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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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시인 탐구

휘수 Hwisu 2007. 1. 16. 17:45
오탁번 시인 탐구

오탁번은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시력 37년을 맞이하게 된 이 즈음까지 『아침의 예언』, 『너무 많은 것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 『겨울강』, 『1m의 사랑』, 『벙어리장갑』 등 6권의 시집을 상재하였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소설과 평론 및 문학 연구 등의 분야에서도 활약하여 여러 권의 작품집과 평론집 및 이론서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초기시에서 최근 작품까지 세련된 이미지스트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아 온 그의 시는 민족 고유어와 겨레의 원형적 정신 세계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보여주기도 함으로써 한국현대 시사에서 실험과 전통의 변증법적 가능성을 입증하여 주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농익은 서정성은 전통을 수용한 결과로만 간주할 수 없는 현대적 품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의 시는 예리하게 빛나는 이미지 구사를 시작 방법의 중심 축으로 삼으면서도 모국어의 의미와 율격과 그에 걸맞는 토속적인 세계를 존중하였다. 그 동안 토속성 짙은 시어와 소재를 찾아 갈고 닦으면서도 현대시의 근간인 이미지와 상징의 깊이를 그 안에 내장해 갔던 끈질긴 장인 정신은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러한 그를 전통 지향적인 시인이라거나 또는 모던한 이미지스트 시인이라거나 하는 식의 분류법으로 다룰 수는 없는 일이다. 오탁번은 전통의 터전 위에 영미문학의 경향을 수용한 한국적인 모더니스트다.

 

이와같은 오탁번 문학의 의의는 1930년대에 활약했던 정지용의 시사적 의의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오탁번의 석사 및 박사 학위논문이 모두 정지용을 대상으로 한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로만 넘길 수는 없을 줄 안다. 오탁번과 정지용의 상호 관련성은 앞으로 심도 있는 논의를 해 볼 만한 문제이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오탁번의 균형 감각은 이 세계의 질서를 바라보는 순결하고 원형적인 시각에 힘입어 더욱 정교한 힘을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시에 나타나는 순수 의식의 근간이다. 그의 시의 혈맥을 이어주는 동심적 상상력 역시 이러한 순수 지향성과 이어질 것이다. 이 글은 오탁번 시에 나타난 동심적 상상력과 그것의 확산으로 인한 서정성의 심화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오탁번 시의 전체적 맥락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려 한다.

1. 고향의식과 동심


세련된 모더니즘적인 창작 기법을 추구하면서 잊혀져 가는 순우리말과 전통적인 삶에 계속적인 관심을 가져오고 있는 오탁번 시의 주요 소재는 고향이다. 그는 떠나온 고향을 향한 간절한 희구를 통하여 이 세계의 불온함과 불순함을 극복해 보고 싶었다. 이남호가 오탁번 문학 세계의 특질에 대하여 “순수가치는 절대적으로 신봉되고, 그것은 세계의 척도로 사용한다. 이때 순수는 왜곡되기 이전의 순수이다.”라고 한 점 역시 오탁번 시에 나타난 동심과 고향의식의 결합에 대한 지적과 통할 것이다.

 

오탁번은 현실적 삶의 왜곡이 심화될수록 고향에 대하여 더욱 집착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고향의식을 통하여 인간 본연의 순수한 마음을 원형적 공간의 범주 안에서 회복하기를 염원하였다. 그가 고향 체험을 한 것은 유년의 일이므로, 고향으로의 회귀 의식은 유년의 동심 세계로의 환원에 대한 갈망과 통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시기를 달리 하면서 「고향」이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시를 발표한 바 있다. 이 세 편이 지향하는 것은 모두 비슷한데 다음 시는 『너무 많은 것 가운데 하나』에 실린 작품이다.

경칩날 우는 개구리 소리야
보리이랑 얼구던 겨울을 깨우고
개울가에 버들강아지도 낳대
잠을 깬 나의 유년도
중퉁말 개울의 돌다리를
꿈처럼 건너
벌말 학교에 오가며
땡비처럼 왱왱거리며
글을 물어날라
―「고향」 부분

시인은 “아침에 받은 형님의 서툰 글씨”를 보면서 고향을 생각하게 된다. 그가 떠올리게 되는 고향의 이미지는 인용된 부분에서 알 수 있듯 동심의 눈에 비친 자연의 형상을 통하여 구체화한다. 경칩날 우는 개구리 울음 소리가 겨울을 깨우며 버들강아지를 낳는다는 표현은 그야말로 동심의 눈을 통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과거를 떠올리는 것에 대하여 시인은 “잠을 깬 나의 유년”이라고 말한다. “중퉁말 개울의 돌다리”나 “벌말 학교”는 시인이 어렸을 때 동심의 꿈을 키우던 곳으로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단절감으로 인하여 간절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그가 유년의 순수 공간을 연이은 돈호법을 통하여 애타게 부르는 것은 그곳에서 자라나던 순수한 동심이 성인이 되어 서울에 살고 있는 지금은 메말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동심에 대한 갈구와 늘 이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탁번의 고향 의식은 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기억을 통하여 구체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지향성 역시 동심의 세계관과 맞물린다. 이런 종류의 작품으로 「하관」, 「벙어리 장갑」, 「내 고향」 등과 같은 것도 들 수 있다.

이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모를 풀꽃들의 뿌리로 돌아가고
향불 사르는 연기도 멀리 멀리
못 떠나고
관을 덮은 명정의 흰 글자 사이로
숨는다
무심한 산새들도 수직으로 날아올라
무너미재는 물소리가 요란한데
어머니 어머니
하관의 밧줄이 흙에 닿는 순간에도
어머니의 모음을 부르는 나는
놋요강이다 밤중에 어머니가 대어주던
지린내나는 요강이다 툇마루 끝에 묻힌
오줌통이다 오줌통에 비치던
잿빛 처마 끝이다
이엉에서 떨어지던 눈도 못 뜬
벌레다
밭두럭에서 물똥을 누면
어머니가 뒤 닦아주던 콩잎이다 눈물이다
저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 모를 뿌리들의 풀꽃으로 돌아오고
―「하관」 전문

어머니의 하관을 바라보는 아들의 슬픔이 절절하게 배어 있는 작품이다. 시인은 이 시에 관한 시작 노트에서 “이 작품을 쓸 때 어머니와 나 사이를 이어 주었던 탯줄과도 같은 끊어지지 않는 상징을 애타게 갈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피력한 바 있다. 이 시에 나오는 어머니와 시인과의 교감은 동심적 세계 인식을 근간으로 한다. 이 시가 동시의 형식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나 작품의 내면에는 아동 화자의 발화 같은 시적 형식이 숨어 있다.


여기 나타난 동심은 소재로서의 동심이 아니라 내면 의식으로서의 동심이다. 어머니의 관을 덮은 명정의 글자 사이를 떠도는 향불 연기의 이미지에 어머니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시인의 마음은 투영된다. 그러나 그 향불은 원래 지닌 수직 지향성을 놔두고 수평으로 펴져 나가는 형상을 보이는 반면에, 무심한 산새는 수직으로 날아올라 어머니와 시인의 이별이 주는 현실감을 가중시킨다. 어머니가 마지막 가는 모습을 앞에 둔 시인은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어머니를 애도하는 마음을 승화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시인은 어머니 품안에서 영원히 어린아이처럼 살고 싶었던 희망을 토로하는데 이를 통하여 이 시의 동심적 요소는 확대된다.


「하관」의 동심은 작고 힘없는 것들에 대한 지향을 통하여 나타난다. 물론 이것들이 지닌 상징의 힘은 작지 않았다. 자신을 “어머니의 모음을 부르는 놋요강”이며 “어머니가 대어주던 지린내 나는 요강”이며 “툇마루에 끝에 묻힌 오줌통”이라고 은유하면서 시인은 어린시절에 어머니와 함께 했던 자아의 모습이야말로 어머니와 자신의 가장 순수하고 원래적인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이엉에서 떨어지던 눈도 못 뜬 벌레”라는 은유를 통하여 자신은 어머니가 없어서는 온전히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자신이 희망하는 삶은 어머니와 함께 살던 어린 시절처럼 순수한 동심을 유지하는 삶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밭두럭”에서 물똥을 누면 뒤를 닦아주던 콩잎의 이미지는 가장 근원적인 세계를 장악하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상징으로 나아가게 하는 대목으로서 동시적 요소를 다분히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처음과 끝은 아동적 발화와는 구분되는 존재론적인 잠언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순수와 동심의 세계는 결국 신화적이고 초월적인 세계에 닿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동심에 기반을 둔 고향 의식이 신화적 상상력과 맞물리는 대표적인 작품이 「초등학교 동창회」이다.

액셀러레이터 밟으며 생각해 보았네 마분지 공책에 몽당연필로 괴발개발 숙제한 다음 자라바위에서 멱감던 내 동무들 생각났네 냇가 자라바위에 ‘김순자 바보’ ‘이영순 바보’ ‘윤준열과 염미자 얼레꼴레’ 써놓고는 그 옆에 걔네들 얼굴 호박처럼 크게 그려놓고 냅다 달려가서 물속으로 뛰어들던 아기 고래보다 더 작은 옛 동무들의 알몸이 떠올랐네

타임캡슐 타고 달려왔지만 선사시대의 옛 동무들은 보이지 않았네 고래 그림이 그려진 바위는 허리까지 물에 잠기고 하늘빛 하늘만 출렁이고 있었네 ‘오탁번과 이정자 얼레꼴레’라고 바위에 써놓고 물 속으로 몸을 숨긴 내 옛 동무들처럼 암각화로 남은 고래떼는 얼레꼴레 나를 놀리면서 물 속으로 숨어버렸네
―「초등학교 동창회」 부분

고향을 떠나와 도시 생활을 하는 시인에게 고향은 신화적 공간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시인은 “반구대 암각화”를 보려고 가는 길을 “고래 그림 그려놓은 선사시대의 옛동무들”을 찾아가는 회귀의 길이라고 설명한다. 자신이 탄 자동차를 “타임캡슐”이라고 비유하는 점 역시 그의 고향 의식이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갈망과 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상력은 함께 멱을 감던 친구들의 구체적 이름에 대한 기술과 그 이름에 얽힌 장난기 어린 추억으로 구체화한다. ‘아무개 바보’, ‘아무개 얼레꼴레’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 이미 천진 난만한 동심성을 지닌다. 옛 동무들의 알몸을 “아기 고래”와 비교하는 부분에 이르러 유년의 고향에 대한 갈망을 신화적 세계에 대한 희구로 이어놓는 오탁번의 세계인식은 여실히 나타난다.


문제는 그 옛날의 친구들은 기억의 형상으로서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이미 모두 다 환갑이 다가오는 노년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더욱 그 시절과 그 아이들이 그리웠다. “고래 그림이 그려진 바위는 허리까지 물에 잠기고 하늘빛 하늘만 출렁이고 있었네”는 허무와 슬픔이 배어 있는 부분이다. 선사시대의 고래 떼는 옛 동무들처럼 사라져 버렸고, 또한 옛 동무들 역시 선사시대의 고래 떼처럼 사라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를 내며 추억과 신화의 공간 속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은 간절함을 넘어서 숭고하기까지 하다. 이는 동심과 결합된 고향 의식이 신화적 의미를 지니는 데에까지 나아갔기 때문이다.

2. 에로티시즘의 해학성


오탁번의 시에는 성적인 상상력을 위주로 하는 작품들이 많다. 이런 시들은 대개 짓궂은 장난기를 보여줄 때가 많은데,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대부분의 경우 재기 발랄한 구어체의 대화 형식을 그 안에 내장시키고 있다. 그의 에로티시즘은 우수와 애상에 휩싸인 비장미의 형식을 보여주는 경우도 간혹 있으나 대체로 유쾌함과 골계미를 특징으로 한다. 천진난만한 성 묘사는 솔직하거나 느닷없어 독자들의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그의 에로티시즘은 성적 욕망의 불일치를 나타내지 않으며, 무의식적인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유폐적인 성적 언어를 추구하지 않는 채 인간미 넘치는 무구한 세계 인식을 보여주어 성의 세계가 지닌 가식과 은폐의 형상을 깨부순다. 오탁번 시의 해학성이 성적 이미지와 자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에로티시즘의 근간에는 이 세계의 비애와 불화를 단숨에 정화시킬 수 있는 맑고 천진한 시심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청계산 등산로 가에 있는
찻집 알프스 샬레의 토요일 오후
베란다 난간의 수세미외 넝쿨에서
수세미외 하나 뚝 따서
눈빛 서늘한 여인에게 주었다
“수세미외가 무슨 상징일까?”
여인은 대꾸를 하지 않고
청계산 가을 나뭇잎만
뺨 붉히며 웃어댄다
“암 암 알고 말고”
정말 쓸쓸한 마음이 되어
수세미외 하나 뚝 따서
쓸쓸한 여인에게 건네주는 일이
썩 괜찮다는 듯
―「수세미외」 부분

이 시의 에로틱한 이미지는 그 외양에서 짐작되는 수세미외의 상징성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수세미외를 하나 따서 눈빛 서늘한 여인에게 건네주면서 그녀를 은근슬쩍 놀려주는 해학이 일품이다. 화자가 그 연인에게 수세미외를 따 주게 된 것은 그 연인의 서늘한 슬픔에서 “쓸쓸한 마음”을 읽어냈기 때문이다. “수세미외가 무슨 상징일까”라는 화자의 질문에 그 여인이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여인 역시 그 수세미외의 상징적 의미와 그것을 자신에게 주는 화자의 속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정말 쓸쓸한 마음을 지닌 한 남자가 서늘한 눈빛을 하고 있는 쓸쓸한 여인에게 수세미외를 주는 일은 노골적으로 에로틱한 묘사나 서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근함으로 인하여 오히려 더욱 해학적인 에로티시즘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가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려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굴비」 전문

이 시는 2002년도 미당문학상 후보작에 오른 작품으로 여러 평자들에 의해서 언급된 바 있다. 한 편의 설화를 시적인 구조로 재구성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이 시는 도식적인 재조합을 넘어서 이 서사 구조 안에 시인의 정서를 한껏 불어넣는 새로운 창조 과정을 거치며 완성된다. “음담을 자기 희생을 통한 고귀한 부부애의 확인이라는 주제로 승화시킨 것이다”라는 이숭원의 적절한 설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시인은 이 시를 통하여 거짓 사랑과 일회적인 성행위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과연 진정성 있는 건강한 에로티즘은 무엇인가를 말한다. 이는 이 시에 나오는 두 가지 사랑의 비교와 대조를 통하여 나타난다.


먼저 등장하는 사랑은 굴비 장수와 가난한 아낙네의 사랑이다. 시인은 이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닌 거짓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굴비 장수는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위하여 가난한 여인을 물질로 유혹하였으며, 여인은 자신의 남편을 먹이기 위해서 잠시 몸을 판 것 뿐이다. 이 둘이 몸을 섞은 목적은 서로 다른 곳에 있었고 이들의 사랑은 잠시의 말초적 유희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여인은 성적인 쾌락조차 느끼지 않았을지 모른다. 여인의 남편은 굴비에 얽힌 이야기를 다 듣고도 여인의 진짜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이를 용서하여 줄 수 있었다. 이 또한 상징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문제이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라는 사내의 말을 잘못 이해한 아내가 다시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에도 사내가 아내를 끌어안고 목메어 하는 이유 역시 같은 맥락에 있겠다.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저녁 밥상을 위하여 두 번씩이나 몸을 파는 우여곡절을 통하여 사내와 여인의 사랑은 더욱 무르익게 된다. 시인은 서로의 상처와 결점마저 이해하면서 이루어지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풍년을 기원하며 이루는 성행위와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는 모습과 같은 사랑이야말로 시인이 추구하고 싶었던 사랑이다. 하지만 굴비 장수에 얽힌 이러한 서사의 내용이 어차피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 때, 우리는 시인이 추구하는 순수한 이상적 사랑 또한 실제로는 쉬운 일이 아님을 짐작하게 된다.

3. 동화적 상상력


김재홍은 오탁번의 첫 시집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의 발문에서 「개똥참외」, 「우리시대의 시인론」 등의 작품을 중심으로 오탁번 시에 나타난 “현실 풍자 또는 냉소주의”에 관하여 언급한 적이 있다. 오탁번의 냉소주의는 『생각나지 않는 꿈』에서 정점을 이루다가 차츰 후기로 갈수록 약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가 그만큼 세계 인식 방법에서 쌀쌀한 지성보다는 온유한 인정을 더 강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시 전체를 통독하여 보면 냉소주의 역시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애정 발현의 다른 형식임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중기시 이후 삶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시정신은 동화적 상상력을 통하여 더욱 확대되어 나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탁번의 동화적 상상력은 세속화된 현실을 무화시켜 순수를 회복시킬 수 있는 낙관적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의도를 지닌다. 또한 그의 인간 사랑은 가족 사랑을 시작으로 하여 확산되어가는 경향을 보인다. 농경적 세계에 근간을 둔 고향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시로 형상화한 오탁번이 지닌 가족 사랑은 근대적 문명 세계의 황폐함을 지양하고 원형적 세계로 다시금 나아가고자 하는 희구의 소산이다. 순수와 낭만이 있는 오탁번 시의 공간은 고향이냐 도시냐를 구분할 것 없이 동화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백운국민학교 3학년이었을 때
충주사범을 갓 졸업한 권영희 선생님이
나의 담임교사로 부임해 왔다
내 생애의 한복판에 민들레꽃으로 피어서
배고픈 열한 살의 나를 숨막히게 했다
멀리 솟은 천둥산 아래 잠든 마을에
풍금을 잘 치는 예쁜 여교사가 왔다
어느 날 하교길에 개울의 돌다리를 건너며
들국화 한 송이 가리키듯 하늘 손짓했다
탁번아 너 내 동생되지 않을래?
전쟁 때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오빠도 군대에 가서 나는 너무 외롭단다
선생님이 누나가 되는 정말 이상한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났다
송화가루 날리는 봄언덕에서
나는 산새처럼 지저귀며 날아올랐다
누나다 누나다 선생님이 이젠 누나다
영희누나다 영희누나다
가을물 반짝이는 평장골 뒷개울에서도
고드름 떨어지는 겨울 한나절에도
누나와 동생으로 꾸는 꿈은
솔개그늘처럼 아늑했다
영희누나가 있으면 배고프지 않았다
울지도 않고 숙제도 잘했다
영희누나한테 착한 어린이가 되지 못한 날은
꿈속에서 벌서며 오줌을 쌌다
―「영희누나」 전문

오탁번의 시에는 한 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시는 신춘문예를 통하여 동화와 소설로도 등단한 오탁번의 서사문학적 기질이 시적 문맥에 녹아 들어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처럼 이야기시 경향을 보이는 오탁번의 작품들은 동화적 상상력을 통하여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랑을 형상화 하게 된다. 인용된 시는 이러한 성격을 지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잘 풀어쓰면 산골 소년과 젊은 여교사와의 애틋한 정을 소재로 하는 한 편의 동화가 될 것 같다. 그의 시에 서사적 문맥이 깊이 끼어 드는 경우, 정과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내용이 주로 나타나는데 이 시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시인이 국민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갓 부임한 권영희 선생님은 시인을 친동생처럼 좋아했다. 대개 초등학생에게 선생님은 무섭고 어려운 존재이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자라난 인간적인 유대는 이들 사제 관계를 친남매 관계로 전환시킨다. 이 아름다운 전이가 가능했던 것은 그들 마음에 어떤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슴속에 자리한 외로움이었다. 시인은 이를 “배고픈 열한 살”이라고 말하며 가난의 문제와 결부시켜 표현하였으며, “영희누나”는 “나는 너무 외롭단다”라고 더욱 솔직히 말해 주었다. 그 솔직함에 힘입어 교사는 제자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여기 배고픔과 외로움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져 나아갔을 것이다. 솔개그늘처럼 아늑한 꿈속에 인간 사랑의 마음이 넉넉히 배어 있다.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 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 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나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다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슬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세요?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토요일 오후
모의고사를 열 문제나 틀리고도 행복하기만 한
강남구에서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구 예쁜 것!
―「토요일 오후」 전문

이 시에서도 오탁번의 동화적 상상력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최근 시집인 『벙어리장갑』에 실린 작품들 중에는 동시라고 볼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실려 있는 것은 오탁번 시의 동화적 상상력이 휴머니즘의 정신과 맞물리면서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이다. 그는 「엄마」, 「아빠」 등의 동시를 통하여 인간 사랑 특히 가족 사랑에 관한 주제 의식을 형상화한다. 이 역시 그의 시에 나타난 인간애의 또 다른 모습이다. ‘토요일 오후’는 일상에 바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여유의 시간이다. 시인은 이 시간에 딸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과거와 현재에 가로놓인 시간의 궤적을 되짚어본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바쁜 일상적 삶이 가져다주는 긴장감과 중압감으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설 수 있게 된다. “


베란다의 행운목”,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 “시민공원” 등은 가벼워지려는 시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소재들이다. 이처럼 평온한 시간에 어린 딸과 관련된 동화적인 에피소드가 기억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중학교 2학년인 딸을 보면서 그 때의 에피소드를 기억해 냄으로써 시인은 흐뭇해하고 행복해 한다. 그만큼 시인의 내면에는 동화적이고 동심적인 세계에 대한 갈구가 늘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탁번에게 행복은 사회적인 것에 있기보다는 가정적인 것에 있으며, 화려하고 큰 것에 있기보다는 작고 소박한 것에 있다. 지금 중학생이 된 자신의 딸을 바라보면서 느끼게 되는 행복감은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라 “매일 물을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처럼 조금씩 공을 들여가는 과정을 통하여 “손바닥만큼씩” 늘어난 것이라는 점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시인에게 토요일 오후의 행복감은 더없이 소중하다. 세 살적 딸아이는 이제 어엿한 여중 2학년이 되었고, 사소한 말실수를 하기는커녕 경어법과 문법이 맞는 말을 구사하는 것을 보면서 시인은 시간의 흐름을 실감한다. 그렇다고 과거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딸아이에 대한 사랑은 여전할 뿐이다. 행복한 과거의 기억을 반추할 수 있는 평온한 현실은 시인이 지니는 가족 사랑의 터전이다.

할머니 산소 가는 길에
밤나무 아래서 아빠와 쉬를 했다
아빠가 누는 오줌은 멀리 나가는데
내 오줌은 멀리 안 나간다

내 잠지가 아빠 잠지보다 더 커져서
내 오줌이 멀리멀리 나갔으면 좋겠다
옆집에 불나면 삐용삐용 불도 꺼주고
황사 뒤덮인 아빠 차 세차도 해주고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호호호 웃는다
―네 색시한테 매일 따스운 밥 얻어먹겠네
―「잠지」 전문

동시는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서 세계를 재해석하는 천진한 시심을 담고 있어야 한다. 어린아이는 함구(緘口)의 시인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오염된 세계의 시선을 배제하는 동시는 모든 시의 근원적 형태이다. 이 시의 화자 역시 어른의 세계에서 해석되는 성에 눈뜨지 않은 어린 남자아이이다. “잠지”는 바로 어린아이의 시선에 의해서 해석된 세계의 순수성을 담보하는 시어이다. 이 말에서 성적인 뉘앙스를 읽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의 오줌이 옆집에 난 불을 꺼 주고, 아빠 차의 먼지도 닦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자신의 작지만 맑은 힘이 세상의 나쁜 일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줄 것을 희망하는 천진한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근본적으로 시인 자신의 인간애적 태도에서 기인한다. 마지막 연에서 어린아이의 색시를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씨 역시 가족과 인간의 유대 가능성을 지향하는 세계 인식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이다.


최근 오탁번의 시는 동심을 더욱 확대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는 낭만적 동심과 건강한 해학을 중심으로 서정시의 본질에 충실한 시들을 다수 발표하고 있다. 그는 비유와 상징, 운율 등 현대시의 주요 요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초기시집에서부터 나타났던 전통과 현대의 융합 가능성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진정 어린 서정의 위의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결과를 낳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가 바로 시인의 내면에 있는 동심의 힘이다.

 

시류에 영합하는 거대 담론을 쫓기보다는 작고 아름답고 눈물겨운 것들에 대한 관찰과 동경을 통하여 실험과 보수의 편가르기를 뛰어넘는 서정의 맥을 이어온 오탁번의 시는 실험과 참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한국 시사에서 또 다른 개성을 지닌 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최근 작품에서 두드러진 신화적 세계에 대한 관심 역시 가장 근원적이고 우주적인 곳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시의식의 발현이라는 측면에서 동화적 상상력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올해 회갑(回甲)의 연세에 이른 시인이지만 오탁번은 아직도 현장의 시인임에 틀림없다. 그는 문예지를 통하여 달마다 계절마다 쉬지 않고 꼬박꼬박 작품을 발표하면서 더욱 웅숭깊은 시의 맛을 우려내고 있다. 앞으로 쓰게 될 그의 시 역시 동심을 근원에 둔 서정시의 품격을 유지하리라 짐작된다. 굽힐 줄 모르는 그의 건필을 기대하는 바이다.

 

출처, http://www.chungdong.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