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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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화양연화

휘수 Hwisu 2006. 3. 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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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花樣年華)


닿을 듯 말 듯 움츠린 채 스치고 지나가는....


어느 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우연히 (언제나 그랬듯이) 같은 아파트의 이웃으로 이사를 옵니다. 심상한 마주침을 거듭하던 그들은 각자의 배우자끼리 불륜의 관계에 있다는 걸 알게되고 가슴 시린 공감 속에서 예기치 않게도 혹은 의도치 않게도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듭니다. 처음부터 위기이고 나락이고 회환인 사랑입니다.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이 남자, 한 번도 시원하게 속내를 드러내지도 못하고 조심스러운 고백과 망설이며 주저하던 손길과 갈망하는 눈빛을 뒤로한 채 쓸쓸하게 이 사랑을 떠나갑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남자는 앙코르와트 사원의 구멍난 벽에 자신의 그 ‘속울음만 길게 길게 삼켜야 했던 외로운 사랑’을 비밀로 다스려 묻습니다.


이 무슨 고리타분하고 진부찬란한 사랑타령이냐구요?

속단은 이릅니다. 상대는 사랑학의 대가 왕가위니까요.


지난 세기에 21세기적인 감각적이고 현란한 테크닉을 구사하며 가히 ‘왕가위 스타일’이라 명명할만한 영상미학을 선보였던 왕가위는 이 신세기에 느닷없이 (아비정전) 분위기로 돌아와 아주 느리고 여유 있는, 그리고 시적인 화면 호흡으로 60년대의 홍콩에서의 수줍은 사랑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왕가위는 두 사람의 사랑을 사건 속에서가 아니라 분위기 속에서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in the mood for love입니다)


둘이 사는 남루한 아파트의 정교한 무늬의 벽지, 슬로모션으로 오래도록 잡아내는 계단을 올라가는 여자의 뒷모습, 꽃무늬가 우아하게 수놓인 고급스런 중국식 드레스에 감긴 그녀의 바스러질 것 같은 섬세한 자태,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묘하게 튀는 보온병, 그럴 때마다 흘러나오는 마주르카 곡, 창문에 비치는 여자의 실루엣, 전화기를 잡는 여자의 주저하는 손, 전화기를 내려놓는 남자의 한숨 가득한 담배연기, 화면을 덮는 시계, 비 오는 창가, 남자가 여자를 기다리는 골목에 내리던 그 세찬 비, 여자가 잡는 손을 뿌리치는 남자의 손, 또각거리며 호텔의 긴 복도를 걷는 하이힐, 두 남녀가 함께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각자의 뒷모습으로 끝나는 씬, 둘이 함께 있을 때 그들을 감싸고 있는 몽환적이고 에로틱한 공기....


정말이지 이런 현기증 나는 이미지의 향연은 스토리와는 무관하게 60년대 홍콩의 마력적으로 아름다운 감각의 총화일 것입니다.


왜 하필 앙코르와트냐는 기자의 물음에 왕가위는 “앙코르와트는 시대가 없는 곳이란 점, 그리고 시간의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 곳이어서 좋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 영원한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인지 왕가위는 이제는 사라져 가는, 가장 아름다웠던 홍콩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아쉬움과 애련함을 이 영화 속에다 봉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두 사람의 지리하고 답답한 일상을 되풀이하며 보여주는 그의 화면은 너무도 나른하고 아득해서 질식할 듯한 느낌을 주지만, 묘하게도 그렇기에 더욱더 우리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흡인력이 있지요. 그 속에서 남자와 여자는 좁은 실내에서, 아파트 계단에서, 집 앞 골목에서 어깨를 움츠리며 닿을 듯 말 듯 스쳐 지나감을 되풀이하며 서로에 대한 갈망을 키워나가지요. 스쳐감의 반복으로 사랑을 그려내는 그는 결국은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짧은 순간이 사랑의 전부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요? ‘격정의 마음을 숨긴 채 심상한 눈빛을 가장하고 움츠리며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의 숨 막히는 떨림’ 이외에 사랑에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런지요.


이른바 꽃의 자태와 같이 화려한 나날들 花樣年華. 이 영화에서 ‘화양연화’란 노래가 흘러나올 때 둘은 이별을 예감하고 잇대어 있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각자 처연한 얼굴로 앉아있지요. 한 발만 나서면 만날 수 있는데, 만나서 흐드러지게 안을 수 있는데 그들은 그대로 품위 있게 외롭기를, 우아하게 불행하기를 택하지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함께 도망가거나 헤어져 각자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 밖에는 없겠지요. 그들은 외로움을 택한 댓가로 영원한 사랑을 얻게 되는 건가요.


"내가 같이 가자고 하면 같이 가 줄 건가요?" 그녀는 그의 이 전화를 받지 않지요.

"내 옆에 자리가 남아있다면, 내게로 와 줄 건가요?"그는 그녀의 이 말을 듣지 못한 채 떠나가지요.

끝내 운명은 이렇게 그들을 비껴가지요.

애초에 왕가위는 이루어짐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지요. 일상의 권태와 시간의 풍화작용으로 사랑이란 것도 결국은 마멸되고 그 가치가 마비된다는 것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지요.

영원은 성취가 아니라 쓰라린 엇갈림속에 깃들인다는 것, 그리고 영원은 실현되지 못한 소망을 현재의 소원으로 다스려 묻는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싶은 걸까요?


덧붙여서

 

1. 왕가위의 영화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음악이지요.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음악은 ‘Yumeji's theme'인데 일본의 스즈키 세이준(鈴木淸順)감독의 91년도 작품 (유메지(夢二)에 나왔던 곡입니다. 그리고 냇킹콜의 ’Quizas, Quizas, Quizas'도 몇 번이고 흐르지요. 왕가위의 엄마가 냇킹콜을 아주 좋아했다고 해요.


2. 전작들에서 흔히 사용하던 내래이션 대신에 이 영화는 시작과 끝에 자막을 짧게 처리했지요. 마지막 자막은 ‘과거는 그가 쳐다볼 수 있되 잡을 수 없는 것 이었다’입니다.

 

3. 애초부터 감독은 양조위와 장만옥을 염두에 두고 인물을 만들었다고 하지요. 이 두 사람은 중년의 쓸쓸한 내면을 더할 수 없이 절제되고 섬세하게 조율된 연기로 그려내고 있지요. 2000년 깐느는 양조위에게 동양인에게는 처음으로 남우주연상을 안깁니다.








출처 : 숨어 있기 좋은 방
글쓴이 : tang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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