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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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시모음 / 우리넷 펌

휘수 Hwisu 2006. 2. 27. 13:07
● 강연호  시모음

1962년 대전 출생
고려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9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당선으로 등단
시집 비단길,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등

강연호 : 편지
강연호 : 저녁에
강연호 : 음악
강연호 : 月蝕
강연호 : 별똥에 매달린 실오라기 한 끝
강연호 : 9월도 저녁이면
강연호 : 12월
강연호 : 저 별빛
강연호 : 비단길 1
강연호 : 세월의 담장


● 편지 : 강연호

나의 겨울에도 그대는 늘 피어 있습니다
어디선가 한 올씩 실타래 푸는 소리 들려와
내다보니 조무래기 눈발 날리더군요
얼른 생각하기에는 처마 밑에서 떨고 있을
겨울새는 어떻게 몸 녹일까 궁금해졌지만
마음 시리면 잔걱정 늘게 마련이지요
하다못해 저 눈발도 마른 자리 골라 쌓이는데
그러고 보니 월동준비 튼튼하다고 해서
겨울살이 따뜻한 게 아니더군요
해 바뀌면 산에 들에 다시 꽃피는 거야
오랜 습관 바꿀 줄 모르는 자연법인데
그래도 무슨 꽃불 지필 일 있다고 노상
새 봄이 오면, 새 봄이 오면
기다림을 노래하는 사람들만 따뜻해 보였어요
생각 덮으러 끌어당기는 이불 적막한
나의 겨울에도 그대는 늘 피어 있습니다
기다려봐야 내가 피워낼 꽃은
천지사방 없는 봄인데, 그대는 여태 먼데
채 지나지 않은 세밑 달력이나 미리 찢어내고
오래 어이없었어요 조무래기 눈발 그쳐도
실타래 푸는 소리 여전한 건
실타래 푸는 소리 여전한 건
그대 향한 마음 한 올씩 풀어지기 때문이지요


● 저녁에 : 강연호

양지 쪽으로 목을 들이밀던 식물들이
쓸쓸히 하품을 하다 이가 빠졌다
식탁 위 행주가 휘휘 불러모으는 어둠 속
누이는 순정 만화에 울다 지쳐
밥물 끓어 넘치는 줄도 모르고 잠들고
아직 애인 없는 누이의 꿈길을 대신 걸어보려
나는 문득 집을 나서기도 하였다
지난 여름이 끌어다 놓은 포플러 행렬을 따라
뉘엿뉘엿 언덕을 오르는 레미콘 트럭이
저기 만삭의 배를 움켜잡고 뒤뚱거리고 있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저 트럭을 밀어주는 일 같아
마음조차 회임한 듯 입덧 심하게 흔들리면
이빨 모지라진 꽃들이
황급히 울음 삼킨 표정을 감추고 있었다
그만 이쯤에서 주저앉아 몸풀고 싶은
오늘, 핑도는 저녁이었다


● 음악 : 정대에게 : 강연호

그때 음악과 시가 있는 한
영원한 청춘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우리가 쏘다녔던
골목과 천변은 빛났던가
아니 한 장의 나뭇잎조차 빛나지 않았다
우리가 빛이었으므로
가슴 근처에 잡히는 방울은
울음이 아니라 곧 음악이라고 생각했었다
하기는 울음이 곧 음악 아닌 적 있었던가
다만 슬프지도 격렬하지도 않을 뿐이야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시를 썼고
그래서 한 번도 청춘인 적 없었다
진작부터 붉은 오늘이었다
지나가는 말로 묻는 안부처럼
무심한 듯 갑자기 가슴을 치는 것
음악이란 그런 것이다


● 月蝕 : 강연호

오랜 세월 헤매다녔지요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대 찾아
부르튼 생애가 그믐인 듯 저물었지요
누가 그대 가려 놓았는지 야속해서
허구한 날 투정만 늘었답니다
상처는 늘 혼자 처매어야 했기에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흐느낌
내가 우는 울음인 줄 알았구요

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
그대 가린 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니요
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울고 있었다니요


● 별똥에 매달린 실오라기 한 끝 : 강연호

별똥이 지고
별똥에 매달렸던 실오라기 한 끝도 사라진다
그 끝을 놓치지 않으려 소년은 깨금발을 한다
붙잡아 쥐불놀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어두운 하늘에 녹슨 못처럼 박혀 있는 별들
늦은 식탁의 찬밥은 더욱 거칠고
바람은 덜컹거리며 불어온다
생각하면 저 별똥
실오라기 한 끝이 눈에 들기까지 필요했을
몇 억 광년의 인연이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다
그 순식간의 기억을 아프게 기억한다
그가 깨놓고 도망친 유리창으로
지금도 바람이 새어드는 집
그가 날려 보낸 종이비행기가 여전히
불시착해 있는 지붕
막막해지면 기대 울던 그 때처럼
기울어진 담벼락은 그의 등을 따뜻이 받쳐줄까
겨우 딱지 얹힌 기억의 상처를
죄다 뜯어내며 그는 운다
어둠은 그 속에서 바싹 말라가고 있다
어쩌면 그 집을 자꾸 돌아보던 소년은 아직
거기 손 흔들고 서 있을지 모른다
실오라기 한 끝의 인연에 매달려 있을지 모른다


● 9월도 저녁이면 : 강연호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 12월 : 강연호

그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마른 삭정이 긁어 모아 군불 지피며
잊으리라 매운 다짐도 함께 쓸어 넣었지만
불티 무시로 설마 설마 소리치며 튀어올랐다
동구 향한 봉창으로 유난히 풍설 심한 듯
소식 갑갑한 시선 흐려지기 몇 번
너에게 가는 길 진작 끊어지고 말았는데
애꿎은 아궁지만 들쑤시며 인편 기다렸다
내 저어한 젊은 날의 사랑
눈 내리면 어둠도 서두르고 추억도 마찬가지
멀리 지친 산빛깔에 겨워 자불음 청하는
불빛 자락 흔들리며 술기운 오르던 허전한 날
잊어라 잊어라 이 숙맥아, 쥐어박듯이
그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 저 별빛 : 강연호

그리움도 버릇이다 치통처럼 깨어나는 밤
욱신거리는 한밤중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지친다 더 이상 감추어둔 패가 없어
자리 털고 일어선 노름꾼처럼
막막히 오줌을 누면 내 삶도 이렇게 방뇨되어
어디론가 흘러갈 만큼만 흐를 것이다
흐르다 말라붙을 것이다 덕지덕지 얼룩진
세월이라기에 옷섶 채 여미기도 전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구겨버릴 테지만
지금은 삼류 주간지에서도 쓰지 않는 말
넘지 못할 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너에게
가고 싶다 빨래집게로 꾹꾹 눌러놓은
어둠의 둘레 어디쯤 너는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마음은 늘 송사리떼처럼 몰려다니다가
문득 일행을 놓치고 하염없이 두리번거리는 것

저 별빛 새벽까지 욱신거릴 것이다


● 비단길 1 : 강연호

내 밀려서라도 가야 한다면
이름만이로라도 아름다워야지 비단길
허나 지나는 마음 쓸쓸하여 영 자갈밭일 때
저기 길을 끌어가는 덤불숲 사이로
언뜻 몸 감추는 세월의 뒷모습 보인다
저렇게 언제나 몇 걸음 앞서 장난치며
어디 헛디뎌봐 유혹하는
허방이여, 온다던 사람 끝내 오지 않아서
기어이 찾아나선 마음 성급하다 발 거는 걸까
잠시 허리 굽혀 신발끈이나 고쳐 매면
흐린 물둠벙에 고인 행색
더는 고쳐 맬 수 없는 생애가 엎드려 있다
앞서거나 뒤쳐지는 게 운명이라서
대상의 행렬은 뽀얀 먼지 속에서 유유한데
비단길, 미끄러운 아름답게 나를 넘어뜨릴 때
어디 經을 외며 지나는 수도승이라도 있어
저런 조심해야지, 일으켜주며 세상 응진
온전히 털어내는 법 가르쳐줄까
물음표처럼 휘어진 등뼈 곧추세울수록
먹장구름은 다시 우르르 몰려와 기우뚱거린다
지나가는 저 빗발 긋는 동안이라도
내 멈춰서지 못하는 건 영영 모래기둥으로 변할
몇천 년의 전설 두렵기 때문이 아니다
밀려서라도 가야 할 인연의 사슬
질기니 이름만이라도 아름다워야지 비단길
얽힌 마음 다잡고 걷다 보면
길 잘못 들었다며 앞을 기로막는 이정표조차
그렇게 정답고 눈물나는 것을


● 세월의 담장 : 강연호

세월의 긴 담장을 끼고 걸었습니다
어두워지며 멀리에 가까이에
사람들이 키운 불빛 흐느끼고
그때마다 구두 뒤축 쓸쓸한 끌림처럼
한 세상 아득하게 저물었습니다

사는 일이 도무지 외도만 같아
돌아갈 곳 있으려니 생각했습니다
고단함 접고 따듯하게 몸 풀며
다 지나간 얘기야
도란거릴 수 있으려니 믿었습니다

제가 너무 만만하게 여겼나요
숨차고 지쳐 그만 주저앉고 싶은데
한사코 담장은 끝날 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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