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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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장골 시편<`작가`지가 선정한 가장 좋은 시>김신용

휘수 Hwisu 2007. 6. 30. 00:34
 

     도장골 시편 - 폐가 앞에서

 

         

폐가 앞에 서면, 문득  풀들이 묵언 수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떠올릴   말 있으면 풀꽃 한 송이  피워 내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람  떠나 버려진 것들 데리고, 마치 부처의 고행상처럼

뼈만 앙상해질 때까지 견디고 있는 것 같은 풀들

인적 끊겨 길 잃은 것들, 그래도 못난이 부처들처럼

세월을 견디는 그것들을 껴안고, 가만히 제 집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흙벽 무너지고 덩쿨풀 우거진 폐가,

사람살이 떠난 풍화에 몸 맡긴 집,

그 세월 의 무게 못 견뎌 문짝 하나가 떨어져도, 제  팔 하나 뚝 떼어주고

홀로 뒹구는 장독대의 빈 항아리, 마치 소신공양하듯 껴안고 등신불이 되는

풀들, 그렇게 풀들의 집으로 고요히 돌아가고 있는 폐가,

 

그 폐가  앞에 서면

마치 풀들이, 설산 고행을 하듯 모든 길 잃은 것들 데리고 귀향하는 것 같을 때 있다

풀의 집은 풀이듯 데려와, 제 살의 흰죽 떠먹이고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도장골 시편 -부빈다는 것

안개가
나뭇잎에 몸을 부빈다
몸을 부빌 때마다 나뭇잎에는 물방울들이 맺힌다
맺힌 물방울들은 후두둑 후둑 제 무게에 겨운 비 듣는 소리를 낸다
안개는, 자신이 지운 모든 것들에게 그렇게 스며들어
물방울을 맺히게 하고, 맺힌 물방울들은
이슬처럼, 나뭇잎들의 얼굴을 맑게 씻어준다
안개와
나뭇잎이 연주하는, 그 물방울들의 和音,
강아지가
제 어미의 털 속에 얼굴을 부비듯
무게가
무게에게 몸 포개는, 그 불가항력의
표면장력,
나뭇잎에 물방울이 맺힐 때마다, 제 몸 풀어 자신을 지우는
안개,
그 안개의 粒子들
부빈다는 것

이렇게 무게가 무게에게 짐 지우지 않는 것

나무의 그늘이 나무에게 등 기대지 않듯이

그 그늘이 그림자들을 쉬게 하듯이
 
 
 
    도장골 시편 - 민달팽이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잎사귀 덮개를 빠져나가 버린다

   치워라, 그늘!
 

 

 

     도장골 시편 - 넝쿨의 힘

 

집 앞, 언덕배기에 서 있는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렸다

언덕 밑 밭 둔덕에 심어 놓았던 호박의 넝쿨이, 여름 내내 기어올라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더니

잎 지고 나니,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 오른 넝쿨의 궤적이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무거운 짐 지고 飛階를 오르느라 힘겨웠겠다. 저 넝쿨

늦가을 서리가 내렸는데도 공중에 커다랗게 떠 있는 것을 보면

한여름 내내 모래자갈 져 날라 골조공사를 한 것 같다.

호박의 넝쿨

땅바닥을 기면 편안히 열매 맺을 수도 있을 텐데

밭 둔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얹어 놓을 수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 위의 가지에 아슬아슬 매달아 놓았을까? 저 호박의 넝쿨

그것을 보며 얼마나 공중정원을 짓고 싶었으면―, 하고 비웃을 수도 있는 일

허공에 덩그러니 매달린 그 사상누각을 보며, 혀를 찰 수도 있는 일

그러나 넝쿨은 그곳에 길이 있었기에 걸어갔을 것이다

낭떠러지든 허구렁이든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갔을 것이다

모랫바람 불어, 모래 무덤이 생겼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생기는 사막을 걸어 간 발자국들이

비단길을 만들었듯이

그 길이, 누란을 건설했듯이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가, 저렇게 허공 중에 열매를 매달아 놓았을 것이다. 저 넝쿨

가을이 와, 자신은 마른 새끼줄처럼 쇠잔해져 가면서도

그 끈질긴 집념의 집요한 포복으로, 불가능이라는 것의 등짝에

마치 달인 듯, 둥그렇게 호박 한 덩이를 떠올려 놓았을 것이다

오늘, 조심스레 사다리 놓고 올라가, 저 호박을 따리

오래도록 옹기그릇에 받쳐 방에 장식해두리, 저 기어가는 것들의 힘

 

 

 

    도장골 시편 -겨울의 눈

 

      

 빈 마당에 개 한 마리가 생겼다

사람만 보면 몸을 부비는 선한 눈망울의 맹인 안내견

먼저 살던 집 주인이 잠시 맡겨두고 간 것

시각 장애인 안내 훈련을 받다 머리가 나빠 퇴출된 녀석

어려서부터 사람과 함께 생활을해와서인지

마당에 놓아두면 거실 유리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유리창에 사람의 그림자만 비쳐도 반가운듯 꼬리를 흔든다

그것이 귀찮아 마당가의 모과나무  밑둥에 목줄을 매어 놓았더니

멀거니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눈만 껌벅거린다

벌써 立冬 지나 잎 다 떨군 모과나무

빈 가지에 듬성듬성 익어있는 모과열매

잎 다 졌는데도 떨어질 줄 모르고 가지에 매달려 있다

그 가지에 얼마나 더 머물러야 체념을 떨구어 내릴까

차가와진 바람과 햇빛에 노랗게 익은 열매를 더 짙게 물들이는

모과, 공중에 멍하니 떠 있는 개의 눈빛과 닮았다

모과도 사람의 눈에 띄어야 더 익어가는 것인지

마지막 남은 가을의 잔빛이 굽은 등을 덮어도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서리 내린 듯 흰 눈자위를  드러내는

눈빛 같은 모과

그러나 사람의 손이 못미치는 까마득한 높이에 달려 있어서

창 밖으로, 그저 무심히 바라보기만 하는 내 시선 앞에서

눈 껌벅이는 맹인 안내견과 함께 구부정히 서 있는 모과나무 

그 선한 눈망울이 겹칠 때마다, 모과는 익어 곧 떨어질 듯 그렁거린다

그렇게 모과가 익어가는 눈빛 속에 겨울의 마당은 더 깊어진다

 

 

 

   섬말에서

 

갈대밭이었습니다
갈대 셋이 몸 엮어 서 있었습니다
둘은 넘어지기 쉬우니 셋이 기둥 버티고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누가 그것을 눈물의 집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눈물로 벽돌 쌓은 집이 아니라고 고개 갸우뚱 하겠습니까
마치 솥 정(鼎)자처럼 갈대 엮인 그곳에 조그만 새의 집이 지어져 있었습니다
뻘흙을 물고 날라 갈대잎 촘촘히 침 섞어 놓은
작은 새의 집이 지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간장 종지만한 작은 흙집에, 쬐그만, 아기 손톱 만치 쬐그만
새의 알이 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새의 알을 갈대 셋이서 품고 서로 몸 엮어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전신으로 서로가 서로를 버팅기면서
바람 속에서, 서로가 몸 부대껴 버텨내면서
안간힘으로 품고 있는 정말 간장 종지만한 새집 속의 새알 한 알
그것을 어찌 빛나는 눈물방울이라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솥 정(鼎)자 속에 담겨진 빛나는 눈이라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작은 새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갈대도 셋이 엮이면 기둥이 된다는 것을
바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집이 된다는 것을
갈대밭이었습니다
모두가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벌판이었습니다

 

 

 김신용

 

1945년 부산 출생. 1988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기록],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장편소설 [달은 어디에 있나 1.2], [기계앵무새] 등이 있음. 천상병문학상, 노작문학상 받음.

 

 

  도서출판 ‘작가’는 14일 시인 평론가 편집인 등 150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발표된 시편 가운데 가장 좋은 시를 설문 조사한 결과 김신용 시인의 ‘도장골 시편-넝쿨의 힘’이 20회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작가’는 김신용 시인의 이 작품은 “내면과 현실의 지극한 싸움의 기록이기도 한 이 시편은 소멸과 폐허를 뛰어넘어 새로운 정신적 지경을 열어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자연 속에서 씌어진 이 시집의 전반적 정서가 자연친화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시편들의 세계가 자연과 인간과의 교감을 과장하여 자연을 주체의 손쉬운 감정이입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자연 자체에 절대적 가치 우위를 부여하여 그것을 미학적 반성 없이 무조건적인 인간적 교훈의 대상으로 삼는 상투적 서정주의를 택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전적인 교감이라고도, 냉정한 관조라고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 시집은 주체와 자연 대상 간에 거리감각이라고 할 만한 어떤 것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함돈균, '어느 지게꾼의 시적 귀향', <현대시학>, 2007.6.

출처 : e 시인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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