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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詩話], 며느리밥풀꽃

휘수 Hwisu 2007. 1. 16. 17:53

[오탁번 詩話], 며느리밥풀꽃  

         
시인의 번지점프

 

한 편의 시에 담기는 뜻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티끌과도 같이 하찮은 것이다. 시의 뜻은 그 뜻을 어떻게 담아내느냐 하는 방법의 문제이다. 지금 말하는 '方法'의 진정한 의의를 오해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손재주나 才幹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시의 존재 의의는 실로 이러한 방법에 온전히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방법은 곧 認識이요 夢想이요 想像力이다.

……중략……

시인이 사용하는 어휘는 그 시인의 시의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어줍잖게 사상가를 흉내내는 일은 금물이다. 소월의 [진달래꽃]이나 윤동주의 [서시]에는 심오한 사상이 없지만 시인이 짠 빛나는 어휘들의 날줄과 씨줄이 조화되어 우리들의 심금을 울린다. 바로 시인이 그의 세계관에 부합되는 시적 언어를 선택하여 인간의 원형적인 정서를 노래하였기 때문이다. 진달래꽃을 따서 뿌리는 행위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움을 느끼는 나약한 행위는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으로서는 용서받지 못할 비굴한 것이지만 이들의 작품 속에는 현실과 역사를 넘나드는 인간으로서의 번뇌가 있고 쉽게 사라지지 않을 한민족으로서의 꿈이 있는 것이다.


서정주의 시에서 꼭 어린아이의 재롱이나 투정을 보는 것 같을 때 나는 즐겁다. [신라초]나 [질마재신화]의 시편들이 뛰어난 것은, 신라를 처음 본 어린아이의 눈으로, 고향인 질마재를 넘나들던 철부지 소년의 시선으로, 철부지의 어휘로 사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담긴 것은 삼국시대의 비극적 세계관이나 빈궁화된 한국적 농촌현실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에 날리며 생명력을 유지해 온 우리 민족의 원형적 정서가 때묻지 않은 솜씨로 무르녹아 있기 때문인 것이다.

 

시인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사물을 인식할 때 기성의 방법에 안주하지 않고 고의적으로 대상을 왜곡 굴절시킨다. 허장과 과장을 일삼고 입 앙다물고 말을 아끼고 또 수다를 떨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시인의 비유와 상징은 이토록 비상식적인 시선에서, 왜곡된 시야에서 탄생한다. 다음의 시에 나타나는 다양한 어휘들이 반사하는 거울을 보라. 시인이 지닌 오목거울과 볼록거울은 시시각각 햇빛을 반사하며 <며느리밥풀꽃>을 우리들의 나태한 정신 앞에 들이밀고 있지 않은가.
언어의 정령들이 이 시인의 무의식과 의식의 벼랑에서 아슬아슬하게 무서운 번지점프를 하고 있다.

 

며느리밥풀꽃!
이 작은 꽃을 보기 위해서도, 나는 앉는다.

바삐 걷거나, 키대로 서서 보면 잘 안 보이는 이 풀꽃들을 더듬어가는 동안에도, 나는 몇 번인가 끼니를 맞고, 밥상을 차리고, 주걱을 든다.

나는, 이 보라 보라 웃고 있는 며느리밥풀꽃을 밥처럼 퍼담을 수가 없다.
이 꽃들의 연약한 실뿌리들은, 대대로 쌓여 결삭은 솔잎을 거름으로, 질기게도 땅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갈매빛 솔잎들이 길러주는 반그늘 속에서, 꽃빛 진한 며느리밥풀꽃들이 꽃빛 진한 며느리밥풀꽃을 낳는다. 보라.
통설이 전설을 낳는다. 보라.

며느리배꼽이나 며느리밑씻개 같은 마디풀과의 꽃들이 낮은 땅에서 창궐하는 동안에도, 며느리밥풀꽃들은 작은 군락을 이루어 산등성이를 기어오른다. 보라.

이 긍지만 높은 작은 꽃의 밀실(蜜室)에 닿기 위하여, 벌은 제 무게로 허공을 파며, 더 자주 날개를 움직여야 한다.

보여도 보이지 않게, 스스로 크기와 빛깔을 줄여온, 며느리밥풀꽃의 시간들이, 내 이마에 스치운다.
보라. 보라 보라 웃고 있는 며느리밥풀꽃!

          - 이향지, 「草心歌
                    ―며느리밥풀꽃」전문.

 


시안, 1999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