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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내가 돌아오면 / 전경린.. 책 소개/ 펌

휘수 Hwisu 2006. 1. 29. 16:04

 

 

세상 끝의 입맞춤(언젠가 내가 돌아오면)/ 펌

 


 몰고 집을 나가고, 늑대, 여인이 되어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기생이 되어 천민의 삶을 살고, 그리하여 사막 같은 삶의 끝까지 걸어가는 것, 전경린은 이를 사랑, 열정이라 부른다.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에서 우리는 이런 사랑을 다시 만난다. 도덕과 규범과 제도를 거스르는 불륜의 사랑, 혹은 허위적이고 예속적인 삶을 끊고 이젠 스스로 서서 자기의 삶을 살겠다는 선언. 사랑과 열정으로 ‘세상 끝까지’ 가려는 이들은 혜규의 카페 입구에 걸린 로댕의 조각상처럼 그 세상 끝에서 입맞춤을 하리라. 그러나 열정을 마모시키는 것이 삶이라고 믿었던 그녀의 인물들은 이제 사랑은 삶 속에서 단련되고 길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듯하다.
마녀가 되어 집을 떠나갔던 그들은 이제 일상으로, 가정으로 돌아와 사랑이 삶이 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다른 시간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차곡차곡 밟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의 행보는 마녀들이 사는 법, 마녀들이 만들어 가는 사랑이라 할 만하다. 일상에 묻힌 마녀성을 발견하고 일탈을 꿈꾸던 전경린의 인물들이 일상으로 돌아와 타인에게서 상처를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그들을 끌어안고 사랑하는 과정은 낯설지만 따뜻하다. 이들 호랑이, 여자 혹은 마녀들은 이제 식물, 여자를 꿈꾼다. 하지만 이들이 마녀라는 주홍글씨를 떼어 내고 그들 안에서 식물성의 향기를 뿜어내기까지는 이들에게도 그리고 작가에게도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들은 아직 사막 위에 서 있다. - 문학평론가 황도경

작가의 말


간밤에 눈이 내렸다. 새하얀 붕대로 상처를 싸매듯 하얗게……. 눈에 덮이면 장소와 시간이 현실의 기획 바깥으로 기우뚱 기울어진다. 전 생애의 눈 내린 날들이 빈집의 기타 줄처럼 경련을 일으키고 부연 지붕들 위엔 눈 내리는 날의 영원한 손님처럼 긴 면사포를 쓴 신부들이 흰 화환을 들고 떠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발밑으로 지나간 날에 내린 모든 눈의 기억들이 굵은 진주알처럼 반짝이며 굴러 온다. 그래서 눈 내리는 날엔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눈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간이다. 일천구백칠십이 년의 눈과 일천구백팔십 년의 눈, 이천오 년의 눈, 그 모든 눈은 연대기를 초월하며 하나의 풍경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이 눈 덮인 풍경의 비현실성일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자신에게서, 또 타인에게서, 떠나고 또 떠난다. 그리고 몇 번이고 돌아오고 또 돌아온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 속에서 조각조각 흩어져 버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현실의 위태로운 외줄을 타지만 우리가 딛는 현실이란 머물 수 없는 것이고, 늘 무언가를 상실해 가는 것이고, 또 늘 무언가를 소망하게 하는 구차한 것이어서 존재는 편안할 날 없이 자꾸만 찢기고 나뉘고 끝없이 갈라진다.
현실이란 단어를 사전으로 찾아보면, 가능적 존재에 대한 현재적 존재라고 해석되어 있다. 삶과 희망 사이에서, 시간들과 공간들 사이에서 가능태로서의 나와 답답하고 막막한 현재적 나 사이에서, 삐걱이고 어긋나고 헛돌고 비켜 가면서, 나는 이곳의 나와 잠시, 혹은 오래, 어쩌면 영원히 헤어져 살아간다. 그러므로 해질 무렵에 시간이 붕괴하듯 내면의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두려움과 슬픔의 밀의는 바로 이산된 자신을 향한 그리움의 통각이 아닐까.
삶의 궁극인 영원이란 지금 이곳에, 모든 나가 동시에 모여든 일치의 순간을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그런 절정을 향해 살아간다. 그것은 내가 내게로 온전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일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그렇게 자기로부터 떠나가고 또 돌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세상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눈처럼, 비와 구름과 안개처럼…….
최근에 우분투라는 새로운 말을 들었다. 남아프리카 줄루족의 말인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며 서로의 안녕을 가리키는 말이란다. 우분투, 하고 아름다운 인사를 혼자 해 본다. 경계를 넘어 이 세계 전체로 퍼져 나가는 잔잔한 파문이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단 한 번 얼굴을 스쳤던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들도, 한때 내게 잘못을 했던 사람들과 내가 잘못을 했던 사람들도 모두 안녕하기를……. 그래서 우리들 모두 스스로 평화롭기를…….

 

 

전경린 소개

 

염소를 방안으로 몰고 오는 여자와 맑은 날에도 검은 우산을 쓰고 다니는 청년 등 전경린의 소설은 우리 문단에서 보기 힘든, 귀기가 번뜩이는 강렬함과 마력적 상상력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쓰는 작품마다 문학상을 수상하고 대중적인 관심을 끌어 모으는 전경린은 지방 도시의 평범한 주부 출신이다. 고향 근처의 지방 대학을 졸업한 후 지방 방송국의 음악담당 객원PD 및 구성작가로 한 3년 일해 봤지만, 학교 시절부터의 꿈이요 존재 이유였던 문학에의 열정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러나 지방에서 문학 수업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1992년의 어느 날, 소설가 김웅이 창원에서 주부들을 위한 문학강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즉각 6개월 코스의 강좌에 등록한 그는 그 기회를 문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으로 보고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실은 문학강좌를 찾기 이전부터, 전경린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되면, 그것을 완전히 `먹어 없애 치울 때까지` 읽고 또 읽어 완전히 소화해 내는, 그래서 더 이상 좋은 작품이라고 느껴지지 않고 그저 무덤덤해질 때까지 빠져 드는 독서 습벽은 전경린의 문학수업에 커다란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한때 시인이었던 남편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다. 1993년 이들 가족은 마산 옆 진양의 외딴 시골로 이사를 갔다. 꽤나 적적한 곳이었지만 여기서 전경린은 `뭔가가 밖으로 표출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3년 가까이 사람들과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들어앉아 많은 글을 써냈다.

어떨 때는 글이 속에서 흘러 넘치는 것을 채 줏어 담을 시간이 없어 녹음기를 켜 놓고 녹음을 하기도 했다. 후에 녹음을 재생시켜 봤더니, 한편에서는 애 우는 소리가 들리고 또 한편에서는 `얼럴러` 하며 애 달래는 소리와 함께 소설의 줄거리를 읊어 대는 전경린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달 정도로 소설 쓰기에 전념한 세월이었다.

여기서 1995년 신춘문예 당선작을 만들어 내 등단에 성공했다. 전경린이라는 필명은 이때 신춘문예에 응모하면서 사용한 것이며, 그의 본명은 안애금이다.

`모든 자유를 가진 것 같지만,원하는 것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즉 우리 사회 여자들의 갇힌 삶이 전경린의 문학적 관심사다. 여성 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많지만, 전경린 문학이 가지는 독특한 성격은 그 강렬함에 있다. 이미지의 강렬함을 통해 잘 지워지지 않는 강한 인상을 남기는 독특한 기법과 상상력은 전경린 문학의 `남과 같지 않음`을 떠받치는 소중한 자산이다.

문학을 하지 않았던 과거는 `물 속에서 숨을 참고 있는 것`처럼 견디기 힘든 고통의 세월이었으며, 글을 쓰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는 전경린은 `결핍된 자`들을 특별히 사랑하며, 그들이 그리워 하는 곳을 문학적 궁구 대상으로 삼고자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