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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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민 시모음

휘수 Hwisu 2008. 6. 19. 09:36

1961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남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집 <꽃들이 딸꾹> 애지 

 

홍어

 

말이 좋아 삭힌 거고 숙성이지 결국은 조금 상한 것 아니겠는가

시들어 꽃답고 늙어 사람답고 막다른 골목이 길답고

 

깨어 헛것일 때 꿈답던 꿈


우리의 한 시절은 모두 비非철에 이루어진다

 

냉동실에 안치된 채 구천을 떠돌고 있는 박봉규씨만 봐도 그렇다

노점공구상 그가 폭력적인 단속에 항의하다 분신, 목숨을 잃자

사람들은 그를 열사라 불렀다 우리 모두 열사가 될 수 있는 시대

 
그는 추리소설의 시작처럼 죽었고 덕분에 살아남은 우리들이 판을 쳤다

 
어둠아, 사람만큼 상한 영혼을 가진 물건이 어딨더냐

죽을똥 살똥 살아도 허구헌 날, 그날이 그날인 사람아

  

오발탄

 
203호에 이사온 그는 총잡이다

그가 쓰는 권총의 방아쇠는

손가락이 아닌 구둣발로 잡아당긴다

문 열어! 탕, 탕, 탕

열리지 않는 문을 향해 쏜 총성은

그의 마누라 귀에만 날아가 박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출입구를 같이 쓰는 열 세대의 모든 귀에 날아가 박힌다

귀를 관통한 총알은

벽에 부딪혀 어지럽게 튕겨나와

아이들의 인형을 쓰러뜨리고

거울을 깨부수고

담뱃재 수북한 재떨이를 날려버릴 것이다

왜 안 열어, 빨리 열란 말이야! 탕, 탕, 탕

이불을 뒤집어쓰고

벽을 향해 돌아눕고

꾸던 꿈을 마저 꾸기 위해 눈을 감는 밤

시끄럽다고, 잠 좀 자자고

방아쇠가 입에 달린 105호 남자, 한 소리 지를 법도 한데

어째 조용하기만 한 밤

총성과 총성사이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깊고 고요한지

드나드는 사람 뻔한 비둘기 맨션

한 번도 본적 없는 203호 사람들

제발 열어, 열란 말이야! 탕, 탕, 탕

들리지 않는 새벽의 총성에

끝내 문은 열리지 않는다

 

맨 처음

 
사과는

사과꽃에 앉은 별의 더듬이가

맨 처음 닿은 곳에서 썩기 시작한다

바람이 스쳐간 곳,

햇볕이 드나들며 단맛이 돌기 시작한 곳,

맨 처음 빗방울이 떨어진 곳,

사과는

먼 기찻길에서 들려온 기적소리,

사과의 귀가 맨 처음 열린 곳에서 썩기 시작한다

 
익어가는 거야,


씨앗을 품고 붉어지기 시작한 곳에서

사과는 썩기 시작한다

썩고 있는 체온으로 벌레를 키워

몸 밖으로의 비행을 꿈꾼다

온 힘을 다해 썩은 사과는

비로소 사과가 된다

 

 
깊은 바다 어딘가에

해를 만드는 대장간이 있다

울렁이는 파도거죽을 들추면

쇳덩이 두들기는 메질소리

불이 괄하게 핀 화덕속에서

방금 꺼낸 시뻘건 쇳덩이 모루에 놓고

어둠 두둘기는 소리 들린다

쩍쩍 금이 가려는 해

풋울음 멈추고 제 울음 찾아 올 때까지

둥근 가장자리 반반해지도록 딤금질한다

맞을만큼 맞아야 빛나는 해

곰망치로 햇살을 편다

단쇠 냄새 뒤엉킨 풀무소리 그치면

나이테를 새긴 방짜해가

수평선 위로 쑤욱 떠오른다

감은 눈에도 새벽은 그렇게 온다 

 

안녕 블라디보스톡

 
혼자서 밤길을 걷는다는 것은

시든 베고니아 꽃보다 슬픈 것

 
보드카로 달래보는 추위는 사랑을 견딜 수 없게 하고

팔짱을 끼고 걷는 어둠은 떠나 버린 연인을 더욱 그립게 한다

 
사랑보다 이기적인 것은 없더라

연인을 좀 더 생각하다 가겠으니 시간 먼저 가라던 노래

 
낯선 곳에 묻어두고 오겠다던 이름아

맹세는 늘 어긋나더라

 
가슴 안 가슴을 가진 러시아 인형들아

영혼은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말 사실이더냐


카페 앞을 서성대던 처녀들이 콜택시를 타고 사라질 때

지상에 닿지 못한 별빛 아래 무표정한 누이보다 쓸쓸해서

시린 손끝에 입김을 불어본다

 

타향아 , 나 잠시 다녀간다

성냥불 같은 이 순간들이 꺼지면

바다 끝에 누가 서있는지 나, 더 이상 묻지 않으마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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