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연애 시를 읽는 몇 가지 이유 / 이광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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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시를 읽는 몇 가지 이유 / 이광호

휘수 Hwisu 2006. 3. 9. 01:03
그런데 사랑이란 정확히 이런 것이다: 은밀한 생, 분리된 성스러운 삶,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 그것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인 이유는, 그러한 삶이 가족보다 먼저, 사회보다 먼저, 빛보다 먼저, 언어보다 먼저, 삶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어둠 속, 목소리도 없는 , 출생조차도 알지 못하는 태생(胎生)의 삶.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p. 64-

그토록 끊임없이 사랑의 시가 쓰여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저 낯익은 양식 속에서 새롭고도 강력한 언어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은 말이다. 우선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사랑이란 아주 보편적인 정서적 양태이며, 시간을 뛰어넘은 그 보편성이 끊임없이 사랑의 노래를 만들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황조가]의 시대부터 사랑의 노래는 쓰여졌다고 하겠다, 그러나 '연애문학]이 문학제도 안의 주요한 주제와 스타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여기서 '연애'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겠다. 연애라는 말과 개념의 본격적인 도입은 1910년대 이후라고 한다면, 그것은 남녀 사이의 개인적 친밀성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정서적 양태와 사건을 의미한다. 연애의 발명은 근대적 개인의 탄생과 긴밀하게 연루되어 있다. 연애와 섹슈얼리티는 모더니트의 전개와 사회에서의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분리라는 구조적 변동과 연관지을 수 있다. 그런데 명백히 현대의 사회적 산물인 연애는 사회 시스템의 일부로 작동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면서, 다른 측면으로는 제도적인 삶의 지배에 저항하는 '은밀한 생'의 영역이다. 사적 공간에서의 두 사람의 무모한 열정은 이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이 사회를 거부하고 경멸하는 '반사회적'인 공간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연애의 문학들은 집단과 제도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 사랑을 문제 삼는다.

근대적인 의미의 서정시가 개인 주체의 대상에 대한 동일화의 열망으로 빚어지는 것이라면, 연애시와 그 근대 이후 서정시의 한 전형을 이룬다. '나'와 '당신' 사이의 결합과 소통에 대한 갈망은 연애시의 기본적인 발화의 동력이다. 그런데 세상의 그 많은 연애시들은 왜 사랑의 환희를 노래하기보다는 사랑의 결여를 노래하는 것일까? 왜 사랑을 둘러싼 시적 담화들은 '당신의 부재'라는 상황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일까? 그렇게 늘 당신은 부재의 방식으로만 존재하며, 나의 실존은 늘 당신의 치명적인 상실을 감당해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 연애시의 근본적인 모순이 가로놓여있다. 나와 당신의 완벽하고 지속적인 결합에 대한 열망은, 역설적으로 그것의 불가능성이라는 조건으로부터 그 강렬함을 부여받는다. '지속 가능한' 육체와 영혼의 결합은 없다. 공간을 뛰어넘는 사랑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저 난폭한 시간 앞에서 막막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다만 구체적인 것은 현존하는 두 사람의 육체일 뿐.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는 사랑을 갈망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두 존재의 결합이라는 연애시의 욕망은, 사실은 그 어긋남에 대한 암묵적인 승인을 전제한다. 그러니 모든 연애시는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라고 노래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으로써 연애의 주체는 사랑이라는 상처 속에서 실존적 동일성을 부여받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사랑을 방해하는 제도적 현실에 대한 경멸조차도, 그 사람의 근원적인 불가능성을 은폐하는 알리바이일지도 모른다. 상처의 뼈아픈 깊이를 통해서, 연애에 처한 자는 주체성을 얻는다. 소통의 지속성이 아니라 부재의 지속성이, 사랑의 벗어날 수 없는 중독성을 보장한다. 그러니까 그 모든 부재와 상실과 환멸이 역설적으로 사랑을 증거한다. 따라서 사랑에 관한 노래들은 단지 쾌락을 향해 있지 않으며, 사랑이라는 상처를 지속적으로 후벼 파면서 쾌락과 고통이 구별되지 않는 '향유의 지점을 향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러게 왔다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할 말 없는 수초가 말
잃은 듯 뒤엉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다

               - 채호기 [사랑은] 일부


사랑이 시작되었다. 사랑의 시작은 햇빛과 물의 '발가벗은' 결합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다. 그런데 시의 언어는 두 겹의 층위를 갖고자 한다. 하나의 층위가 사랑이라는 사건에 대한 묘사적 진술이라면, 숨어 있는 두 번째의 층위는 사랑의 '그늘'에 대한 내적 진술이다. 두 번째 층위는 물빛을 어둡게 하는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처럼 사랑의 시작에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드리운다. 그 불길함에 대해 "할 말 없는 수초가 말/잃은 채 뒤엉키듯이" 사랑은 불안한 침묵으로 시작된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곳에 가라앉은 일처럼, 사랑이 시작되는 일은 황홀하고도 불길하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날아가며 남겨둔 여린
가지가 자지러지며 출렁이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꽃들은 예쁘게 피어났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이미 범람해버린 강물이
지루하게 제 수위를 회복해가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사랑이 어루만진 부위에
          홍수가 휩쓸고 간 잔해만 남았다...

                     -채호기 [사랑은] 일부


사랑이 끝나는 일은 사랑의 시작 안에 숨어 있는 불길함이 드러나는 사건이다. 새들이 하나의 나무를 떠나 날아오를 때, "여린/가지가 자지러지며 출렁이듯이" 그 진동만으로 사랑은 남겨진다. 그런데 사랑이 나무에 머물렀던 시간에서도,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피어나는 꽃처럼 사랑은 모순과 결핍으로 존재했었다. 범람한 강물이 "지루하게 제 수위를 회복"하는 표면적인 풍경 뒤에는, 사랑의 홍수가 휩쓸고 간 잔해가 있다. 풍경과 이미지로서의 사랑은 그 아래에 좀 더 잔혹한 내적 원리를 숨기고 있다. 시의 언어는 이렇게 사랑하는 '나'와 시 쓰는 '나'의 이중적 화자를 보여준다. '글 쓰는 나'의 심미적 주체가 매혹적이며 완결된 사랑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어한다면, '사랑하는 나'의 고통의 주체는 그 사랑의 불길함과 잔혹함에 전율한다. 사랑의 담화는 이렇게 분열된 주체의 이중적 목소리를 들려준다.


세상에! 네 몸 속에 이토록 자욱한 눈보라!
헤집고 갈 수가 없구나
누가 가르쳐주었니?
눈송이처럼 스치는 손길 하나만으로
남의 가슴에 이토록 뜨거운 낙인 찍는 법을
세상에! 돌림병처럼 자욱한 눈보라!
(중략)
모든 삶의 밑바닥에는 끔찍하게 무겁고, 끔찍하게
힘들고, 끔찍하게 뜨거운 것 있잖아?
그 뭉쳐진 것이 터지는 날
세상에! 눈보라처럼 흐느끼는 바이러스 같은 것!
나 어떻게 이 숨찬 눈보라를 건너가지?
사랑은 사랑이 있는 곳에서 가장 많이 모자란다는데

               -김혜순 [자욱한 사랑] 일부



사랑은 자욱하다 왜 그런가? '네 몸 속'이 눈보라처럼 자욱하기 때문이다. 너의 몸 속의 자욱함 때문에 '나'는 네 몸을 건너갈 수가 없다. 문제는 그 자욱함의 연원이다. 자욱함은 삶의 밑바닥에 드리운 '무겁고 힘들고 뜨거운 것'이 터지는 사건과 연관된다. 그런데 그것은 일종의 '돌림병' 또는 '바이러스' 같은 것이다, 자욱함은 그러니까 전염되는 질병이다. 여기서 하나의 명제가 나타난다. "이 병 걸리지 않고는 네 몸을 건너갈 수가 없겠구나" 라는 것이다. 여기서 자욱함은 너의 증상이면서 나의 증상이 된다. 너의 증상은 내 존재의 유일한 통로이다. 더 나아가면, 너의 증상이야말로 내 사랑을 존재하게 한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명제 "사랑은 사랑이 있는 곳에서 가장 많이 모자란다는데"가 얼굴을 내민다. 그리하여 모든 사랑의 자리는 자욱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너의 자욱함이 사랑의 유일한 길이라면, 기꺼이 그 질환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밖에는, 그래서 그 속에서 내 사랑을 증거하는 수밖에는....


반초도 안되는 순간,
어떤 벽에 뚫린 구멍은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네

그녀가 돌아올 때마다
그녀가 돌아갈 때마다
그에게서 구멍이 하나
안에서 밖으로 뚫어졌네

이 세상이 쉬 망하지 않는 이유
한없이 시간이 더디기 때문이라네

                   -이윤학 [반초도 안 되는 순간] 일부



'그녀'의 방문 때마다 '그'의 몸 속에 뚫어지는 구멍은, 사랑의 비극성을 압축한다. 사랑의 흔적은 구멍처럼 생성된다. 그런데 그 구멍은 사랑의 치명적인 비극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랑의 존재감을 만들어준다. 구멍의 흔적이 아니었다면 사랑은 세상에 없다. 구멍은 사랑의 결과이며, 또한 그 자체로 증상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의 증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성'이다. 구멍이 뚫리는 것, 혹은 증상이 드러나는 것은 '반초도 안 되는 순간'이다. 사랑의 증상은 순간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이 사랑의 비극성과 덧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렇다고 해두자. 그런데 이 사랑의 짧은 순간과는 달리 세상의 시간은 더디게 흘러간다. 시의 화자는 바로 그것이 "세상이 쉬 망하지 않는 이유"라고 말한다. 세속적 시간의 지루함은 사랑의 강렬한 순간성에 대비된다. 사랑은 세속적인 공간과는 다른 시간 속에 있다. 다른 시간 속에서 권태가 끼어들지 못하는 치명적인 사랑의 구멍을 만들어낸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중략)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이 없는 나의 폐허;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황지우, [뼈아픈 후회] 일부



직설적인 화법으로 화자는 사랑의 폐허를 말한다. 폐허란 무엇인가? 우선 폐허는 사랑의 자리에 남은 흔적이다. 그것은 존재의 '망가짐'을 의미하지만, 문제는 그 '징표'없이는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지속 가능한 사랑이 없다면, 사랑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폐허'뿐이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그 폐허의 자리가 결국 '나'만의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좀 더 극단적인 진술로 나아간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못했"던 것은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기 때문이다. 나의 폐허 안에서 나는 '나'라는 '신상'을 섬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것일까? 화자는 그것을 뼈아픈 후회라고 말했지만, 이 과격한 고백의 정직성은 역설적으로 그 사랑들로 인해 나의 '동일성'이 가능했음을 드러내준다. 나만의 폐허의 왕국은 "나에게 왔던 사람들"이 없었다면 건설되지 않았을 것이다. 폐허는 나만의 증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것은 사랑의 사건이 야기한 사랑의 증상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랑으로부터도 고립을 선언하는 마지막 전언의 뼈아픔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열정을 날카롭게 환기시킨다.


게처럼 꼭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묵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도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멜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로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황동규, [쨍한 사랑 노래] 전문



사랑의 마지막 시간은 어디인가? "마음 없이" 살 수 있는 경지?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집착의 욕망을 끊고 마음 없이 살아가는 것.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 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라는 것은, 어떤 근원적인 초연성의 공간을 보여준다. 애써 버려야 할 그 어떤 것도 아주 없는 그런 상태는 가능한가? 그 상태에 시인은 하나의 이미지를 부여한다. 강물이 둔치를 흘러내린 자리, "내림 줄 쳐진 시간"의 자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 자리는 사랑의 마음이 존재했던 것을 증명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화자는 그렇게 그 시간의 내림 줄 쳐진 자리에서 초연성의 경지를 지향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살고 싶어한다' 그렇게 살고 싶다는 것은, 아직 그렇게 되기 어렵다는 전언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이 초연한 노래의 제목은 '쨍한 사랑 노래'이다. 어떤 마음도 없이 살고 싶은 사람은 왜 '쨍한 사랑 노래'를 부를까? 그 초연함에 대한 열망조차 사랑의 일부라면 '쨍'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주는 생동감은, 다시 한번 기쁘게 사랑의 아이러니를 표현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목 좁은 꽃병에
간신히 끼여 들어온 꽃대궁이
바닥의 퀘퀘한 냄새 속에서 시들어가고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있다

           -이성복,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전문



이제 나는 사랑에 관한 마지막 잠언에 도달했다 사랑의 불가능성은 사랑의 외재성에서 비롯된다. 사랑은 늘 나의 바깥에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바깥의 사랑에 내가 잠시 속해 있는 사건이다. 그 사건의 일회성은 피할 수 없이 환멸을 동반할 것이다. "간신히 끼여 들어온" 사랑은 "바닥의 퀘퀘한 냄새"를 대면해야 한다. 그 냄새야말로 환멸의 자리를 보여주는 것이면서, '환멸의 주체'를 성립하게 하는 조건이다. 사랑은 늘 '어제의 하늘' 속에 속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랑의 시는 결국 사랑의 사건에 대한 사후 애도를 노래한다. 아무도 지금 이 순간 벌어지는 사랑을 노래할 수 없다. 사랑 노래는 사후적으로만 사랑 노래이다. 시간은 사랑을 배반하지만, 사랑은 늘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을 바라본다. 사랑은 여전히 당신과 나를 다른 시간에 살게 하는 힘이다. 그리하여 어떤 노래는 미래의 시간을 향해 이렇게 속삭인다


내 사랑 내 귀에 속삭였네
"사랑은 나의 권력"
나는 내 사랑의 귀에 속삭이네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사랑이여
우리의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정현종, [사랑은 나의 권력]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