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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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학 시모음

휘수 Hwisu 2006. 12. 5. 21:38

1955년 경북 영천에서 출생
경북대학 치과대를 졸업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김달진문학상·대구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얼음시집」「살레시오네 집」「푸른빛과 싸우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모슬포 가는 까닭
- 제주시편 1

 

나 할 말조차 앗기면 모슬포에 누우리라
뭍으로 가지 않고 물길 따라 모슬포 고요가 되리
슬픔이 손 벋어 가리킨 곳
모슬포 길들은 비명을 숨긴 커브여서
집들은 파도 뒤에서 글썽인다네
햇빛마저 희고 캄캄하여 해안은
늙은 말의 등뼈보다 더 휘어졌네
내 지루한 하루들은 저 먼 뭍에서 따로 진행되고
나만 홀로 빠져나와 모슬포처럼 격해지는 것
두 눈은 등대 불빛에 빌려 주고
가끔 포구에 밀려드는 눈설레 앞세워 격렬비도의
상처까지 생각하리라


산벚나무가 씻어낸다

 

다 팽개치고 넉장거리로 눕고 싶다면
꽃핀 산벚나무의 솔개그늘로 가라
빗줄기가 먼저 꽂히겠지만
마음 구부리면 빈 틈이 생기리라
어딘들 곱밉든 군식구가 없겠니
그곳에도 두 가닥 기차 레일 같은 운명을 종일 햇빛이 달구어내지
먼저 온 사람은 나무둥치에 파묻혀 편지를 읽는다
風磬이 소리내는 건 산벚나무도 속삭일 수 있다네
달빛이나 바람이 도와주지만
올해 더욱 가난해진 산벚나무家

울어라 울어라, 꽃핀 산벚나무가 씻어내는 아우성
봄비가 준비된 밤이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수로(水路)를 따라 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 주네
결코 눈뜨지 말라
지금 한 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
는 이 숲은
나비떼 가득 찬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눈뜨면 여느 나비와 다름없이
그는 소리 내지 않고도 운다네
그가 내 얼굴 만질 때
나는 새 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가시연꽃

 

 당신은 가시처럼 아픔의 방향으로만 간다
 몸과 꽃에 돋은 가시연꽃의 가시를
 당신이란 말로 바꾸면
 연꽃이나 당신은 생략되고
 알몸에 꽂힌 가시만 남는다
 그리움만 남는다 
 
은해사 길

 

사월이면 은해사 햇빛 따라간다
눈 희미한 어머니 절마을까지
희고 붉은 복숭아꽃밭, 눈이 부셔
눈부셔 돌아가신 아버지 따뜻하다
눈물 아니면 적막이 사월을 떠밀리라
어둔 각시붓꽃 초록빛과 어울리고
아지랑이 사월 아지랑이 사월이면
극락전가지 타박타박 걸어간다

 
평정을 잃으면 소리를 낸다
 
1

강물이 합수하기 전 큰소리 낸다
철로와 길과 강물이 함께 가면서
먼저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상류에서 너가 기어이 강폭을 좁히기 때문이다
은결든 너는 폭포와 살여울을 실어보낸다
기우뚱 강이 난간을 놓치고
돌아갈 길 할퀴면서 비가 온다
이미 산그림자를 베어문 물살이 거칠다
너가 거슬러가면 강물은 급하고 높아진다
너와 부딪친 물굽이를 핑계로
강은 범람을 시작한다
팔 없이 떠내려오는 저 뗏목들
울음 없이 떠내려오는 퉁퉁 불은 부음들

 

2

무릇 사물이란 평정을 잃으면 소리를 내는 법이다. 초목은 본래 소리가 없지만 바람이 흔들어 소리를 내게 하고 물도 본래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흔들어 소리를 내게 하나니, 물이 뛰어 오르는 것은 무언가가 격랑케 한 것이고 빨리 흘러가는 것은 무언가가 가로막기 때문이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은 무언가가 뜨겁게 하기 때문이다. 금석도 본디 소리가 없지만 무언가가 때려서 소리나게 한다. 사람의 말도 마찬가지다. 부득이한 경우라야 말을 하게 되므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생각이 있기 때문이요 통곡을 하는 것은 서러움 심정이 있기 때문이다. 입 밖으로 나와 소리가 되는 것은 모두 불평이 있기 때문이다.


[푸른 빛과 싸우다]中에서

 

낙타와 낙타풀


세상의 모든 낙타들은 다 길들여졌으나 고비사막 어딘가 야생낙타가
남아 있다고 한다 신기루 따라 걷는 야생낙타는 타박타박, 그 소리는 몰
래 사막이 우는 소리와 비슷하다 한때 이곳이 바다였듯이 내가 물고기라
면 검은 아가미가 가만가만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다르지 않을것이다
낙타가 먹는 소소초라는 풀, 사막의 먹거리란 뻔하데 그마저 가시가 있
는 낙타풀, 다른 짐승이 얼씬도 못하게 심술이 닿은 소소초의 운명은 고
비사막이 자꾸 넓어지는 것과 닮았다 소소초 안에도 모래와 자갈뿐인 사
막이 있어 타박타박 야생낙타가 걸어가고 물고기였던 내가 화석으로 발
견되곤 한다 소소초를 씹을 때 낙타의 입은 가시 땜에 피가 흥건하지만,
내 육신은 막 떨어지는 저녁해를 떠받치지 못해 피곤하다

 

동서문학 2001년 겨울호


아파트

 

내달이면 입주가 시작되는 재개발 아파트는 길 가에 바짝 붙어 있다
8차선 대로의 인도에서 불과 몇 미터, 처음부터 그렇다기보다는 아파트
라는 짐승이 남몰래 뒤뚱뒤뚱 길가로 나앉은 것처럼 보인다
오천 세대 대단지 아파트는 어느날 저녁 일제히 불이 켜졌다 인접한
내집뿐만 아니라 먼지투성이 마음까지 전선과 전등이 얼기설기 얼킨
연금술이다 폭설이 가둔 고요를 기억하는 세상은 위로 위로만 올라가려는
밝은 부레의 힘이 반갑다
두 눈에만 불빛이 있다면 외면했겠지만 가슴이나 손 끝 어디나 말더듬이
불빛이 먼저여서 성탄절이 지척이다 불빛이 내면적이라는 사실 때문이라도
오늘 그레고리 송가 곁에 바짝 붙어야겠다