜리 치즈에 대한 빚을 갚으려는 인색한 시도였다. 에릭이 더 큰 선물을 주려는 것은 선물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감사하는 위치에 서면 자율성을 잃고 간섭 받게 되는 것을 싫어해서이기도 했다.

  경제의 세계의 세계에서는 빚이 나쁜 것이지만, 우정과 사랑의 세계는 괴팍하게도 잘 관리한 빚에 의지한다. 재무 정책으로는 우수한 것이 사랑의 정책으로서는 나쁠 수가 있다―사랑이란 일부분은 빚을 지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뭔가를 빚지는 데 따른 불확실성을 견디고, 상대를 믿고 언제 어떻게 빚을 갚도록 명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는 일이다.
  에릭은 빚을 제때 갚긴 했지만, 앨리스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너무 급하게 빚을 갚고 그대로 잊어버리는 바람에, 그 남자는 그녀와 똑같은 감정의 성숙을 실현하지 못했다.  103


권력과 007

 

 권력이란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영향을 미치거나, 사람이나 사물에게 작용을 가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권력을 쥔 사람은 신기술 무기, 돈, 석유, 우월한 지성이나 튼튼한 근육을 소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물질적 사회적 환경에 영향을 미친다. 전쟁에서는 도시의 방어벽을 무너뜨리거나 비행장에 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쪽이 힘이 있다. 경제계에서는 주식을 사들여서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편이 힘이 있다. 권투에서는 주먹을 날려 상대방을 뻗게 하는 편이 더 힘이 있다. 하지만 사랑에서는 권력이 훨씬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정의에 의존하는 것 같다. 사랑에서는 권력이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능력으로 간주된다.


 에릭이 회의 후 만찬에 다녀온 다음 맞은 주말, 앨리스는 소파에 그와 나란히 누워, 에릭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당신이랑 이렇게 있으면 정말 편안해요."
 그도 비슷한 말로 대답했으리라고 예상하기 쉽지만, 그 남자는 호응하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
 "오늘 저녁 몇 시에 본드 영화를 하죠?"
 맞은 사람도 없고, 멍이나 비명도 없었지만, 권력의 균형이 에릭 쪽으로 확 쏠렸다. 저울에 올리면 앨리스는 힘이 약한 뜻을 전하는 가벼운 쪽이고, 에릭은 강력한 질문을 던지는 무거운 쪽이었다.

 

 균형이 잡히려면 에릭이 "나도 당신이랑 있으면 편안해요."라고 대답해야 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어쩌면 본드가 나오는 007 영화를 방영하는 시간이 정말로 신경 쓰여서], 앨리스는 패를 다 잃고 말았다.
 사랑의 권력은 아무것도 주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상대가 당신과 같이 있으면 정말 편안하다고 말해도, 대꾸도 없이 TV 프로그램으로 화제를 바꿀 수 있는 쪽에 힘이 있다. 다른 영역에서와는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사랑의 목표는 소통과 이해이기 때문에, 화제를 바꿔서 대화를 막거나 두 시간 후에나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이, 힘없고 더 의존적이고 바라는 게 많은 사람에게 힘 들이지 않고 권력을 행사한다.


 스탕달은, 애인 사이에서는 언제나 한쪽이 상대방을 더 사랑하며, 그래서 두 사람 관계의 권력이 인지되기 마련이라는 비관적인 견해를 밝혔다. 양쪽이 저울의 수평을 유지할 때에만, 한쪽이 "사랑해요."라고 말하면 상대도 자연스럽게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할 때에만, 권력의 존재를 잊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미세한 차이만 벌어져도 권력은 재등장 신호를 보낸다. "줄리엣,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요."라고 달콤하게 속삭이면, 상대가 "물론 알아요, 로미오. 나의 복덩이. 나도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죠……?"라고 대답하는 상황에 악의는 없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엄청난 불균형을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


 앨리스가 여섯 살이었을 때 옆집에 활발하고 장난기 많은 동갑내기 여자 아이가 살았다. 어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둘은 어느 토요일 오후, 흥미진진한 계획을 감행하기로 했다. 말하자면 길 건너편의 부잣집 정원에 뛰어들어, 바지를 내리고 혀를 내밀고는 다시 뛰어오는 일이었다. 많은 생각과 준비 끝에 약속한 시간이 되었고, 두 아이는 낮은 나무 울타리를 뛰어넘어, 잘 가꾸어진 잔디밭으로 들어갔다.


 앨리스는 바지를 내린 순간, 친구가 곁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아이는 정원의 맞은편으로 달아나서, 바지를 멀쩡히 입은 채, 가여운 앨리스를 보며 키득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앨리스는 모르는 사람의 정원 가운데서 혼자 바지를 내리고 서 있었다. 그 집 주인 부부는 현관에서 마티니를 마시다가 앨리스를 보고 당황했고.


  이 이야기가 앨리스의 연애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녀는 소파에서 에릭 옆에 누워 [그 남자는 유명한 스파이의 모험담을 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어린 여자 아이가 된 기분을 느꼈다. 노출된 장소, 곧 이웃집 정원/욕망의 연약한 대지로, 냅다 뛰어가서 바지를 내렸는데/애인과 있는 게 편하다고 말했는데, 결국 여섯 살짜리/애인은 같이 위헌한 장난/투자에 끼어들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끼리 예절을 지키는 수준을 넘어선 관계라면, 누군가 이웃집 정원으로 들어가서 거기 있는 위험을 끌어안아야 한다. 용기를 내어 "커피 마시러 올래요?"라거나 "혹시 그 영화 봤어요?"라고 물어야 한다. 누군가 헛기침을 하고는 "당신과 함께 있는 게 좋아요." "우리 결혼할까요?"라고 말해야 한다. 자신의 말을 권력의 저울에 올려놓고, 두려워하면서 상대방이 똑같은 무게로 다가오기를 바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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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블,인드라의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