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신경림 시모음 / 우리넷 펌 본문
● 신경림
35년 충북 충주생.
56년 문학예술지에 '낮달' '갈대' 등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 < 농무> <새재> <남한강> <씻김굿> <길> <가난한 사랑노래>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민요연구회 회장, 민족예술인총연합 의장 역임.
신경림 : 갈대
신경림 : 덫
신경림 : 동해바다
신경림 : 자화상
신경림 : 조선족의 달
신경림 : 밤차
신경림 : 초봄의 짧은 생각
신경림 : 세밑에 오는 눈
신경림 : 목계장터
신경림 : 새벽안개
신경림 : 가난한 사랑 노래
신경림 : 파장
신경림 : 遠隔地
신경림 : 겨울밤
신경림 : 경칩
신경림 : 친구여 네 손아귀에
●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덫 : 신경림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는다
벽을 들여 바르고 지붕을 세운다
이렇게 스스로 만든 집에서 한 30년
나는 자못 만족해서
글도 쓰고 책도 읽는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 그 집이
비도 바람도 막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허물 생각을 한다
지붕을 거두고 벽을 턴다
서까래를 치우고 기둥을 들어낸다
그러고는 이 나라를 반 바퀴는 도는
멀고 지루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돌아와 나는 절망한다
기둥도 벽도 형체도 없는 그 집이
오두마니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 동해바다 : 신경림
: 후포에서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
동산만하게 커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보다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 자화상 : 신경림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 조선족의 달 : 신경림
달이 시원스레 옷을 벗었다
첨벙첨벙 수로 속에 들어가 멱을 감는다
가없는 옥수수밭에 바람이 인다
수로에서 나왔지만 옷이 없다
부끄러운 곳 손으로 가리고 초가집을 찾아 들어가 숨는다
달이 초가집 속에 갇혔다
● 밤차 : 신경림
: 신림에서
세상은 온통
크고 높은 목소리만이 덮어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 줄을
가릴 수 없는 세월이 많다
밤차를 탄다
산바람 엉키는 간이역에 내리면
감나무에 매달린 새파란 그믐달
비로소 크고 높은 목소리
귓가에서 걷히면서
작고 낮은 참목소리
서서히 들리기 시작한다
속삭임처럼 흐느낌처럼
멀리서 가까이서 들리기 시작한다
● 초봄의 짧은 생각 : 신경림
: 영해에서
바닷바람은 천리 만리
푸른 파도를 타고 넘어와
늙은 솔숲에서 갈갬질을 치며 놀고
나는 기껏 백 리 산길을 걸어와
하얀 모래밭에
작은 아름다움에 취해 누웠다
갈수록 세상은 알 길이 없고
● 세밑에 오는 눈 : 신경림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등과 가슴에 묻은 얼룩을 지우면서
세상의 온갖 부끄러운 짓, 너저분한 곳을 덮으면서
깨어진 것, 금간 것을 쓰다듬으면서
파인 길, 골진 마당을 메우면서
밝은 날 온 세상을 비칠 햇살
더 하얗게 빛나지 않으면 어쩌나
더 멀리 퍼지지 않으면 어쩌나
솔나무 사이로 불어닥칠 바람
더 싱그럽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창가에 흐린 불빛을 끌어안고
우리들의 울음, 우리들의 이야기를 끌어안고
스스로 작은 울음이 되고 이야기가 되어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어서
● 목계장터 :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새벽 안개 : 신경림
사랑을 배우고
미움을 익혔다
이웃을 만나고 동무를 사귀고
그리고 더 많은 원수와 마주쳤다
헛된 만남 거짓 웃음에 길들여지고
헤어짐에 때로
새 힘이 솟기도 했으나
사랑을 가지고 불을 만드는 대신
미움을 가지고 칼을 세우는 법을
먼저 배웠다
법석대는 장거리에서
저무는 강가에서
이제 새롭게 외로움을 알고
그 외로움으로
노래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그 노래로 칼을 세우는 법을 배우고
그 칼을 가지고
바람을 재우는 법을 배운다
새벽 안개 속에서
다시 강가에서
● 가난한 사랑 노래 : 신경림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 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던 내 등뒤에서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파장(罷場) :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遠隔地 : 신경림
박서방은 구주에서 왔다 김형은 전라도
어느 바닷가에서 자란 사나이.
시월의 햇살은 아직도 등에 따갑구나.
포장친 목로에 들어가
전표를 주고 막걸리를 마시자.
이제 우리에겐 맺힌 분노가 있을
뿐이다. 맹세가 있고 그리고 맨주먹이다.
느티나무 아래 자전거를 세워 놓은
면서기 패들에게서 세상 얘기를 듣고.
아아 이곳은 너무 멀구나, 도시의
소음이 그리운 외딴 공사장.
오늘밤엔 주막거리에 나가 섰다를
하자 목이 터지게 유행가를 부르자.
사이렌이 울면 밥장수 아주머니의
그 살찐 엉덩이를 때리고 우리는
다시 구루마를 밀고 간다.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밀린 간조날을
꼽아 보고 건조실 앞에서는 개가
짖어 댄다 고추 널린 마당가에서
동네 아이들이 제기를 찬다. 수건으로
볕을 가린 처녀애들은 킬킬대느라
삼태기 속의 돌이 무겁지 않고
십장은 고함을 질러 대고. 이 멀고
외딴 공사장에서는 가을 해도 길다.
● 겨울밤 : 신경림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 경칩 : 신경림
흙 묻은 속옷 바람으로 누워
아내는 몸을 떨며 기침을 했다.
온종일 방고래가 들먹이고
메주 뜨는 냄새가 역한 정미소 뒷방.
십촉 전등 아래 광산 젊은 패들은
밤 이슥토록 철 늦은 섰다판을 벌여
아내 대신 묵을 치고 술을 나르고
풀무를 돌려 방에 군불을 때고.
볏섬을 싣고 온 마차꾼까지 끼어
판이 어울어지면 어느새 닭이 울어
버력을 지러 나갈 아내를 위해 나는
개평을 뜯어 해장국을 시키러 갔다.
경칩이 와도 그냥 추운 촌 장터.
전쟁통에 맞아 죽은 육발이의 처는
아무한테나 헤픈 눈웃음을 치며
우거지가 많이 든 해장국을 말고.
● 친구여 네 손아귀에 : 신경림
1
창돌애비가 죽던 날은 된서리가 내렸다
오동잎이 깔린 기름틀집 바깥마당
그 한귀퉁에 그의 시체는 거적에 싸여 뒹굴고
그의 아내는 그 옆에 실신해 누웠다
창돌이와 나는 팽이를 돌렸다
무서워서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싸전 마당에서 저물도록 팽이만 돌렸다
2
소줏잔을 거머쥔 네 손아귀에 친구여
날카로운 칼날이 숨겨져 있음을 나는 안다
상밥집에서 또는 됫술집에서 다시 만났을 때
네 눈 속에 타고 있는 불길을 나는 보았다
네 편이다 아무리 우겨대도
믿지 않는 네 어깨짓을 나는 보았다
거적에 싸인 시체 위에 떨어지던 오동잎
친구여 나는 보았다
35년 충북 충주생.
56년 문학예술지에 '낮달' '갈대' 등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 < 농무> <새재> <남한강> <씻김굿> <길> <가난한 사랑노래>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민요연구회 회장, 민족예술인총연합 의장 역임.
신경림 : 갈대
신경림 : 덫
신경림 : 동해바다
신경림 : 자화상
신경림 : 조선족의 달
신경림 : 밤차
신경림 : 초봄의 짧은 생각
신경림 : 세밑에 오는 눈
신경림 : 목계장터
신경림 : 새벽안개
신경림 : 가난한 사랑 노래
신경림 : 파장
신경림 : 遠隔地
신경림 : 겨울밤
신경림 : 경칩
신경림 : 친구여 네 손아귀에
●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덫 : 신경림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는다
벽을 들여 바르고 지붕을 세운다
이렇게 스스로 만든 집에서 한 30년
나는 자못 만족해서
글도 쓰고 책도 읽는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 그 집이
비도 바람도 막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허물 생각을 한다
지붕을 거두고 벽을 턴다
서까래를 치우고 기둥을 들어낸다
그러고는 이 나라를 반 바퀴는 도는
멀고 지루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돌아와 나는 절망한다
기둥도 벽도 형체도 없는 그 집이
오두마니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 동해바다 : 신경림
: 후포에서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
동산만하게 커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보다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 자화상 : 신경림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 조선족의 달 : 신경림
달이 시원스레 옷을 벗었다
첨벙첨벙 수로 속에 들어가 멱을 감는다
가없는 옥수수밭에 바람이 인다
수로에서 나왔지만 옷이 없다
부끄러운 곳 손으로 가리고 초가집을 찾아 들어가 숨는다
달이 초가집 속에 갇혔다
● 밤차 : 신경림
: 신림에서
세상은 온통
크고 높은 목소리만이 덮어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 줄을
가릴 수 없는 세월이 많다
밤차를 탄다
산바람 엉키는 간이역에 내리면
감나무에 매달린 새파란 그믐달
비로소 크고 높은 목소리
귓가에서 걷히면서
작고 낮은 참목소리
서서히 들리기 시작한다
속삭임처럼 흐느낌처럼
멀리서 가까이서 들리기 시작한다
● 초봄의 짧은 생각 : 신경림
: 영해에서
바닷바람은 천리 만리
푸른 파도를 타고 넘어와
늙은 솔숲에서 갈갬질을 치며 놀고
나는 기껏 백 리 산길을 걸어와
하얀 모래밭에
작은 아름다움에 취해 누웠다
갈수록 세상은 알 길이 없고
● 세밑에 오는 눈 : 신경림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등과 가슴에 묻은 얼룩을 지우면서
세상의 온갖 부끄러운 짓, 너저분한 곳을 덮으면서
깨어진 것, 금간 것을 쓰다듬으면서
파인 길, 골진 마당을 메우면서
밝은 날 온 세상을 비칠 햇살
더 하얗게 빛나지 않으면 어쩌나
더 멀리 퍼지지 않으면 어쩌나
솔나무 사이로 불어닥칠 바람
더 싱그럽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창가에 흐린 불빛을 끌어안고
우리들의 울음, 우리들의 이야기를 끌어안고
스스로 작은 울음이 되고 이야기가 되어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어서
● 목계장터 :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새벽 안개 : 신경림
사랑을 배우고
미움을 익혔다
이웃을 만나고 동무를 사귀고
그리고 더 많은 원수와 마주쳤다
헛된 만남 거짓 웃음에 길들여지고
헤어짐에 때로
새 힘이 솟기도 했으나
사랑을 가지고 불을 만드는 대신
미움을 가지고 칼을 세우는 법을
먼저 배웠다
법석대는 장거리에서
저무는 강가에서
이제 새롭게 외로움을 알고
그 외로움으로
노래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그 노래로 칼을 세우는 법을 배우고
그 칼을 가지고
바람을 재우는 법을 배운다
새벽 안개 속에서
다시 강가에서
● 가난한 사랑 노래 : 신경림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 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던 내 등뒤에서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파장(罷場) :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遠隔地 : 신경림
박서방은 구주에서 왔다 김형은 전라도
어느 바닷가에서 자란 사나이.
시월의 햇살은 아직도 등에 따갑구나.
포장친 목로에 들어가
전표를 주고 막걸리를 마시자.
이제 우리에겐 맺힌 분노가 있을
뿐이다. 맹세가 있고 그리고 맨주먹이다.
느티나무 아래 자전거를 세워 놓은
면서기 패들에게서 세상 얘기를 듣고.
아아 이곳은 너무 멀구나, 도시의
소음이 그리운 외딴 공사장.
오늘밤엔 주막거리에 나가 섰다를
하자 목이 터지게 유행가를 부르자.
사이렌이 울면 밥장수 아주머니의
그 살찐 엉덩이를 때리고 우리는
다시 구루마를 밀고 간다.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밀린 간조날을
꼽아 보고 건조실 앞에서는 개가
짖어 댄다 고추 널린 마당가에서
동네 아이들이 제기를 찬다. 수건으로
볕을 가린 처녀애들은 킬킬대느라
삼태기 속의 돌이 무겁지 않고
십장은 고함을 질러 대고. 이 멀고
외딴 공사장에서는 가을 해도 길다.
● 겨울밤 : 신경림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 경칩 : 신경림
흙 묻은 속옷 바람으로 누워
아내는 몸을 떨며 기침을 했다.
온종일 방고래가 들먹이고
메주 뜨는 냄새가 역한 정미소 뒷방.
십촉 전등 아래 광산 젊은 패들은
밤 이슥토록 철 늦은 섰다판을 벌여
아내 대신 묵을 치고 술을 나르고
풀무를 돌려 방에 군불을 때고.
볏섬을 싣고 온 마차꾼까지 끼어
판이 어울어지면 어느새 닭이 울어
버력을 지러 나갈 아내를 위해 나는
개평을 뜯어 해장국을 시키러 갔다.
경칩이 와도 그냥 추운 촌 장터.
전쟁통에 맞아 죽은 육발이의 처는
아무한테나 헤픈 눈웃음을 치며
우거지가 많이 든 해장국을 말고.
● 친구여 네 손아귀에 : 신경림
1
창돌애비가 죽던 날은 된서리가 내렸다
오동잎이 깔린 기름틀집 바깥마당
그 한귀퉁에 그의 시체는 거적에 싸여 뒹굴고
그의 아내는 그 옆에 실신해 누웠다
창돌이와 나는 팽이를 돌렸다
무서워서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싸전 마당에서 저물도록 팽이만 돌렸다
2
소줏잔을 거머쥔 네 손아귀에 친구여
날카로운 칼날이 숨겨져 있음을 나는 안다
상밥집에서 또는 됫술집에서 다시 만났을 때
네 눈 속에 타고 있는 불길을 나는 보았다
네 편이다 아무리 우겨대도
믿지 않는 네 어깨짓을 나는 보았다
거적에 싸인 시체 위에 떨어지던 오동잎
친구여 나는 보았다
'OUT > 詩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도현 시모음 (0) | 2006.03.10 |
---|---|
이중기 시모음 (0) | 2006.03.10 |
강연호 시모음 / 우리넷 펌 (0) | 2006.02.27 |
[스크랩] 안도현 시모음 3 (0) | 2006.02.23 |
안도현 시모음 2 (0) | 2006.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